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8편
<-- --> *금일 올리는 두 편 중 첫번째 회차입니다.
해석하기 힘든 표정의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 선우는 아차 하고 서둘러 그의 손에 들린 쪽지를 수거해갔다. 손 안에 숨기듯 다급히 종이를 접는 선우를 보고 남자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왜 감춥니까.”
그런 남자의 기세가 묘하게 사납게 느껴져 선우는 자기도 모르게 변명처럼 덧붙였다.
“개인정보라...”
예상치 못한 선우의 대답에 해경이 결국 졌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조금 짓궂게 덧붙였다.
“같이 촬영한지 얼마 안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연선우씨가 무척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렇다기보다는 서로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에서...”
대충 얼버무리는 선우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 친하게 지낼 예정입니까.”
“그거야... 서로 어색한 것보다는 아무래도 그게 더 낫지 않을까요.”
어쩐지 취조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살짝 들었지만 선우는 괜한 생각이라고 넘겨버렸다. 선우의 대답에 빤히 시선을 마주해오던 남자가 문득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줘봐요.”
뜬금없는 요청에 약간의 의아함은 들었으나 선우는 자연스레 재킷 안쪽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해경이 길고 반듯한 손가락으로 휴대폰에 번호를 눌러 입력했다.
“이제 저도 연선우씨와 더 친해질 수 있겠네요.”
그리고선 남자는 싱긋 웃어보였다.
* * *
극에 자주 등장하는 식당을 재현해낸 세트장 안은 촬영 시작과 함께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내 덩치 좋은 남자들의 묵직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장면이 시작됐다.
식당에 찾아온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을 보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본능적으로 감싸 안는다. 다섯 살배기 남자아이는 그들이 딱히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어머니의 두려움에 전염된 듯 큰 눈을 울멍울멍 뜨며 불안하게 앞에 선 사내를 올려본다. 어린 아이와 시선이 마주친 남자의 눈은 여전히 변화 없이 서늘하기만 하지만 그는 무리지어 선 사내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서 남자는 그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사탕상자를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내 아이의 손에 쥐어준다.
아이가 머뭇머뭇 상자를 받아들고 거기에 몰입하는 사이 남자는 여상한 말투로 그녀에게 청천벽력같은 말을 꺼낸다. 냉큼 입안에 사탕을 넣고 혀를 굴리던 아이는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사탕을 준 남자를 다시 본다. 남자는 무감한 눈으로 그들 모자를 보고 있다. 아이는 울고 있는 어머니의 옷깃에 매달린다.
컷 소리가 나자마자 선우는 장면에서 빠져나오며 아역 출연자를 힐긋 바라봤다. 해당 씬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아역배우의 엄마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선우는 엄마에게 팔을 벌리며 안기는 아이의 움직임을 조용히 바라봤다. 아이는 어쩐지 조금 침울하고 시무룩해 보였다.
“우리 유빈이, 너무 잘했어.”
어머니가 밝게 웃으며 잘했다고 엉덩이를 두드려 주는데도 엄마의 목에 팔을 두르고 안긴 아이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유빈아, 엄마 저기에 있는 누나랑 얘기하고 와야 할 것 같은데 여기 잠깐만 앉아있을 수 있어?”
아이는 자신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고마워. 엄마 빨리 갔다올게.’하고 준비되어 있던 의자에 앉혀주자 아이는 발을 까딱이며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선우는 조금 머뭇거리다 아이에게 다가갔다. 혹시나 저를 보고 놀라거나 무서워할까봐 조금 거리를 두고 멈춰선 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선우가 다가올 때부터 빤히 지켜보고 있던 아이가 눈을 도로록 굴리며 눈앞의 그를 조용히 바라봤다. 선우는 가만히 웃어 보이며 주머니 안에 챙겨두었던 작은 캐릭터 장난감을 꺼내 흔들었다.
“이거 줄까?”
선우를 한 번 보고 장난감을 한 번 본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을 내밀자 아이가 조그만 손으로 알록달록한 장난감을 집어 들었다. 기분 좋은 듯 작은 입가를 야무지게 휘는 아이를 보며 선우가 미소 지었다. 눈을 끔뻑이며 자신을 조심스레 쳐다보는 아이에게 선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아까 무서웠지.”
아이가 고개를 숙이면서 작게 끄덕끄덕했다. 그리고는 슬쩍 눈을 올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다정한 눈빛을 하고 있는 선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근데 지금은 안 그래요...형아 이제 안 무서워요.”
선우가 조금 안도하며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고마워. 유빈이가 연기를 너무 잘해줘서 그래. 아저씨들 막 무서워해야 하는 장면이었잖아. 그래서 그 때는 무서웠던 거야. 감독님이 ‘컷’하고 소리치면 그땐 안 좋은 기분 다 잊어버리자. 할 수 있겠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선우는 아이의 침울했던 얼굴을 떠올리며 나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을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커! 하면 잊어버려요?”
“응. ‘커’하면 잊어버려.”
아직 컷이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어리지만 아이는 영리하게 알아들었다. 유빈이 똑똑하네. 선우가 웃으며 다시 한 번 칭찬하자 아이가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형아, 근데 형아는 아저씨 아니잖아요.”
“아저씨 아닌 거 같아?”
“네. 형아는....잘생겨써요.”
그러면서 아이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 * *
방송국 뒤편 공터에 이태형의 현수막이 걸린 커피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태형의 소속사에서 보낸 듯 회사 이름과 함께 배우와 제작진들을 격려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재철은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카페모카를 막 받아서 뿌듯한 얼굴로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잔뜩 설레는 얼굴로 빨대를 막 입에 물려는 순간 휙 하고 손 안에 있던 카페모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런 개자식을 봤나.”
범인인 서해경이 싱글싱글한 얼굴로 아직 개시도 안 한 카페모카를 쭉 빨아들였다.
“사람 하나 살렸다고 생각해. 방금 전까지 당이 뚝 떨어져서 죽기 직전이었거든.”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하기도 힘든 게 해경의 얼굴은 꽤나 피곤해 보였다. B팀이 투입돼 나름 여유가 생긴 재철과는 다르게 쭉 혼자서 드라마 전체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해경은 날이 갈수록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 힘들면 B팀 넣어 달라 그러든가. 첫 연출작이라 끝까지 혼자 맡고 싶어서 그래?”
그 말에 해경이 피식 웃으며 바로 부정했다. 그럴 리가 있나.
“어차피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어쩌면 조기종영 할지도 몰라.”
“뭐? 시청률이 나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왜?”
놀란 재철과는 다르게 해경은 본인의 작품 얘기를 하면서도 심드렁하기만 했다. 재철이 뭔가 더 묻기 위해 입을 열려다 건물 내부 모퉁이에서 나타난 누군가를 보고 ‘어’하며 멈칫했다. 그의 반응에 해경 또한 재철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연선우가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후문을 나서 커피차 앞으로 다가섰다.
“둘이 엄청 친해졌네.”
유리벽을 통해 보이는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바라보며 재철이 중얼거렸다. 몸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던 선우가 음료를 만들던 남자에게 무언가를 주문했다. 그 때 아이가 잡고 있던 선우의 손을 흔들흔들하더니 안아달라는 양 두 팔을 펼쳤다. 선우가 웃으며 남자아이를 안아들었다.
“연 배우 웃으니까 주변에 꽃 피는 거 봐라. 선우씨 로코 찍어야겠다, 로코.”
재철의 첨언에 해경이 피식 웃었다. 아이가 기분 좋은 듯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선우의 목에 팔을 꼭 감고 헤헤 웃었다.
이태형의 스티커가 붙어있는 카페모카를 태연하게 마시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해경이 불쑥 한 마디 했다.
“인기 많은 거 맞네.”
아이 앞에서 무장 해제된 연선우는 쉴 틈 없이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해경은 문득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 어느새 온화해진 것을 느끼며 불현듯 봄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이어서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