러프 컷 14편
<-- --> (금일 업로드하는 2회분 중 첫번째 회차입니다.)
집을 나선 선우가 버스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올, 연선우. 이젠 인터뷰까지 하고. 이열」
경훈이 메시지와 함께 신문 지면에 작게 실린 선우의 기사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안 봐도 뻔한 녀석 특유의 그 짓궂은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해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처음 기자와 얘기가 오고갔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게 난 토막 기사는 단독도 아니고 조연 특집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별로 실망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작은 기사가 터무니없이 축소된 결과물인 줄도 모르고 호들갑을 떨며 메시지를 보내는 제 친구 녀석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기사가 나가긴 나갔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선우는 경훈이 사진으로 찍어 보낸 신문 지면이 새삼 신기하게 다가왔다.
「나도 아직 못 본 걸 잘도 찾아냈네.」
「인마, 형은 지성인이잖아. 아침엔 모닝커피 한 잔에 꼬박꼬박 신문을 챙겨보는 지적인 스타일.」
한동안 경훈의 실없는 농담들을 웃으면서 보는 사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침 공기가 더 이상 못 견딜 만큼 춥지 않고 꽤나 서늘한 정도로 다가왔다. 봄이었고 자신에게는 연기할 장면들이 있었다. 선우는 느리게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마저도 즐거웠다.
* * *
지하철에서 내려 JBS 방송국의 후문으로 향하던 선우는 근처에 무리 지어 서있던 여학생 무리와 엉겁결에 시선이 마주쳤다. 슬그머니 다시 시선을 내려 조용히 제 갈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대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꽃깡패다, 꽃깡패!”
“그게 누군데?”
“왜 정오의 이별에 깡패역으로 나오는 배우 있잖아.”
“연선우, 연선우!”
무리 중 한 명이 끼어들어 빠르게 속삭였다.
“어, 맞아. 연선우. 실제로 보니까 더 존잘이다. 와, 존잘이 걸어 다녀.”
선우는 어쩐지 민망해져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빨리했다. 그때 무리의 흥분된 분위기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고 있던 한 여학생이 다소 엄중하면서도 진지하게 말했다.
“저런 외모로 깡패를 미화하면 안 되는 거야. 난 깡패 미화는 반대야.”
나름 소신껏 자기 의견을 펼치는 여학생이 순간 귀엽다는 생각에 선우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의견의 당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약간 뾰로통한 얼굴로 미화 반대 의사를 밝힌 여학생이 ‘어머’하며 얼굴을 붉히곤 작게 중얼거렸다.
“XX, 얼굴 미쳤다.”
선우의 시선이 잠시나마 자신들을 향하자 무리에서 꺄아하는 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선우는 어색함과 쑥스러움에 뒷목을 슥 한 번 매만지곤 걸음을 조금 더 빨리 해 건물 후문 안으로 들어섰다.
“연선우씨.”
드라마 세트장으로 향하는 복도를 걷던 선우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난 곳을 찾아 뒤를 돌아보니 그가 서 있었다.
“서PD님.”
“들어보니까 요즘 새로 별명이 생겼다면서요.”
남자는 다소 짓궂은 얼굴로 입가에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방금 전 여학생 무리에서 튀어 나왔던 단어를 애써 무시하며 선우는 시치미를 뗐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서...”
또르륵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하는 선우를 지켜보며 해경이 여전히 입가를 끌어올린 채 말을 이었다.
“왜요. 인터넷에 남주인 이태형보다 캡쳐가 더 많이 돌아다닌다고 하던데요. 사실 나도 몇 개 저장했습니다.”
태연스레 말하는 남자의 말은 사실인지 농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선우가 진담여부를 가리기도 전에 그가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겁니까. 볼 때마다 점점 더 마르는 것 같습니다.”
선우는 괜스레 턱을 쓸어내렸다. 근래 갑자기 늘어난 분량 탓인지 살이 좀 빠지긴 했다. 그러나 막상 그런 말을 하는 그 역시도 꽤 피곤해 보이는데다 전보다 더 턱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틈날 때마다 잘 챙겨먹고 있습니다. 서PD님이야말로 살이 더 빠지신 것 같은데요.”
“며칠 밤샘촬영을 했더니 바로 티가 나나 봅니다.”
그러면서 싱긋 웃는 남자는 피곤해 보이는 기색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당장 드라마 주연으로 나와도 될 만큼 수려하기만 했다.
“감독님, 국장님이 찾으시던데요.”
복도 모퉁이에서 갑자기 튀어 나온 한 남자가 다급히 다가와 말하자 해경이 혀를 찼다.
“기껏 도망쳤더니.”
해경을 찾아다닌 듯한 남자는 그가 다시 도망이라고 칠까 좌불안석하는 모양새였다. 그가 조금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오늘 촬영 잘해요.”
“네. 서PD님도 촬영 무사히 잘하세요.”
선우는 스태프와 함께 멀어지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둘 다 같은 방송국 작품을 촬영하는 탓에 이렇게 한 번씩 마주칠 때마다 매번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어쩐지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고. 물론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가 끝나고 타사 작품에 들어가게 되면 이런 우연한 만남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어쩐지 조금 아쉬울 것 같다고, 선우는 솔직한 감상을 마주한 뒤 나름의 출근을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 * *
“네가 찌른 거냐?”
돌아서던 해경이 멈칫 하며 다시 국장을 마주했다.
“제가 뭘 찌르면 안 될 일이라도 하셨나 봅니다.”
그 말에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너 이 새끼 언제까지 그렇게 기고만장할 수 있을지 한 번 두고 보자.”
“이제야 막 입봉한 일개 PD한테 너무한 말씀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제 곧 잘릴 분이. 해경은 그 말은 속으로만 삼키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이런 식으로 썩은 고기 하나가 걸러졌다면 또 나름 걸러진 것이겠지. 비록 제가 희생양이라면 희생양일 수도 있었지만.
결국 ‘타겟’은 대외적으로는 애초에 12부작 기획이었던 작품으로 포장되겠지만 사실상 내부 사정으로 조기종영하기로 결정 됐다. 방송국 고위 관계자와 출연자 간의 비리가 포착돼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 작품이 자신에게 배정됐을 때 어느 정도 흐름이 이상함은 느꼈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별 도리란 것 역시 딱히 없었다. 그는 형사나 수사관이 아니라 PD였으니까. 그저 연출하라니 했고 사실 반쯤은 후에 얼룩으로 남겨질 작품이 된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시기의 자신은 이미 권태와 무력감에 젖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때 이 작품의 오디션을 통해 연선우를 만났다. 그거면 됐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랬기에 후회 또한 없었다. 해경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 첫 메인 연출작을 조기종영으로 마무리하게 된 남자는 의외로 경쾌한 걸음으로 방송국 복도를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