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9화 (9/49)

러프 컷   9편

<--  --> *금일 올리는 두 편 중 두번째 회차입니다.

선우는 달력을 넘기다 숫자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곧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올해는 예상치 못하게 바빠져서 시골에 내려가지 못할 것 같았다. 선우는 책장 위 조그만 액자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 나 성공했나봐. 이번엔 촬영 때문에 못 내려갈지도 몰라.”

그러면 그녀는 웃으면서 아마 이럴 것이다. 잘 됐네. 연기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벌어와, 아들.

밝고 사랑스럽고 다정했던 자신의 어머니. 그렇게 잠시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귀신 같이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화면에는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어색하게 띄워져 있었다.

선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득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편지가 떠올랐다. 자신이 없는 생에서 혼자 남을 어린 아들을 위해 꾹꾹 눌러쓴 편지에는 아버지와 관련된 당부 사항도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아빠가 집에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말 것

둘째, 아빠가 전화해도 받아주지 말 것

아들의 성격을 훤히 꿰고 있는 그녀는 괄호와 함께 다음과 같은 말도 적어두었다.

다만 우리 선우는 너무 착해서 거절한 횟수만큼 그 일을 마음에 쌓아 둘까봐 엄마는 걱정이야. 안 그래도 돼. 그래도 그 인간 무시하는 게 영 힘들면 전화는 열 번에 한 번 정도는 받아도 괜찮아. 한 번 선심 쓰고 ‘아, 나는 아들로서 할 도리는 다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 오케이?

그녀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들리는 듯 해 선우는 피식 웃었다. 문득 언젠가 편지를 읽고 울음 끝에 내뱉던 어린 자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니야, 엄마. 나 하나도 안 착해.’

나 하고 싶은 거 한다고 고집피우다가 엄마 그렇게 됐잖아. 그러나 끝끝내 그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대답할 수 없는 세상에서도 선우는 그녀의 대답을 알았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언제나 그녀가 자신을 더 사랑했으므로.

* * *

요즘 이태형은 꽤 저기압 상태였다. 그를 가장 기민하게 알아챈 것은 태형의 매니저 현철과 그와 오랫동안 사귀었던 선우였다. 기분이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한 번씩 제멋대로 엇나갈 때가 있는 태형이었지만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선우는 무시하고 있었다.

거기다 태형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꽤나 잘 포장할 줄 알았다. 알게 모르게 태형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그의 매니저를 일별하곤 선우는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오늘 촬영 일정이 꽤나 빡빡했기에 실수하지 않기 위해 선우는 대본을 두 번 세 번 검토하듯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이거 어떡하지? 미안해, 선우야.”

갑작스러운 커피 세례에 당황한 선우가 근처에 놓인 티슈를 급하게 뽑아 닦아냈지만 이미 하얀 셔츠는 얼룩덜룩한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태형이 미안한 듯 다시 한 번 사과했지만 선우는 연기로라도 다정하게 웃어줄 정신이 없었다. 여분의 셔츠가 없었다. 방송국 의상실에는 대체로 특수 의상들을 위주로 구비해 놓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선우는 더 초조해졌다.

“어, 이걸 어째. 태형씨 사고 쳤네. 선우씨 스타일리스트 없죠?”

“네. 지금 소속 없이 혼자 활동 중이라...”

장PD가 난감하게 웃으며 선우와 같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촬영 현장에 슈트 안에나 입을 흰 셔츠를 입고 출근할 남자 스태프는 없었다.

“태형아, 혹시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는 화이트 셔츠 없어?”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정작 가만히 서서 선우가 하는 양만 지켜보던 태형은 그가 자신에게 직접 물어오자 의외라는 듯 잠시 눈썹을 꿈틀댔다.

“미안. 보다시피 지금 입은 옷도 그렇고 요즘 내 의상에 셔츠 종류는 없어서.”

태형은 슬랙스에 캐시미어 니트를 입고 있었다.

“감독님, 죄송한데 급한 대로 저 빨리 세탁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다녀와요.”

생각보다 촬영이 길어지면서 오랫동안 연달아 두 씬을 찍고 잠깐 쉬던 중이었다. 일정이 조금씩 딜레이 되고 있어서 다들 식사 시간도 포기한 채 간단한 간식으로 요기하고 바로 촬영을 재개할 예정이었다.

선우는 혹시나 저 때문에 촬영에 지장을 미칠까 초조하게 입술을 씹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순간 눈에 들어 온 태형의 움직임이 단순한 실수 같지 않았지만 일단 일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슈트 재킷을 빈 화장실 옷걸이에 걸쳐 놓고 셔츠를 바로 벗어 물을 틀어 오염된 부분을 씻어냈다. 바로 씻어내면 지워질 줄 알았는데 커피에 우유와 시럽 등이 섞여 있어서 그런지 잘 지워지지 않았다. 비누를 두어번 더 짜서 부지런히 손으로 문지르고 있을 때 문득 무게감 있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오다 우뚝 멎었다. 위화감에 선우가 화장실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장신의 남자가 약간 놀란 듯한 눈빛으로 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PD님.”

“제가 잘못 들어온 줄 알았습니다.”

해경의 시선이 매끈하게 빠진 선우의 벗은 상체에 머물렀다. 선우가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세면대를 향해 다시 돌아섰다.

“의상에 문제가 생겨서요.”

그리고는 다시 급한 듯이 물을 틀어 거품을 낸 부분을 씻어내다 멈칫했다. 선우의 시선이 다시 남자에게로 향했다. 말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선우를 보고 해경이 가만히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설마 내가 탐이 나서 그렇게 보는 건 아닐 테고.”

“아, 저 그게...”

“셔츠 필요해요?”

해경이 진작 눈치 챈 듯 자신이 입고 있는 화이트 셔츠를 고개로 힐긋 가리킨 후 물어보자 선우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려요. 다른 걸로 갈아입고 이건 벗어서 가져다줄게요.”

“감사합니다.”

“대신 나중에 갚아요.”

끄덕끄덕. 농담 삼아 꺼낸 말에 선우가 당연하다는 듯 아이처럼 고개를 연신 끄덕이자 해경이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조금 품이 큰 셔츠를 입고 훤칠한 남자와 들어서는 선우를 보고 태형과 장PD가 눈을 크게 떴다.

“뭐냐, 서해경?”

해경은 재철에게 간단한 눈인사를 보내곤 바로 태형의 스타일리스트에게 다가갔다.

“혹시 옷핀 있습니까?”

“네? 아, 네.”

그녀는 휴대하고 있던 가방에서 몇 개의 옷핀을 찾아 그의 손에 건넸다.

“고맙습니다.”

해경은 받아 쥔 옷핀을 들고 곧장 선우에게로 다가갔다.

“연선우씨, 돌아봐요.”

“제가 하겠습니다.”

“입은 채로 해야 합니다. 잠자코 뒤로 돌아요.”

선우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고는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워낙 체격 차가 있어서 해경의 몸엔 피트 되게 맞았던 셔츠가 선우에게는 꽤나 헐렁했다. 셔츠가 재킷 안에서 겉돌지 않게 해경이 셔츠의 허리 쪽을 뒤로 잡아당기며 옷감을 겹쳐 옷핀으로 집기 시작했다.

“너 드라마 안 찍고 지금 여기서 뭐하냐.”

재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해경에게 물었다.

“지금 다들 식사 시간이야.”

“넌 밥 안 먹고 여기서 뭐하는데.”

“연선우씨 의상 봐주고 있잖아.”

허허. 내 참. 착실히 답하는 해경의 말을 다 듣고도 재철은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이 잘 아는 사이야?”

선우가 멈칫하자 해경이 가만히 있으라는 듯 셔츠를 잡아당기고 있던 손가락을 움직여 허리 부분을 살짝 눌렀다. 그에 선우의 허리가 다른 방향으로 움찔 튀어 나가자 해경이 쯧 혀를 차며 다시 셔츠의 모양새를 가다듬었다.

“음, 그냥 내가 연선우씨 팬이야.”

그 말에 선우가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보려 했지만 해경은 다시 한 번 엄격하게 ‘가만히’라고 내뱉으며 그의 몸을 고정했다. 재철은 대답을 들을수록 도리어 오리무중에 빠지는 제 정신을 바로 잡으며 ‘그만 두자, 그만 둬’하고 중얼거렸다.

태형이 멀찍이 떨어져서 미간을 구긴 채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옷핀을 꽂고 구부렸던 몸을 일으키던 해경과 태형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미하게 일그러지는 태형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해경은 피식 웃었다.

“연선우씨, 촬영 잘 해요.”

볼 일을 바로 끝마치자 돌아서는 그를 보며 선우가 다급히 인사를 건넸다.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시원한 걸음으로 금세 멀어져갔다. 큰 소리 한 번 없이 시선을 휘어잡다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사람들이 다시 웅성대며 촬영 준비를 재개했다.

선우는 해경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를 지켜보다 무의식적으로 셔츠의 허리 쪽을 만지작거렸다. 옷감이 자신의 몸을 한 번씩 스칠 때마다 옅은 스킨 냄새와 은은한 그의 체향이 느껴졌다. 셔츠는 몹시도 부드러웠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