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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컷-10화 (10/49)

러프 컷   10편

<--  --> [내 차 타고 다니라 하려 했더니 재훈이 이 새끼가 여친이랑 여행 간다고 끌고 가 버렸다. 반납하는 즉시 너 빌려줄 테니 타고 다녀.]

“난 괜찮으니까 혹시나 재훈이한테 또 뭐라 하진 말고. 다행히 웬만하면 다 지하철이랑 버스로 갈 만한 데라 문제없어. 도움 필요하면 내가 먼저 말 꺼낼 테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낮에야 그렇다 쳐도 밤늦게 끝나고 집에 오기 불편하잖냐. 그리고 이제 주위에서 슬슬 알아보지 않아?]

“아직 그 정도까진 아냐.”

[내 주위에선 주연인 이태형보다 네 반응이 더 좋던데. 뭐 아무튼 너도 다닐만하니까 다니는 거겠지만 어차피 안 굴리는 차 네가 쓰면 좋지. 한 번 생각해봐. 오늘 촬영 잘하고.]

“그래, 생각해볼게. 신경써줘서 고맙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경훈에게 한 말은 빈말이 아니라 아직까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편했다. 얼마 전부터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가끔일 뿐이었다.

촬영용 슈트를 미리 갖춰 입은 선우는 톡톡히 배움의 값을 치른 덕에 여벌의 의상을 따로 챙겼다. 두고 간 게 없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방을 둘러보던 선우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오래 전부터 커튼 없이 덩그러니 걸이대만 달려있던 창가에 서해경의 셔츠가 걸려 있었다. 은은하게 햇살이 투과하는 희고 눈부신 그의 셔츠를 바라보다 선우는 집을 나섰다.

* * *

건물 후문으로 이어지는 주차장을 가로지르던 선우는 눈에 띄는 빨간 스포츠카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그 옆에는 훤칠하게 키가 우뚝 솟은 남자가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남자는 서해경이었다. 그는 약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조금 짜증나 보이기도 했고 난감해 보이기도 했다. 운전석에서 가녀린 손목이 튀어 나와 그의 팔을 붙잡았고 남자는 건조한 눈빛으로 그 손을 떼어냈다. 거부하는 손짓임에도 상대가 여자라서 그런지 움직임은 꽤 부드러웠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 곳으로 향해 있는 눈길을 거두고 다시 후문을 향해 걸었다. 문득 창가에 걸려 있는 셔츠가 생각났다. 그는 오늘도 슬랙스 위에 깔끔한 화이트 셔츠를 차려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옷장은 언제나 늘 풍족하게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의 셔츠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돌려줄 날을 가늠하던 것은 어쩌면 쓸모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선우는 잠시 생각했다.

촬영 전의 세트장 안은 적당한 소음과 부산스러움이 일상적으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감독님, 그게 사실이에요?”

“뭐가.”

“서해경 PD님 알고 보면 재벌가라던데.”

재철이 눈썹을 꿈틀대며 말을 걸어온 남자 스태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김군아.”

“네.”

“나한테 뭘 물을 때는 나에 대해 물어라. 너는 나한테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지?”

“에이, 감독님 또 그러신다. 은근히 관종이시라니까.”

“뭐, 이 새꺄?”

재철이 다리를 올려 엉덩이를 가볍게 차는 시늉을 했다. 스태프가 후다닥 물러나며 비실비실 웃었다.

“아니 그 정도는 뭐 비밀도 아니고 알려줄 수도 있잖아요. 두 분이 친하신 거 다 아는데.”

“누가 그런 미친 새끼랑 친하대? 너지? 그런 소문내고 다니는 게.”

“아니 그런 소문을 왜 내고 다녀요. 재미도 없는 걸. 재밌는 소문은 서PD님 쪽이죠.”

재철의 구박을 요령 좋게 피하던 스태프가 다시 은근슬쩍 궁금한 화제를 꺼내 들었다.

“들어보니까 여배우들한테 그렇게 많이 대시를 받는다는데. 배우들만 그런 것도 아니고 재벌가라 여기저기서 접촉이 엄청 들어온대요. 그쪽에선 PD라는 직업은 별로 선호를 안 한다던데 워낙 외모랑 집안이 받쳐줘서 그런가.”

무어라 한마디 보태주길 바라는 남자의 속내를 알면서도 재철은 이마께를 긁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새끼가 대시를 받든 말든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부러워서 그러죠. 부러워서.”

“일이나 잘해, 인마. 자고로 능력 좋은 남자에게 기회가 다가오는 법이다. 나 봐라. 우리 아내가...”

“아, 그만요. 감독님 또 아내분 자랑하려 그러시죠. 귀 닳았어요, 벌써. 저 장비 체크 좀 하고 오겠습니다.”

꽁지를 빼고 달아나는 스태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철이 ‘내가 뭐 자랑을 많이 했다고’하며 아쉬운 듯 쩝쩝 입맛을 다셨다.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가 다 들리는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우는 손에 들린 대본이 잘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숱하게 읽은 대본은 오래된 책처럼 너덜거릴 정도였으니 지금 안 본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선우는 지금 자신의 집중력이 흩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차라리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방금 전 그의 얘기를 들어서일까. 문득 주차장에서 봤던 빨간 스포츠카가 생각났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자신이 마주쳤던 남자의 모습들만 봐도 그가 인기가 많을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물며 그는 남자인 자신에게조차 꽤나 다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상념은 그가 자신의 휴대폰에 번호를 입력하던 모습으로까지 이어졌다. 마치 자신과 친해지길 바란다는 듯이 말하던 남자. 그 때는 비록 찰나긴 하지만 잠시 오해하기도 했었다. 태형과의 일로 이미 자신의 성향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순간 혹시나 싶었던 것이다. 선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찰나라 하더라도 그런 착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새삼 부끄러워 선우는 괜히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장PD를 비롯해 스태프들에게 부지런히 인사를 건네고 선우는 세트장을 나섰다. 생각보다 길어진 촬영에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방송국 후문을 나서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색 밴 한 대가 서서히 다가왔다. 선우의 앞에서 멈춰선 밴의 중간 창문이 내려가더니 태형의 얼굴이 슬쩍 비쳤다.

“할 얘기 있어. 잠깐 타.”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설핏 미간을 찌푸린 선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할 얘기 없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앞으로는 삼가줬으면 하는데.”

그 말에 태형은 얼굴을 한껏 찌푸리면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너한테 전혀 해 될 것 없는 얘기야. 아니 오히려 득이 되는 일이랄까.”

“득이 되든 해가 되든 이제부터 내 일엔 상관하지 마.”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선우를 향해 태형이 마지막 보루처럼 한 마디를 날렸다. 선우가 이 말만큼은 반드시 반응할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듯이.

“서해경에 대한 얘기야.”

========== 작품 후기 ==========

이번 화 분량이 좀 적어서 다음 편은 이삼일 내로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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