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4화 (4/49)

러프 컷   4편

<--  -->  해경에게 있어 낮에 짧게 마주친 연선우와의 만남은 묘하게 여운을 남겼다. 자신은 연선우가 배우의 꿈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지지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그렇다’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본론이 아닐 지도 몰랐다. 그 근원은 정확하게는 그가 배우로서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다기보다 그의 연기를 보다 안정적으로 풍요롭게 보고 싶은 욕심인 것이다.

해경은 오랜만에 들른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샤워 직후 서재를 찾았다. 분명 여기 어딘가에 뒀던 것 같은데. 데스크 위는 해경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지만 물건이 워낙 작아서인지 한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세 번째 서랍을 열고나서야 그토록 찾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에 쓰는 저장용 메모리였다.

호환기에 꽂아 노트북에 연결하니 곧 큰 용량을 가진 두 개의 파일이 떴다. 해경은 그 중 하나를 실행했다.

[...에 나오는 장면 10개 연기해 보세요.]

[네? 10개요? 저... 몇 개도 괜찮을까요?]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세요.]

해경은 영상 구간을 빠르게 넘기다 자신이 원하는 부분이 나오자 키에서 손을 뗐다. 발갛게 달아오른 연선우의 얼굴이 나왔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앞선 참가자에게 했던 것과 같은 심사위원의 주문에 연선우가 당황하는 것은 찰나였고 이내 군말 없이 연기에 들어갈 것임을 알렸다. 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곧 드라마 ‘상실’에서 이태형이 했던 장면들을 연기해 나가기 시작했다.

해경이 드라마 ‘상실’을 주의 깊게 봤던 이유는 오랜만에 꽤 괜찮은 대본이라고 느꼈었기 때문이다. 대사 자체로만 보면 때때로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캐릭터와 서사의 힘이 강력했다. 그에 반해 주연의 연기는 썩 아쉬웠었다. 그러나 워낙 대본상으로 그려진 캐릭터가 좋아 이 역을 맡은 이태형은 어렵지 않게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시청률이 어느 정도 나오면서 신인인 이태형도 서서히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속사에서도 신나서 홍보 자료를 열심히 뿌려댔다. 모두가 기다려 온 신인이 등장한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은 그의 바로 다음 차기작에서부터 증명됐다. 이태형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러나 ‘운이 좋은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이라는 관습적인 표현이 애석하게도 이 바닥에선 딱 들어맞았다.

어찌 됐든 ‘상실’이 방영될 때쯤엔 그 언론 플레이가 통했고 이태형의 연기는 대체로 무난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연기에 대한 비평과 아쉬움은 우습게도 다른 이가 연기로서 보여주고 있었다. 고작 네다섯 명의 청중이 전부인 휑한 세미나실 안에서.

연선우는 오디션 때 ‘상실’에 나오는 10개의 장면을 인위적으로 순서를 섞어 연기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시간상의 흐름대로라거나 마구잡이식의 나열이 아니었다. 한 주인공의 장면들을 가지고 일종의 구성을 해 즉석에서 하나의 드라마가 되도록 연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드라마 속의 연선우는 어땠던가.

[지금껏 갖고 싶은 게 없었는데... 어느 날 뒤돌아보니 거기에 그게 있는 거야.]

날 때부터 모든 게 풍족해서 도리어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를 잃어버린 남자가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마치 지나가다 스치듯 본 물건을 말하듯이 담담하게 읊조리는 남자의 내면에는 사실 엄청난 동요가 몰아치고 있다. 낯섦, 어려움, 충격, 환희, 욕망, 갈증. 자신의 생애를 뒤흔들고 갈 모든 사건의 시발점은 그의 내부에 가만히 누군가가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그 하나를 잃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연선우의 연기 도입부는 사실 오디션 참가자라면 썩 선호하지 않을 법한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대체로 연기를 통해 무언가를 증명하고자 할 땐 희로애락이 확연한 부분을 선호한다. 그 편이 ‘보여주기’에 훨씬 쉽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선우는 도입부와 후반부를 그와 반대되는 성질의 장면들로 채워 넣었다. 그리고 평범함과 일상을 가장한 채 내면에는 폭풍을 심은 이의 삶을 그려냈다.

해경은 입에 담배를 문 채 명화를 감상하듯 영상 속의 연선우를 조용히 음미했다. 연선우는 자극적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는 붓을,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펜을 쥐고 휘두르고 싶게 만드는 대상이었다. 해경 역시 실로 오랜만에 낯선 충동에 휩싸였다. 연출을 하고 싶다는 감각. 이야기나 글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그런 감정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미 입봉도 전에 이 일이 한없이 권태로워져버린 해경에게는 더욱 더 생경할 수밖에 없는 감각이었다.

영상 속 연선우의 모습에 집중하던 해경의 미간이 문득 찌푸려졌다. 불현듯 들이닥친 묘한 기시감 때문에.

해경은 기억이 날듯 말듯 안개처럼 뿌연 머릿속을 세심하게 되짚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작은 단어 하나가 튀어나왔다.

“...핫팩.”

작게 중얼거린 해경은 오랫동안 묻혀 있던 과거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해경이 조연출을 하던 시기의 추운 겨울이었다. 안 그래도 추운 날씨에 무려 산 속에서의 촬영이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옷을 잔뜩 껴입거나 옷 사이사이에 핫팩을 붙이고도 몸을 바짝 움츠린 채 걸었다. 잠깐의 휴식이 주어질 때마다 작은 휴대용 온열기기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해경은 현장 점검 차 낙엽들이 떨어져 바스락거리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이거 쓰세요.”

갑자기 옆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온화했다. 해경이 고개를 돌리니 단정하게 잘 생긴 20대 청년이 핫팩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현장에서 대기하는 배우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핫팩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는 연기자가 아닙니다.”

부드러운 거절 탓인지 아니면 연기자가 아니라는 말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청년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경을 바라봤다. 그러던 그가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기자만 추운 건 아니잖아요.”

“......”

청년은 작게 항의하듯이 말했다. 그것이 본인이 아닌 오늘 처음 만난 타인의 추위 때문이라는 게 왠지 묘하다고 해경은 생각했다.

“손이 빨개요.”

해경이 계속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자 남자가 해경의 손을 눈짓으로 슬쩍 가리켰다. 날카로운 한기에 고스란히 노출된 그의 손은 빨갛게 굳어 있었다. 그 순간 해경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신이 계속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반복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남자는 자신의 무덤덤한 얼굴보다 작은 손짓을 더 눈여겨 봤는지도 모른다.

“잘 쓰겠습니다.”

해경이 결국 핫팩을 받아들자 그는 만족스럽게 가만히 웃고는 돌아섰다. 단역배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촬영지 한 구석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해경 역시 몸을 돌렸다. 한쪽 손에 쥐어진 핫팩은 매우 뜨거웠다. 어색한 온기였다.

몇 시간 후 해경은 우연히 다시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역시 분명 다른 핫팩을 가지고 있었으나 효능이 다했는지 그는 열기가 남아있지 않은 손바닥만한 덩어리를 안쓰러울 만큼 연신 주무르고 있었다. 아마도 뒤늦게 뜯은 새 것에 가까운 핫팩을 해경에게 건넨 듯 했다.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단역배우는 각자의 팀과 차량이 있는 주조연 배우나, 서로가 좋든 싫든 어쨌건 한 식구인 스태프들과는 또 달랐다. 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개인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때에 따라 각자의 고난을 스스로 해결하거나 견디기 위해 적절한 이기심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와 거리가 멀어 보였고 해경은 그것이 순간 거슬렸다.

해경은 스태프들이 타고 온 버스를 찾아 그 안을 누비고 다녔다. 간신히 남아있는 새 핫팩을 찾아낸 해경은 단역 배우들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거 써요.”

갑자기 불쑥 나타난 해경이 새 핫팩을 꺼내 들자 선우가 잠시 놀라 그를 쳐다보다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사양하지 않고 반갑게 그것을 받아 든 선우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별 거 아닌 것에 충만한 기쁨과 고마움을 표하는 그의 모습에 해경은 어색함과 신기함을 느꼈다.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저 누군가 추워 보인다는 까닭으로 그 주변을 서성였을 때부터.

해경은 대답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자신의 등으로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닮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재생되는 화면 속의 연선우와 과거의 연선우가 겹쳐졌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자리는 많이 달라져 있지 않았다. 단역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조연도 몇 번 했던 것 같지만 결국 마지막에 만났을 때 그의 배역은 시장통의 행인1 정도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신호가 아니었다. 연선우가 아직 지치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니까.

해경은 휴대폰을 들어 전화번호부를 뒤적였다. 이름을 찾았지만 1년에 한두 번 연락할까 말까한 번호는 저장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듯 했다. 해경은 혀를 찼다. 이래서야 PD라고 할 수도 없겠군.

그는 그동안 안일했던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며 짧은 반성을 거쳐야 했다. 다행히 몇 달 전에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내역이 있어 얼추 시간을 계산해 거슬러 올라가니 찾는 이의 번호가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길게 이어질 필요 없이 상대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선배, 접니다. 혹시 몇 달 전에 말씀하셨던 내용 아직 유효합니까?”

해경은 눈앞의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 죄송합니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모니터에선 여전히 연선우의 오디션 장면이 돌아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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