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2화 (2/49)

러프 컷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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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는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꺼놓은 휴대폰의 전원을 다시 켰다.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자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역시 익숙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혹시 시간 괜찮아? 아, 나 지금 오디션 보러 왔는데 발목을 좀 다쳐서 혹시 데리러 와줄 수 있나 하고. 아냐, 많이 다친 건 아닌데 잘 못 걷겠어서... 어, 여기 역삼동 JS 빌딩. 응, 고마워. 천천히 와, 서두르지 말고. 응, 알겠어.”

선우가 전화를 끊는 순간 다시 문이 열리고 스텝이 다음 대기자의 이름을 불렀다. 잠깐 열린 문 사이로 다시 그의 모습이 반쯤 비쳤다. 그는 눈썹을 약간 찌푸린 채 서류 위에 무언가를 연신 적고 있었다.

선우보다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오디션 참가자가 세미나실 안으로 들어섰고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문 밖에 있는 선우에게로 다시 향할 일은 없었다. 문이 닫히고 남자의 모습 또한 사라졌다.

“보답하기로 했는데...”

멍하니 중얼거리다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무조건 오디션 장소에 제때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의 연락처는 모르고 당연히 이제는 안다고 해도 함부로 연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자가 방송국 쪽 사람인지 제작사 쪽 사람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선우는 절뚝이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오디션을 못 봐서 죽상인 거냐, 아파서 죽상인 거냐.”

거침없는 경훈의 말에 창밖을 바라보던 선우가 바람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기는.”

이러나저러나 결국 돌아오는 건 타박이지만 그게 다 자신을 챙기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디션에선 뭐했어.”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장면 연기해보는 거였어.”

“그게 다야?”

“대신 장면 10개.”

“미친놈들.”

경훈이 혀를 차며 욕을 내뱉자 선우가 가만히 웃었다.

“다행히 다 다른 작품이어야 하는 건 아니고 한 작품이어도 상관없었어.”

“그래도 어떤 미친놈이 남의 작품을 줄줄이 다 외우고 다니냐.”

“......”

“했냐?”

“...해야지.”

“미친 놈.”

이번엔 선우에게로 친근한 욕설이 꽂혔다.

“내가 장담하는데 그거 못 해서 오디션 떨어진 놈들 수두룩할 거다.”

“글쎄...”

자신처럼 간절한 사람들이라면 다 하지 않았을까. 선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뭐 했는데.”

친구의 물음에 선우는 오디션 당시를 떠올리며 작품 이름을 말했다.

“상실.”

“...미친놈. 넌 자존심도 없냐.”

선우의 입에서 나온 작품은 공교롭게도 저를 버린 연인이 주인공을 맡았던 작품이었다.

“그게 자존심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 새끼 아니었음 네 작품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왜 내 작품이 돼. 태형이가 잘하니까 붙은 거고 만약이라는 가정만큼 소용없는 것도 없어.”

“난 그 날 너 사고난 거 아직도 의심스러워.”

“경훈아.”

“씨발, 그렇잖아. 그때 너 친 운전자가 하필 태형이 오래도록 짝사랑하던 새끼라는 게 말이 되냐고. 그리고 태형이 그 새낀 네가 과제로 낸 희곡으로 오디션 봤다며.”

“......”

그 사실은 태형이 아닌 그 날 오디션에 참가했던 또 다른 지인을 통해 전해 들었다. 교수에게서 대사와 인물 표현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 희곡은 태형이 원하기에 한 부 복사해주었었다. 당시 두 사람은 사귀고 있었고 그걸 공유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태형이 드라마 오디션에서 그 희곡의 하이라이트 장면들을 가져다 쓸 줄은 몰랐다.

‘선우야, 나 오디션 붙었어!’

태형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껴안았을 때 선우는 약간의 죄책감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꼈다. 당시 여러 가지로 머릿속이 복잡하고 우울했던 선우는 자신이 백퍼센트의 진심을 다해 축하해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꼈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태형을 보며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잘 됐다. 정말 축하해.’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를 마주 안는 것은 결국 당연한 수순이었다. 연기만큼이나 그를 사랑했으므로.

“사고 연결시켜 생각하는 건 너무 멀리 갔어. 드라마 배우 뽑는 오디션이니 희곡보단 배우랑 연기가 중요했을 테고.”

“마지막까지 너 뒤통수 친 새끼인데 감싸고 싶냐.”

“감싸는 게 아니라 내가 안 된 걸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

선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실패는 전부 제 탓이어야 한다. 누구에게라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노력했다. 그래도 잘 되지 않았다. 그 때마다 제 노력이 부족한 결과라고 곱씹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 누군가의 탓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더 절망적인가. 자신은 죽을힘을 다했는데, 정작 누군가의 탓으로 자신이 무너져야 한다는 사실은.

“그 다리로 오디션은 어떻게 갔어.”

“...지나가던 남자가 도와줬어.”

“웬일이냐. 오디션 때마다 재수 없던 그 패턴은 똑같은데 이번엔 그나마 좀 변수가 있네. 이거 이번에는 좀 기대해도 되겠는데?”

낙천적이라면 낙천적인 제 친구의 말에 선우는 오디션 상황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근데 그 남자가 심사위원이더라.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 남자가 오디션 중에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지적을 던졌다는 사실도.

‘전부 드라마 〈상실〉에서 남자 주인공이 했던 장면이네요. 이태형 팬이라도 됩니까?’

연기하는 내내 자신을 진지하게 지켜보는 것 같던 사내는 정작 연기가 끝나자 신랄한 말투를 숨기지 않았다. 자신에게 등을 내밀던 그 사내는 더 이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까 왜 그렇게 쏘아붙였어?”

“언제 말입니까.”

“서PD가 친히 업고 온 그 남자.”

남자의 말에 담배를 물던 해경이 피식하고 웃었다.

“내 평생 오디션 보면서 그런 광경은 또 처음이야. 거기다 자네가 그 장면의 주인공이라는 게.”

방송국에서 냉혈한으로 소문난 서해경이었다. 물론 방송국에는 여러 미친놈들과 종종의 쓰레기들과 소수의 무난한 사람들, 극소수의 좋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남자의 캐릭터는 유독 돋보였다. 물론 튀는 외모도 한 몫 하긴 했지만 그보단 싸가지 없고 제멋대로인 놈이 아직 장편으로 정식 입봉도 못한 PD라는 게 문제였다. 쟤는 뭘 믿고 저렇게 까불까. 그게 JBS의 공공연한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애지중지 업고 올 땐 언제고 아주 잡아먹을 듯이 쏘아 붙이더만.”

“제가 언제 애지중지했습니까.”

문득 제 등을 덥히던 낯선 체온과 분주하게 내달리던 심장의 울림이 떠올랐지만 희미한 담배 연기 속에 묻어버렸다.

“왜, 그 친구 연기 잘하더만. 마스크도 좋고 분위기도 꽤 묘한 게. 음, 그래. 그 사람이 제일 나았어. 아니 나은 정도가 아니라 훌륭하지, 그 정도면.”

“......”

“왜 반응이 없어? 그 동안 나랑 보는 눈은 비슷했잖아. 그 남자가 맘에 안 드는 이유라도 있어? 뭐 알고 보니 원수라든가.”

그의 시답잖은 농담에 가볍게 웃은 후 해경은 입을 열었다.

“맘에 안 드는 게 아닙니다. 준비성, 노력, 열정, 거기다 최근 보기 드물게 실력까지 있더군요.”

“그래, 내 말이 그거라니까.”

“그래서 문젭니다.”

“뭔 소리냐, 그게.”

“모든 게 완벽한데 오랜 무명 생활을 했더군요. 이번이 첫 주연작이라면 보나마나 자기 전부를 걸고 뛰어들겠죠.”

해경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짧게 머물렀다 사라졌다.

“이 작품에 그런 사람은 안 됩니다.”

“흠...”

듣고 있던 남자는 뭔가를 짐작하듯 옅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저번에 네가 얘기했던 그거, 맞는 거냐?”

“확실한 건 아닙니다.”

“뭐, 확실한 건 아니래도 좀 그렇긴 하네. 그 친구 참 순해 보이던데... 잘못 엮이면 곤란해질 수도 있고.”

해경은 낮에 길가 한 복판에서 만난 남자를 떠올렸다. 가늘게 떨며 다친 발목을 간신히 지탱한 채 숨을 몰아쉬던 남자의 눈빛은 절실했다. 그와 상반되게 냉담한 해경의 시선이 어느새 어두워진 도시의 밤하늘에 꽂혔다. 그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빈 바람만이 의미 없이 불어댈 뿐이었다.

「오디션에 지원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다음에 다시 좋은 인연이 닿기를 바랍니다.」

선우는 말없이 몇 번이고 문자를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오디션은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오디션이 끝난 직후부터는 기대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롭고 씁쓸했다. 이 고통에는 면역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선우 학생, 슬슬 일어나자구.”

“네.”

분진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선우가 몸을 일으켰다. 발목이 거의 다 나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틈 날 때마다 돈이라도 벌어둬야 했다. 아주 작은 기회라도 왔을 때 저의 빈한함 때문에 그것을 허투루 놓치는 일이 없도록.

* * *

“저 사람 주연 오디션 봤던 그 남자 아냐?”

“어어, 맞는 거 같은데?”

“맞지? 그 날 등장이 워낙 강렬해서.”

“근데 저쪽은 단역배우들 아냐? 주인공 오디션 봤던 작품 단역으로 들어가는 건 좀 쪽팔리지 않나?”

“그러게. 나 같으면 못할 것 같은데.”

그들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진 않았지만 선우의 귀에 안 들릴 만큼 작지도 않았다. 선우는 다른 단역 배우들처럼 평연하게 지루한 기다림을 이어가다 괜스레 뒷목을 한번 쓸어내렸다. 오디션 당시 진행을 돕던 몇몇 스텝들이 촬영현장에 나와 있었다. 그날 남자에게 업혀 나타난 자신이 꽤 인상적이었었나 보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기억하는 거 보면.

사실 단역배우 모집 공고를 찾던 선우 역시 처음 이 작품의 이름이 눈에 띄었을 때 조금 주저했었다. 단역배우로 시작한 선우는 점차 대사가 있는 조연 역할을 맡다 오디션 직전의 작품에서는 꽤 인상적인 연기와 캐릭터로 작긴 하지만 몇 개의 호평 기사까지 났었다. 다만 시청률이 너무 낮은 작품이었던 까닭에 아는 사람만 아는, 작은 해프닝 같은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무명과 신인을 포함해 제한 없이 주인공을 뽑겠다는 이 작품의 오디션 소식에 오랜만에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물론 아무 준비 없이 기대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익숙한 탈락이었다. 그 후에 같은 작품의 단역배우 모집 공고를 봤을 때는 제자리로 돌아온 것보다 조금 더 뒤쳐진 느낌이었다. 그 마음은 곧 자괴감으로 이어졌으나 그 또한 사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우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그랬기에 단역배우로 지원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촬영 준비에 돌입하자 잡담을 하던 스텝들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 자신의 역할들을 점검했다. 지금 찍을 장면은 시장 거리를 배경으로 누명을 쓴 남자 주인공이 경찰들에게서 달아나는 장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디션을 거쳐 주연을 맡은 남자배우가 등장했다.

“아, 존나 춥네.”

남자는 주위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짜증어린 표정으로 내뱉었다. 선우가 잠시 그를 힐긋 보았다가 시선을 내렸다. 유강호. 남자는 이전에 두어번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선우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까닭은 그가 유명하다거나 화면 속의 그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선우가 거의 모든 드라마를 모니터링하고 있었기에 알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동선 체크 한 번 하죠.”

그 때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선우의 고개가 들렸다. 주연 배우보다 더 배우 같은 수려한 미남은 선우와 짧은 인연이 있었던 남자였다. 오디션 날 자신을 업어주었고 그 후 바로 심사위원석에 앉았던 남자.

‘PD였구나.’

다른 스텝들과는 확연히 다른 압도적인 분위기로 촬영의 전반적인 상황들을 지시하는 그가 바로 이 작품의 PD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까 스텝이 들고 있던 대본 겉면에 적혀 있던 PD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마...‘서해경’이었던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바라보던 선우와 현장을 둘러보던 남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선우만큼이나 그의 시선 역시 몇 초간 확실한 방향을 갖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그런 적 없었던 사람처럼 남자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멀어졌다.

========== 작품 후기 ==========

첫 화 올려놓고 너무 긴장해서 방안을 한 수십 바퀴는 돈 것 같아요. 흐흐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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