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6화 (6/49)

러프 컷   6편

<--  -->  다소 기묘한 인연이었다. 처음엔 불시에 들린 누군가의 인기척에 선우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드러난 인영이 바로 그 남자라는 걸 아는 순간 당황과 놀라움 사이로 묘한 안도감이 일었다. 그리고 선우는 이 작은 안도감에 재차 당황스러워졌다.

태형이 사라진 후 멀거니 그를 보고 서있던 선우는 조금 어색한 걸음으로 해경에게 다가갔다.

“인연인 것 같지 않습니까.”

남자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저도 특이한 우연이 겹친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선우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방송국에서 서해경을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이 시간에 그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짐작한 선우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세트 촬영이신가 봅니다.”

“아뇨. 오랜만에 쉬는 날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정오의 이별 PD가 친한 지인이라 놀러 왔습니다.”

방송국에 놀러 왔다는 그 천진한 말이 어쩐지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몹시 그다워 보이기도 했다.

“이태형씨는 저를 영 미심쩍어 하던데 연선우씨는 따로 할 말 없습니까.”

“특별히 없습니다.”

“내가 불안하진 않습니까.”

“네, 이상하게도...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조용하면서도 오래도록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연고 한 번 발라준 효과가 꽤 크군요.”

남자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선우가 고개를 숙이며 가만히 웃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장소가 장소니만큼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형이가 뒤늦게 제 출연을 알게 돼서 당황했는지 조심성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선우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애인이 별로 좋은 사람 같지는 않더군요.”

선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괜찮겠습니까.”

여러 가지를 묻는 듯한 남자의 말에 선우는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들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잘 생각했어요. 그럼 먼저 들어가 봐요.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으니 다음에 또 보죠.”

선우는 그와 인사를 나눈 후 건물 출입구로 향했다. 갑작스런 해경의 등장에 가슴 철렁했던 것도 잠시, 결국 평연하게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 그가 한편으로 고마웠다. 한때 사랑했던 이가 다시 황폐하게 만든 마음은 어느새 가라앉았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연기뿐이었다.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감사했다.

해경은 촬영이 끝난 후에 느지막이 세트장을 찾아 방금 촬영한 화면을 돌려보고 있었다.

“인마, 이게 네 드라마냐.”

배우들을 먼저 돌려보낸 뒤 후작업 때문에 스텝들과 몇 가지 상의를 하고 돌아온 재철이 툴툴대며 해경의 옆에 섰다. 화면에는 남자 주인공인 이태형과 급하게 조연으로 투입된 연선우가 극중에서 처음 만나는 씬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 친구 오늘 보니 연기 잘하더라.”

해경은 대답 없이 그저 화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까딱하면 이태형이 밀리겠어.”

그 말에야 해경의 시선이 힐긋 그를 돌아봤다.

“악역이고 설정도 뻔한데 이 친구가 하니까 은근 드라마가 돼. 방송 나가면 김작가가 삘 받아서 분량 늘리는 거 아니야, 이거?”

남자의 앞서가는 상상에 해경이 피식 웃었다. 사실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 드라마를 집필하고 있는 김현서 작가는 다소 즉흥적이기로 유명했다. 쪽대본까지는 아니지만 드라마 중반부터는 늘 생방 촬영에 시달릴 만큼 대본 넘기는 타이밍이 아슬아슬했다. 그럼에도 시청률은 꾸준히 선방한다는 게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이태형과 연선우라. 해경은 한 화면 속에 나란히 잡힌 두 사람을 새삼스레 응시했다. 둘이 연인이었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타인의 일에는 워낙 별 관심도 없고 간섭하는 일도 없는지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해도 자신에게 딱히 중요하진 않지만 한편으로 묘하게 신경 쓰이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저 남자 때문이겠지.

해경은 사각 프레임 속 연선우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집요하게 좇았다. 잘생겼지만 제법 미형에 가까워 부드러우면서도 연약한 느낌을 주던 그의 얼굴은 악한 역할에도 썩 드라마틱한 효과를 심어주었다. 물론 외모는 부차적인 것이고 그의 연기가 그런 연출을 가능하게 했다. 해경은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포만감과 갈증을 동시에 느꼈다.

“저게 진짜 너라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화면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제 친구의 모습에 선우는 어색하게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칭찬하는 말이 아님에도 간혹 주변에서 보이는 이런 반응들은 어쩐지 저를 쑥스럽게 만들었다.

“설마 그 동안 내가 알던 연선우가 가짜고 알고 보니 실체는 저렇다든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의심스럽게 자신을 쏘아보는 경훈의 머리를 장난처럼 흩트리고는 선우는 그의 옆에 앉았다.

“같이 보는 거 쑥스럽다니까 왜 굳이 기어오는데.”

“왜긴 왜야. 차인 연선우가 찬 이태형을 연기로 바르는 역사적인 장면을 같이 기념해야 될 거 아냐.”

“...바르긴 뭘 발라.”

선우의 타박에도 경훈은 꽤나 진지한 장면을 낄낄거리면서 즐겁게 보고 있었다. 선우는 아직 제 모습이 나오고 있는 TV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시계를 힐끗 쳐다봤다.

“다 보고 문단속 하고 가라. 난 나가봐야겠다.”

“어, 뭐야. 어디가.”

“아주머니한테 연락 왔어. 알바가 갑자기 그만 둬서 일손이 부족하신가봐.”

“너 식당 일 계속 하려고?”

“아냐. 어차피 오늘이랑 내일은 쉬는 날이기도 하고. 일손도 도울 겸 알바도 할 겸 겸사겸사 나가는 거야. 그리고 아주머닌 일당 바로 주셔서 좋아.”

솔직한 선우의 말에 경훈이 피식 웃었다.

“배우로 성공해서 일당 많이 받으면 우리 선우 좋아서 뒤지겠네.”

낡은 장판 위에서 뭉그적대며 놀리는 그의 말에 선우는 웃으면서 외투를 챙겨 입었다.

“그래도 몸 사려라. 주연도 하기 전에 몸 탈나지 말고.”

막 나가려던 선우는 그 말에 문득 남자가 생각났다. 자신을 살피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던 그. 그것은 마음 없이 희망을 주는 텅 빈 말이 아니라 날카로운 외피를 두른 진심어린 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고마웠고 대충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선우는 발길을 돌려 장갑과 머플러를 찾아 꺼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쌀쌀한 겨울 공기가 뺨에 부딪쳤다. 그러나 중무장한 몸은 아늑하기만 했다.

“오랜만이에요, 아주머니. 별 일 없으셨죠?”

“아유, 나야 늘 똑같지. 왜 또 살이 빠졌어. 밥은 먹었고?”

김씨는 손 하나가 아쉬워 선우를 급히 불러내고도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끼니부터 챙기려 했다.

“네, 먹고 왔어요. 바로 일하면 돼요. 주문 바뀐 건 없죠?”

“응. 그대로야.”

그리 크지 않은 식당은 한 테이블만 남기고 손님이 다 차 있었다. 오래 전부터 입소문이 나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오고 단골도 꽤 많았다. 선우는 외투를 벗어 식당 안쪽에 작게 나 있는 공간에 내려두고 팔을 걷어붙였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네, 잠시만요.”

오자마자 쏟아지는 추가 주문과 나가고 새로 오는 손님들로 인해 선우는 정신없이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선우야, 이제 손님도 좀 빠졌으니 여기 앉아서 좀 쉬어.”

밖은 여전히 쌀쌀했지만 식당 내부는 훈훈했다. 거기다 한동안 쉴 틈 없이 일을 했더니 선우는 조금은 덥기까지 했다. 물건이 쌓여 있는 가장 안쪽 테이블에 그가 앉자 아주머니가 직접 담근 식혜를 컵에 따라 내왔다.

“이거 한 잔 마셔.”

“감사합니다.”

식혜를 꿀떡꿀떡 아주 달게 마시는 선우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김씨가 입을 열었다.

“아까 TV에 너 나오는 거 봤다.”

“아, 보셨어요?”

“이번엔 나쁜 놈으로 나오나봐? 너 아닌가 하다가 그래도 이쁜 거 보니 우리 선우 맞구나 했지.”

“하하. 네, 악역이에요.”

선우가 웃으며 대답하자 그녀가 대견하다는 듯 푸근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내일은 가게 쉬고 모레부터 새로 사람 나오기로 했어.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우리 선우 이제 배우로 승승장구하는 것 좀 보자.”

“저 무리해서 나온 거 아니에요. 그래도 아주머니 말씀대로 연기 열심히 할게요.”

그래그래, 하며 김씨가 선우의 등을 도닥일 때 주머니에 있던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선우가 휴대폰을 꺼내자 그녀가 받아보란 눈짓을 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액정에는 모르는 개인 폰 번호가 찍혀 있었다.

“여보세요.”

[아, 연선우씨죠? 장재철 피딥니다. 지금 통화 돼요?]

지금 출연하고 있는 작품의 PD가 직접 건 전화에 선우는 조금 긴장한 채 몸을 일으켰다.

“통화 가능합니다.”

[다른 게 아니고 스케쥴 때문에요. 선우씨 내일 시간 돼요?]

“네, 됩니다. 혹시 촬영이 앞당겨졌나요?”

[아뇨. 연선우씨 분량이 앞으로 좀 늘어날 것 같아.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인터넷 반응도 꽤 좋아요. 뭣보다 김 작가가 꽂혔어. 허허.]

선우는 조금 얼떨떨한 채로 장PD의 말을 듣고 있었다.

[대본 새로 나온 거 방금 전에 선우씨 메일로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요. 오늘 푹 자둬. 이제부터 바빠질 테니까.]

머리로는 알아들었지만 제대로 실감이 안 나 선우는 네, 네 열심히 대답만 하고는 통화가 끝난 뒤에도 멍하니 서 있었다. 가슴 속에 무언가 뜨겁게 일렁이다 점차 크기를 부풀리더니 이내 온 몸을 휩쓸었다. 기회. 그것은 선우의 인생에 얼마 없던 흔치 않은 선물이었다. 그렇기에 선우는 그것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