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11편
<-- --> “서해경에 대한 얘기야.”
불현듯 튀어 나온 그의 이름에 선우가 움찔하며 멈춰 섰다.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최근에 널 감싸고도는 게 티가 날 정도로 눈에 다 보이는데.”
방금 전처럼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고 우뚝 멈춰서 있는 선우를 바라보며 태형은 조급해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앞으로 그 사람이랑 계속 엮일 생각이라면, 일단 들어두는 게 좋을 걸.”
잠시 말없이 서있던 선우가 돌아보며 메마른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태형아, 나는 이제 너 못 믿어. 너한테서 누구 얘기든 들을 생각 없어.”
제 뜻대로 안 되자 불쾌한 듯 미간을 구기던 태형이 표정을 풀고 후우, 한숨 쉬었다.
“그래, 이해해. 그럼 이렇게 본 김에 네가 두고 간 옷이라도 갖고 가.”
선우는 약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아마 그와 사귈 때 두고 온 옷이 있었나 보다.
“모레 촬영장에서 돌려줘.”
“모양새가 영 이상하잖아. 남들이 이상하게 볼 수도 있고.”
“...매니저 통해서 돌려주든지.”
“내 매니저가 네 심부름꾼이야?”
제 의사와는 관계없이 거칠게 내뱉는 태형의 말에 현철이 안절부절 못하며 뒤쪽을 힐끔댔다.
“그냥 갖고 가기만 하면 될 걸 왜 괜히 남한테 일을 시켜. 너답지 않게.”
선우는 피곤한 듯 눈가를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결국 마지못해 태형의 밴으로 향했다.
선우가 밴에 오른 순간 백미러로 조심스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매니저 현철과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반응할 것도 없이 현철이 먼저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아무 것도 안 들린다는 듯 투명인간을 자처하며 운전에만 집중해 보였다.
선우는 계산이 철저한 태형이, 본인이 남자와도 사귈 수 있는 사람이며 선우가 그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매니저에게 들켰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매니저는 그저 태형의 가면 안의 성격까지 알고 있는 수준일 거라 선우는 짐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선우를 실은 밴은 태형의 빌라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기묘한 침묵만이 떠돌았다.
태형은 성공적인 데뷔 이후로 나름 안정 가도를 달렸다. 이 빌라는 3년 전 그가 구입한 곳으로 선우도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집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네.”
거실에 들어서며 태형이 능청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곳에서의 기억이란 선우의 일방적인 감정만이 남아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게 전부라 그다지 들추고 싶은 게 없었다.
“뜸 들이지 말고 옷이나 줘.”
“아, 미안. 사실은 거짓말이었어.”
태형이 웃으면서 소파에 느긋하게 걸터앉았다. 선우의 얼굴이 굳었다.
“너 대체... 요즘 왜 이래.”
“그냥 얘기나 좀 하자는 걸 네가 너무 정색하고 달아나니까 그렇지. 나 순간 상처받았다.”
선우가 길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 같다. 네가 무슨 얘길 하든 애초에 따라오질 말았어야 했는데. 이만 가볼게.”
선우가 몸을 돌리자 태형이 얼굴을 구기며 다짜고짜 말을 던졌다.
“서해경, 끝내주게 부자인 거 알아?”
걸음을 떼던 선우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연선우, 역시 넌 애구나.”
태형이 피식 하며 웃고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렸다.
“서해경이 아직 너한테 대달라고 안 해?”
그 말에 표정이 굳은 선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태형, 입 조심해.”
“이제야 입봉한 PD한테 설설 기는 인간들이 왜 한둘이 아닌 줄 알아? 서해경 그 자식 나름 잘난 집에서 태어났거든. 재벌집 자식이 뭐가 아쉽다고 방송국까지 기어들어오겠어. 여기저기 기웃대다 꼴리는 애들 있으면 낼름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지. 배우들하고 호텔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있어. 선우야, 너도 그 중에 하나야. 그냥 그 정도라고.”
태형은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쯤엔 마치 진심으로 선우가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잠시 흔들리던 선우의 눈빛이 서서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들어야 한다는 말이 그거야?”
“아직 이해 못했어? 넌 고작 그 새끼한테...”
그 때 선우가 별안간 피식 하고 웃었다. 태형은 이유도 모른 채 불쾌해진 표정으로 선우를 향해 쏘아붙였다.
“왜 웃어?”
“그냥...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겠구나 싶어서.”
선우가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돌아섰다. 너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나를 탓하고 싶진 않다. 그 때의 너는 이렇게까지 다 보여주지 않았었고 나는 네 일부의 모습이라도 그저 좋았었다. 그게 그렇게 잘못이었던 걸까.
“선우야, 너 스스로에게 한 번 솔직하게 질문해봐. 진심으로 서해경을 눈곱만큼도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지. 너, 항상 절실하잖아.”
문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기에 태형의 말은 점점 멀어졌지만 결국 선우의 귀에 끈질기게 닿고 말았다. 집이 너무 커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 집은 항상 너무 크고, 넓고, 선우를 외롭게 만들었다.
빌라 입구를 빠져나올 때 태형의 검은색 밴이 조명등을 깜빡였다. 선우가 의아하게 돌아보자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며 현철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태워드릴게요.”
어색하게 눈을 피하던 사람치고 의외로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반사적으로 괜찮다 거절하려던 선우는 마음을 바꾸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선우가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운전 하는 사람만 앞에 혼자 태운다는 게 그로선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현철이 조수석에 굴러다니던 티슈와 생수병을 허겁지겁 치웠다.
“집주소가 어떻게...”
현철이 내비에 주소를 입력할 모양새로 넌지시 물었다.
“그냥 JBS로 가주세요.”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현철은 별달리 토를 달지 않고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선우는 다시 방송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멀거니 창밖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새벽에 가까운 방송국 주변은 꽤나 고요해서 조용한 선우의 목소리도 분명하게 울렸다. 공손한 선우의 인사에 현철도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큰 밴을 끌고 사라졌다.
주차장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선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선우에겐 꿈의 장소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그 곳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별이 없었다. 날씨가 흐린지 밤하늘과 색을 조금 달리한 짙은 구름들이 여기저기 낮게 깔려 있었다. 선우는 작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별이 안 보인다고 해서 굳이 우울해하고 싶지 않았다.
밤하늘에 대한 감상을 마치고 주차장 입구를 나서는데 난데없이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비까지 맞고 싶진 않았다고. 선우는 지금 이 순간이 다소 야속하게 느껴졌다. 선우가 심야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조금 빨리하는데 드문드문 몸을 때리던 빗방울이 갑자기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대충 손을 뻗은 채로 몇 걸음 달렸을 때 옆에서 지나가던 차가 속력을 줄이더니 클랙슨을 울렸다.
선우가 우뚝 멈춰서 돌아보자 한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리며 우산을 펼쳤다. 큰 보폭으로 빠르게 다가온 그가 선우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웠다.
“연예인이 왜 비를 맞고 다닙니까.”
남자는 조금 웃으며 가볍게 질책하듯 말했다. 선우는 갑자기 나타난 그의 등장에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선우에게서 어쩐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느낀 해경이 금세 진지해진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냥...신기해서요.”
“뭐가 말입니까.”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아서...”
“JBS에 입사하길 잘했죠.”
남자의 다소 장난기어린 대답에 선우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티 내지 않고 세심하게 선우를 살피던 남자는 빗줄기가 더 거세지자 선우의 팔목을 잡고 조금 더 안으로 당겼다.
원래는 그렇지 않다던 남자가 이렇게 또 다정해서, 선우는 괜히 서러워지려는 감정을 참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태형의 말들이 떠올랐다. 마음에 담아두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탓이리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어질 말이었는데, 그보다 더 빨리 당신이 이렇게 또 다가온 탓이리라. 비가 내렸고, 서해경이 있었고, 선우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혹시...부자예요?”
선우는 마치 꿈결인 듯 중얼거렸다. 그가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물질적인 면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남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단단함과 풍요로움이 느껴졌고 그걸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그렇게 보였다. 선우는 궁금했다. 그의 답이 아니고 자신의 답이.
혹시 나는 당신을 이용하고 싶었을까. 그래서 나는 당신이...
선우는 왠지 초조해졌고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다.
느닷없는 선우의 물음에 잠시 의아하게 눈을 키우던 해경은 이내 덤덤하게 말했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렇구나...”
선우는 혼잣말을 하듯 고개를 조금 끄덕이더니 다시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의외의 질문을 건네고도 정작 그 질문에는 그리 관심이 없어 보이는 선우를 남자 또한 빤히 바라봤다.
해경은 선우의 유순한 눈동자가 조금 우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어쩐지 큰 빗방울 같다고도 생각했다. 해경은 손을 뻗어 선우의 뺨에 묻어있는 비의 흔적들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부자니까, 술이나 사줄까요?”
남자는 특유의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그렇게 말했다. 쉴 새 없이 무수한 빗방울들이 쏟아져 내리는데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선우의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