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12편
<-- --> 남자는 선우에게 우산을 씌워준 채 차 앞까지 데리고 가 보조석 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여전히 다소 멍한 상태였던 선우는 빗방울들이 차체를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와 함께 뒤늦게 현실감이 물밀듯이 밀려와 선우는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취하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주정 아닌 주정을 부린 것 같다. 무례할 수도 있었던 질문에 대해 뒤늦게라도 그에게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뒤이어 차에 오른 해경이 여상한 말투로 손수건을 건넸다.
“감기 들지도 모르니까 우선 이걸로 닦아요.”
“감사합니다.”
머리와 얼굴을 비롯해 물기가 묻어있는 옷 여기저기를 닦아내고 있을 때 해경이 운전대를 잡으며 물었다.
“혹시 가고 싶은 곳 있습니까.”
“아뇨. 사실 술을 잘 마시지는 않는 편이라... 마땅히 떠오르는 곳은 없습니다.”
“그럼 원하는 분위기는 어때요. 조용하거나 조금 시끄럽거나.”
의외로 세심한 질문에 그를 돌아본 선우는 곧 그가 자신의 기분을 내심 살피고 위해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적당히 시끄러운 곳이 좋을 것 같아요.”
해경은 고개를 끄덕이곤 빗속을 부드럽게 달리기 시작했다.
해경이 선우와 함께 도착한 곳은 지어진지 얼마 안 된 펍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평일 야심한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술집 안은 반 이상이 차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등지고 스탠드바에 자리 잡았다. 인테리어나 분위기가 꽤 이색적이라 선우는 신기한 듯 내부를 둘러봤다.
“마시고 싶은 거로 골라 봐요.”
그의 말에 눈앞의 메뉴를 살피던 선우의 두 눈이 잠시 방황했다. 술 종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조금 망설이다 Best라고 작게 표시가 따로 붙어 있는 것을 가리키자 해경이 그것을 포함한 수제 맥주 두 종류와 적당한 안주를 주문했다.
“내일 스케줄 있습니까? 아, 오늘.”
하루가 끝나지 않았으나 자정을 넘겼으니 정확히 시간상으로는 오늘이었다. 혹시나 낮부터 촬영이 있을까봐 뒤늦게 해경이 선우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다행히 오늘 쉬는 날입니다.”
“그럼 작정하고 마셔볼까요.”
해경이 씨익 웃었고 곧 주문했던 술이 나왔다. 그러나 선우가 막 술잔에 입을 대자마자 바에 올려뒀던 해경의 전화가 다급히 울려대기 시작했다. 남자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제작팀이라 안 받을 수가 없네요. 잠깐 나가서 통화하고 오겠습니다.”
네.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 밖으로 나갔다. 선우가 다소 쓴 맛이 나는 맥주를 한 모금 삼켰을 때 갑자기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저기... 혹시 연선우씨 아니세요?”
선우가 돌아보자 20대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아... 네. 맞습니다.”
거봐, 내가 맞댔잖아. 두 여성은 팔꿈치로 서로를 찔러대며 작게 말을 주고받더니 선우에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혹시 싸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아직 따로 싸인을 준비하지 못한 선우는 서명용으로 쓰던 것을 조금 변형해서 쓰기로 했다. 연선우. 약간 흩날려 쓴 듯한 자신의 이름 석 자 밑에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남겼다. 그러다 어쩐지 문장이 너무 단출해 보여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라는 메시지를 추가했다. 그러다 마지막 마침표가 괜히 또 냉정해 보여 그 옆에 작게 하트(♡)를 그려 넣었다. 싸인이 점점 길어졌다.
그녀들이 선우에게 다가가기 시작할 때부터 연선우쪽을 주목하고 있던 몇몇 테이블에서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예인이야? 그 사람인 거 같은데. 왜 있잖아. 그런 대화들이 튀어 나왔고 여전히 긴가민가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 또한 있었다.
두 여성에게 싸인을 건네주고 악수까지 하고 나자 이번엔 30대 커플이 선우에게 다가왔다.
“그 정오의 이별에 나오는 배우 맞으시죠? 저희도 싸인 좀 부탁해도 될까요.”
선우는 다시 공손하게 싸인 요청을 받아들였다. 여자가 태블릿과 펜을 내밀었고 선우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이번엔 아이패드에 싸인을 했다.
방금 전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던 해경은 잠깐 사이 벌어진 낯선 풍경에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앉아있던 자리에 착석했다. 자신이 돌아온 줄도 모르고 아예 커플을 향해 몸을 돌린 채 열심히 싸인을 하고 있는 선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 아예 작정하고 구경할 속셈으로 턱을 괸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선우의 싸인을 받고 나서 고개를 돌리던 여성이 뒤늦게 해경의 존재를 의식하고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선우와 마찬가지로 남자도 범상치 않은 외모와 분위기로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던 까닭이다.
“혹시 이분도 배우신가...?”
혼잣말인 듯 슬쩍 떠보는 물음에 선우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해경을 돌아봤다.
“아, 이분은...”
선우가 조금 곤란한 듯이 입을 열자 해경이 싱긋 웃으며 선수를 쳤다.
“매니저입니다.”
남자는 뻔뻔하게 공을 쳤다.
“우와, 매니저분도 엄청 잘생기셨다.”
커플 남성이 사감 없이 느낀 바를 그대로 표현했고 덕분에 이목이 더 쏠리기 시작했다. 몇몇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휴대폰이나 종이 등을 챙겨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연선우를 알아본 사람도 있었지만 누군지 모르는 채 연예인이란 생각에 접근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슬쩍 바라본 해경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선우씨, 다음 스케줄 때문에 여기서 이만 일어나야겠는데요.”
해경이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진짜 매니저이기라도 한 것처럼 몰려든 사람들로부터 선우를 보호하듯이 어깨를 감쌌다. 그의 큰 키와 체격 덕택에 선우는 단번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가려졌다.
“어차피 술도 편하게 못 마실 것 같고,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죠.”
그가 선우를 향해 고개를 바싹 기울인 채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게 스쳤다. 가까이 있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 선우는 서로의 얼굴이 부딪치지 않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전히 매니저인 척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남자의 보호 아래 선우는 술집을 빠져 나갔다.
“예정에 없던 싸인회까지 하느라 수고했어요.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를 데려다 줄 생각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던 해경은 선우가 살고 있는 곳을 물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서PD님도 피곤하실 텐데...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내려주세요.”
그러나 해경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선우는 망설이다 결국 집주소를 불러주었다.
“차가 진입하기 어려운 동네라 근처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해경의 물음에 듣기 좋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대답하던 선우는 다 와갈 때쯤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차가 그 근처에 도착했을 때 선우는 그 잠깐 사이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해경은 얼굴을 자신 쪽으로 향한 채 곤하게 잠이 든 선우를 보곤 피식 웃었다. 밤늦게까지 촬영하고, 비 맞고, 싸인까지 하느라 힘들었겠지. 분명 한껏 지쳤을 텐데도 여전히 말간 얼굴로 잠이 든 선우를 해경은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다. 사실 순전히 그의 편안한 수면만을 위한 결정은 아니었다. 해경은 문득 이 모습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거듭 돌려보곤 했던 연선우의 영상 중에 이런 장면은 없었다. 생소했고 그래서 반가웠고 괜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장면은 대본상으로 따지자면 아마 이 정도의 지문일 것이다.
‘피곤에 지쳐 쓰러지듯 곯아떨어진 선우. 아기같이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그 장면은 화면상으로 길어봤자 한 10초 남짓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단 10초 안팎으로 보기에는 꽤나 아까운 그림이었다. 그저 잠을 자고 있을 뿐인데도 그랬다. 그래서 해경은 핸들 위에 팔을 괴고 고개를 묻은 채 잠든 연선우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