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5편
<-- --> “뭐 보냐.”
가게 영업을 마치고 빈둥거리기 위해 본인의 집이 아닌 선우의 자취방을 택한 경훈이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오며 선우의 어깨 너머를 힐끔댔다. 선우는 괜스레 찔려서 리모컨을 움켜쥔 채 채널을 돌릴까 하다 그만두었다.
“에라이, 등신.”
선우의 옆에 철퍼덕 내려앉은 경훈이 TV화면을 보고 적나라한 욕설을 내뱉자 선우는 피식 웃고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보려고 튼 건 아니었는데 나오니까 보게 되네.”
평일 야간 시간대를 감안하면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공중파 토크쇼에선 태형이 오늘의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었다.
“그래, 저 철면피 개자식이 오늘은 또 어떤 가식을 떨 지 한 번 보자.”
경훈이 맥주를 홀짝이며 험상궂은 얼굴로 TV 화면을 노려보듯이 봤다.
[하하. 태형씨는 여전히 유머러스하고 센스 있으시네요. 그럼 다음은 작품 관련 얘기로 넘어가볼까요. 혹시 태형씨는 이번 드라마 ‘정오의 이별’에서처럼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이유로 이별을 당했다거나 반대로 통보했던 경험 있으신가요?]
선우의 손이 조금 움찔했다. TV 속의 남자는 잘생긴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하더니 달콤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글쎄요. 전 스스로가 꽤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랑에 한 번 빠지면 꽤 로맨티스트이자 이상주의자가 되는 편이라서요. 그런 이유로는 이별을 당한 적도, 그 반대의 경우도 없었습니다.]
[와우, 만인의 연인 태형씨가 로맨티스트가 되다니, 상상만 해도 질투 나면서도 설레는데요. 그럼 보통 연인과 헤어지게 된 이유는 뭐였나요?]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냥, 사랑이 끝나버린 거죠.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연애를 계속 할 순 없으니까요.]
“지랄하고 있네. 눈이랑 귀가 썩어서 더 이상은 못 봐주겠다.”
경훈이 리모컨을 빼앗듯이 가로채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돌려댔다. 이미 그의 모습이 사라진 화면에서 그가 남긴 잔상을 바라보던 선우는 문득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의 마음이 식었다는 것은 사실 조금 더 오래 전에 눈치 챘었다. 그것은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잘 보이는 변화였다. 그의 변화가 커서가 아니라 추가 기울어져버린 관계에선 불리한 사람이 보다 아플 만큼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 추를 되돌리길 포기한 순간부터 선우의 가슴에 파인 공동은 점점 커져갔다.
“촬영 많이 힘들어?”
[응, 그렇지 뭐. 밥은.]
“먹었어.”
[뭐 먹었는데.]
“식당에서 아주머니가 부대찌개 해주셨거든. 그래서 그거랑...”
통화를 할 때면 언젠가부터 조금 다른 정적을 느끼곤 했다. 선우는 몇 번 그 일이 반복되고 나서야 그게 태형이 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쥐고 주변의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
때때로 선우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어도 그는 재촉하거나 통화가 이상하다며 의아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막 사랑에 빠졌던 시기에도 이와 비슷한 침묵이 오고 갈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침묵이 가졌던 성질과 의미는 조금 달랐다. 딱히 할 말이 없어도 서로의 숨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던 시절. 그런 날들이었다. 그리고 근래에 태형은 이전의 침묵과 닮은 시간들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태형아.”
[......]
전화기 상에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휴대폰의 모서리 부분을 쥐고 있으리라.
너는 왜 아직도 나를 만나니. 선우는 소리 내 묻지 못했다.
왜 나는 이 전화를 끊지 못할까. 그에 대한 답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랬어? 선우야, 지난 회 모니터링 한 부분 있지. 그거 매니저 형한테 좀 보내줄래?]
“...그래.”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를 매달리듯 버티며 이별을 보류하는 것뿐이었다. 헤어짐을 미뤄둘 수록 무언가가 가슴을 긁고 지나가는 날들 또한 쌓였다. 왜 이토록 바보 같은 짓을 할까. 수없이 질문하면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다 깨달았다. 제 세상의 반은 꿈이고 반은 너인 줄 알았던 시절, 그 계산이 조금 잘못돼 있었다는 걸.
***
[모레쯤 촬영 들어갈 건데, 선우씨 괜찮죠?]
“저 그게...”
선우는 그답지 않게 조금 망설였다.
[왜요? 스케쥴 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작가가 갑자기 만든 캐릭터긴 한데 꽤 괜찮은 기회 같아서 연락한 건데. 비중도 좀 있을 거 같고. 조연이라 좀 그런가?]
“그럴 리가요. 저야 감사하죠. 하겠습니다. 메일로 대본 부탁드릴게요.”
선우가 잠시나마 뜸을 들인 이유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태형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연선우. 그는 씁쓸하게 한 번 웃고는 노트북을 열었다. 갑자기 결정된 사항이니 만큼 일정이 촉박했다. 여유 없는 준비 기간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제 노력뿐이다. 다행히 메일함에는 대본이 바로 전송돼 있었다.
선우가 JBS의 방송국 내 세트장을 찾아 장재철PD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개인 스텝들에 둘러싸인 태형이 등장했다. 순간 선우를 본 그의 눈썹이 잠시 구겨졌다 제자리를 찾았다.
“아, 태형씨. 마침 잘 왔어. 인사해. 여기는 ‘지훈’역 맡게 된 연선우씨.”
“오랜만이네.”
재철의 소개에 태형은 산뜻한 미소를 그려 보이며 악수를 건넸다. 정말로 반갑다는 듯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는 태형의 손을 마주잡으며 선우 역시 자연스럽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래, 오랜만이다.”
“오, 서로 아는 사이야?”
“네, 대학교 동깁니다.”
“잘 됐네. 자연스럽게 호흡 맞추면 되겠어.”
장PD가 태형과 선우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한 후 촬영 준비를 위해 돌아섰다.
“잠깐 얘기 좀 하자.”
태형은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작게 속삭이곤 세트장을 빠져 나갔다. 선우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태형은 건물 뒤편 공터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뒤돌아서 있었다. 선우가 다가가자 태형은 하아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왜 거절 안 했어.”
“무슨 말이야.”
“내가 나오는 작품 출연하고 싶어?”
“못 할 이유는 뭔데.”
후우. 태형이 답답한 듯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선우를 향해 돌아섰다.
“솔직히 말하면 난 껄끄럽다.”
그의 말에 표정이 굳어진 선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힘들어 할 사람은 나야. 그런 내가 괜찮다는데 네가 왜.”
새어나오는 감정을 채 다 갈무리하지 못한 선우의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렸다. 태형이 선우를 달래듯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한텐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도 이렇게 부딪쳐서 서로 좋을 거 없다는 얘기야, 내 말은.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게 나은 일이라는 듯 얘기하는 그 말에 선우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고 말았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 무슨 소문이 난다는 거야.”
선우의 말에 잠시 미간을 찡그리던 태형은 재킷 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헤어지니까 이게 불편하구나. 사귈 땐 꽤 말 잘 듣더니.”
선우의 표정이 굳었다. 태형은 담배를 쥔 채 곤란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긁었다.
“너 혹시 나한테 미련 남아서 그래?”
하. 선우는 기가 차 헛숨을 내뱉었다.
“이태형, 너 나보고 현실 파악 하라 그랬지.”
태형은 지금 그 말이 왜 나오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시놉들 쌓아놓고 이번엔 어떤 작품의 주인공을 할까 고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휴대폰에 섭외 담당자 이름만 떠도 감지덕지 하는 입장이라고.”
“그럼 내가 다른 작품 조연 자리 알아봐줄게.”
“...뭐?”
“내가 알아봐 줄 테니 다른 거 하라고.”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말했잖아. 너랑 얽히는 거 껄끄럽다고.”
“흐음.”
그때 갑자기 난데없이 끼어든 낯선 이의 목소리에 태형과 선우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걸까. 한 손에 담배를 쥔 채 그늘진 건물 외벽에 기대 서 있는 장신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라도 사람이 있다는 기척을 내 두는 게 두 사람한테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아,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내가 먼저 여기 와 있었습니다.”
남자는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한가로이 연기를 흘려보냈다.
“어디서부터 들었습니까.”
태형이 동요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남자에게 물었다.
“말했잖아요. 두 사람 오기 전부터 여기에 있었다고.”
태형이 주먹을 움켜쥔 채 이를 물었다. 그런 태형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해경이 입을 열었다.
“괜히 겁먹을 필요 없어요. 말 옮기고 다니는 취미 없으니까.”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이태형씨 보기보다 겁이 많네요. 왜요, 이 바닥에 다 당신 같은 사람들만 우글거릴 것 같습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본의 아니게 대화 내용을 다 듣게 된 제 감상이라고나 할까요. 나야 당신을 지금 처음 보지만 당장 여기서만 봐도 이태형씨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는 알 것 같거든. 모든 판단을 다 당신 같은 사람을 기준으로 하지 말란 소립니다.”
태형은 얼굴을 왈칵 구기며 숨기지 않고 제 감정을 드러냈다.
“쓸데없는 말 안 하신다니 그 말은 믿겠습니다만 그 외의 부분은 좀 불쾌하군요.”
“당신은 좀 그럴 필요가 있죠.”
“...뭐라고요?”
“안 그렇습니까, 연선우씨?”
갑작스런 부름과 함께 남자의 시선이 옮겨지자 태형이 얼굴을 구기며 선우를 돌아봤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드라마 감독님이야.”
“젠장.”
태형이 인상을 쓰며 거칠게 내뱉었다.
“이태형씨 안에서 찾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싱긋 웃어 보였다. 잠시 선우와 해경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태형은 성큼성큼 출입구를 향해 걸었다.
“이태형씨.”
태형이 가까워졌을 때 해경은 선우의 귀에 들리지 않게 그를 불렀다. 태형이 멈칫 하며 돌아보자 해경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연선우가 무섭습니까?”
“무슨 소립니까.”
“본인이 더 잘 알 텐데요.”
“......”
“비겁한 방법 쓰지 말고 지금이라도 스스로 올라설 생각이나 하지.”
해경의 눈이 매섭고 날카롭게 빛났다. 놀라 두 눈을 크게 뜨던 태형이 별안간 입술을 비틀었다.
“당신 뭐야. 연선우가 벌려주기라도 했어?”
태형의 저질스런 말에 잠깐 굳었던 해경이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이태형씨, 상상력이 꽤 빈약하군요. 그래도 나쁘진 않네요. 잠깐 생각해봤는데 꽤...”
남자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분에 차 얼굴을 일그러뜨린 태형이 욕설을 내뱉으며 돌아섰다. 성이 난 발걸음 소리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해경이 여전히 먼발치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선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음. 목 안을 울리며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던 해경은 이내 생각을 접고 그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담배 맛이 달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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