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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컷-3화 (3/49)

러프 컷   3편

<--  -->  유강호의 뜀박질을 선두로 촬영이 시작됐다. 복잡한 시장 안에서 주인공이 급박하게 도망치는 씬이다 보니 밀치고 밀리는 액션들이 동반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미리 맞춰 둔 합과 타이밍이 중요했다.

“꺄악!”

실제인지 연기인지 헷갈리는 단역배우의 짤막한 외침이 들리고 선우에게 점점 가까워지며 달려오는 유강호의 모습이 보였다. 선우는 자연스럽게 당황하는 행인의 모습을 연기하면서 다급히 주춤 물러섰다.

퍽-!

“윽.”

미리 약속된 것에 따르면 선우는 방금 연기한 것처럼 갑자기 달려드는 무리에 뒷걸음질 치며 살짝 빗겨서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유강호가 불현듯 팔을 크게 휘두르며 힘 조절 없이 선우를 밀치고선 달려 나갔고 선우는 시장 천막을 지탱하던 철골 구조물에 세게 부딪쳤다.

순간적으로 강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선우는 혹여 자신 때문에 NG가 날까봐 이를 악문 채,  인상을 찡그리는 대신 당황하고 놀라는 표정을 애써 지어보였다.

“컷!”

크고 묵직한 울림으로 컷 사인을 외친 남자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유강호씨. 동선 체크는 괜히 하는 게 아닙니다. 왜 맞춰둔 합대로 안 합니까.”

해경의 기세에 유강호는 슬쩍 눈치를 보면서도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게 나름대로 긴박감 넘치는 연기를 하려다 보니까...”

“사고가 안 나게 액션씬을 찍는 것도 연기의 중요한 일부분입니다.”

“뭐 지금도 딱히 사고는 안 난 것 같은데...”

유강호는 혼잣말 하듯 툴툴거리면서도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알고 있는 듯이 선우쪽을 힐긋 보고는 금세 모른 척 했다. 자신이 밀치고도 도리어 선우를 향해 영 못마땅한 눈빛을 쏘아대는 유강호를 보곤 선우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피했다. 선우는 진작에 눈치껏 등 뒤로 다친 손을 감추고 있었다. 욱씬거리는 등이야 어차피 안 보이니 그렇다 쳐도 군데군데 긁힌 상처가 난 손등은 어느새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별다른 반성의 기미가 없는 유강호를 냉랭한 시선으로 주시하던 해경은 혀를 찼다.

“20분 정도 쉰 후에 다시 들어가죠.”

스텝들이 다시 소품과 장비 등을 재정열하는 동안 유강호가 어슬렁거리며 선우에게 다가갔다.

“알아서 눈치껏 피하든가 뭘 그렇게 발라당 넘어져요? 억울하게 나만 깨졌네.”

“...죄송합니다.”

일의 시시비비라든가 자신의 억울함 같은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선우는 순순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유강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한 번 더 쏘아보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선우는 여전히 사람들의 시야에 안 보이게 손을 가린 채 천천히 손목을 움직여봤다.

“다쳤습니까.”

머리 위에서 불쑥 나타난 남자의 음성에 고개를 들자 서해경이 서 있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 말에 남자가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입니까.”

“네.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그럼.”

더 이상 묻지 않고 선우를 지나쳐가는 듯 하던 남자가 갑자기 선우의 팔꿈치를 잡아들었다. 선우가 놀라 그를 보자 해경은 싸늘한 표정으로 선우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선우씨.”

“...네.”

선우는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놀랐지만 그 동요를 애써 꾹 눌러 담았다.

“주연하고 싶어서 오디션 본 거 아닙니까.”

선우가 고개를 들자 한없이 어둡기만 한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앞으로 주연하려면 몸 사려야죠.”

비웃음이 아니었다. 남자의 무뚝뚝한 음성은 진심이었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지긋이 물었다. 그 앞에서야 불쑥 고개를 들려는 억울한 마음이 왠지 당황스러웠다.

“당신 잘못으로 다쳤다는 게 아닙니다. 유강호, 그 새끼 때문이죠.”

PD면서 태연히 주인공을 질 낮게 부르는 그 소리에 선우가 놀란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유강호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왜 내 앞에서까지 숨깁니까. 자신을 돌볼 기회가 왔을 땐 돌봐야죠. 단역배우로 끝나고 싶은 거 아니잖습니까.”

얼핏 차갑고 딱딱하게 들리는 남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이상하게도 그리 나쁘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반가웠다. 그 말들은 남자가 자신의 목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음에 던질 수 있는 말이었기에. 다만... 선우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이게 제가 배운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랫동안 단역과 조연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의 그것들이, 그 끝에 제가 배운 정답입니다.”

해경은 선우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 나직이 내뱉었다.

“그럼 이제 바꾸죠.”

“네?”

“난 그 답 맘에 안 들어요. 그러니 바꿔야겠습니다.”

해경은 선우의 손을 힐긋 보곤 돌아섰다.

“따라와요.”

남자의 등이 주저 없이 멀어지는 걸 바라보다 선우 역시 뒤늦은 걸음을 뗐다.

해경이 향한 곳은 스텝용 차량으로 보이는 승합차가 서있는 곳이었다. 그는 차 안을 뒤지더니 휴대용 구급함으로 보이는 상자를 꺼내 부스럭거리며 몇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이리와 여기 앉아요.”

해경은 물건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차 안을 대충 치운 뒤 간신히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정작 PD는 세워둔 채 단역배우인 저만 앉아 대접 아닌 대접을 받아도 될까 잠시 고민했지만 방금 전 그가 한 말들이 생각나 선우는 가만히 다가가 앉았다.

“병원에 가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선우는 그의 말을 다급히 끊으며 심하게 다치지 않았음을 열심히 피력했다.

“흠, 그래요. 일단 가벼운 처치라도 해두죠.”

해경의 큰 손이 가볍게 선우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포장지를 뜯은 알콜 스왑으로 손등 부근을 닦자 갑자기 그 위로만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처럼 공기가 서늘해졌다. 그것은 자신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남자의 체온과 상반돼 어쩐지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손이 예쁘네요.”

“아...”

선우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얼빠진 소리만 내었다. 해경의 길고 반듯한 손가락이 연고를 묻혀 선우의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가만히 가만히. 남자는 의외로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놀렸다. 선우는 갑자기 침을 삼키는 시기와 자신의 얼굴빛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옅은 스킨 냄새와 시야 위로 일렁이는 머리칼 또한 새삼스레 뚜렷하게 의식됐다.

“제가 해도 되는데...”

남자의 손가락이 생각보다 더 오래 자신의 손등에 머무르자 선우는 조금 움찔하며 말했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런 말 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지 않습니까.”

해경은 이제 다 됐다는 듯이 선우의 손을 내려놓고 티슈를 뽑아 자신의 손가락에 남은 연고를 닦아냈다.

“생각보다... 다정하시네요.”

선우의 말에 남자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살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편이죠.”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 그의 모습은 꽤나 다정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선우는 잠시 남자를 바라보다 시간을 상기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혹시 시간이 지나서 몸이 아프거나 하면 말해요. 숨기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선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연선우씨."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돌아서는 선우를 향해 남자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선우는 의아한 시선으로 뒤를 돌아봤다.

"알고 지내는 캐스팅 디렉터 없습니까."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선우는 순간 의문이 들었으나 이내 차분히 대답했다.

"박진석 디렉터라고 한 분 있기는 했는데 휴대폰이 바뀌었는지 연락이 안 된지는 조금 됐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정확히는 안다고도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선우는 그저 있었던 사실을 담담히 보고했고 해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외에는 없습니까?"

"...네. 주기적으로 메일을 돌리고는 있지만 열람조차 안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어서요."

디렉터와 연이 닿는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 요즘은 프로필 대행업체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월 몇십만원을 투자한다는 건 선우의 처지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해경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연선우씨만 괜찮다면 내가 아는 캐스팅 디렉터와 연결해줄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선우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채 입 안에서 무어라 말이 맴돌기만 하던 선우의 입이 어렵게 열렸다.

"...감사합니다."

해경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단역으로 그치기엔 아까운 실력이긴 합니다."

남자의 말은 선우로선 예상치 못한 의외의 칭찬이기도 했다. 거듭 놀란 선우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와 마주했다.

"연선우씨."

남자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직하게 시선을 부딪쳐오는 선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해경이 입을 열었다.

"이 바닥이 재능과 성실함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실을 상기시키는 그의 말에 선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남자가 도중에 말을 끊자 선우는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표정은 진중하면서도 무언가를 확신하듯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당신이 조금 더 버틸 수 있다면, 아마 곧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남자는 선우에게 시선을 맞추며 다시 한 번 강조하듯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 꿈, 포기하지 말아요."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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