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집에 가서 간단한 짐을 꾸려 온 나는, 어이없는 상황에 입을 딱 벌렸다.
“지금 이게 뭐하는 거예요?”
“제비뽑기. 학교 다닐 때 제비뽑기도 안 해 봤냐?”
“그러니까 왜 제비뽑기를 해야 하냐고요. 그냥 국도해 씨랑 지용재 씨. 그리고 나머지 다섯 명이 차를 타면 되잖아요!”
“형님은 승용차에는 4명 이상 타는 거, 용납을 못 하셔. 차라리 차를 한 대 더 사라고 하실걸.”
“그럼 사든지!”
“한 명만 저 차로 넘어가면 되는데 미쳤다고 차를 한 대 더 사냐!”
국도해의 망할 결벽증과 편집증이 또 이런 곳에서 발휘되고 있었다. 두 대의 벤츠에 과연 사람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가지고 제비뽑기가 준비된 상태였다.
“그럼 뽑겠습니다.”
모두 긴장한 얼굴을 하고 찰칵찰칵 흔들리는 제비통을 노려보았다. 아예 처음부터 국도해의 운전병으로 차출이 된 지용재 씨와, 다른 쪽 차의 운전을 맡고 있는 관표 형님을 제외한 네 명이 일제히 손을 뻗어 제비용지를 낚아채었다.
“아싸! 나는 아니다!”
“나도 아닌데!”
“나도 아닌데, 그러면…….”
모두의 눈이 제비뽑기 종이를 펼쳐 든 채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나에게 쏠렸다.
“……또, 너냐.”
“운도 지지리 없는 놈.”
“니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질 놈이다카이.”
“살아서 만나요.”
내 손을 꼬옥 잡고 울먹거리는 박건우의 손을 뿌리치면서, 버럭 소리질렀다.
“왜 또 나야! 당신들 짰지! 짰지! 이런 게 어디 있냐고요!”
“하모, 참말로 이상하데이. 니는 우짜 골랐다 하면 도해 행님하고 짝지냐.”
“내가 알아요!”
저주받은 게 분명하다. 이건 저주야, 저주라고!
“고생 좀 하시겠어요.”
관표 형님마저 어깨를 두드리면서, 한마디 건넸다.
“으아악, 미치겠다. 몰라 몰라.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잠만 잘 거야. 지용재 씨 운전 잘한다고 했죠? 나 잘 테니까 너무 험하게만 몰지 마세요.”
“푸하하하하핫.”
“크하하하하하.”
“으하하하, 미치겠다. 정말.”
모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아니, 내가 무슨 틀린 말 했어요? 왜들 그렇게 웃어요? 기분 나쁘게.”
“야, 너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조수석에 앉을 것 같으면, 제비뽑기는 왜 하냐?”
“뭐? 무슨 말이야? 그게?”
들고 있던 가방끈을 초조하게 꼬옥 쥔 채, 되물었다.
“도해 형님 왈.”
“뒷좌석보다 앞좌석에 사람이 많은 것은 균형이 안 맞아서 참을 수가 없거든.”
뒤에서 누군가 흉내낼 필요도 없이 실제 목소리로 그 이유가 생방송되었다.
“준비 다 됐으면 가자.”
모두 즐거운 얼굴로 대답을 하고 차에 올라탔다. 나는 입을 벌리고 서서 내가 타야 할 검은색 벤츠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뭐해, 안 타고.”
차문을 열어 주던 지용재가 나를 보고 재촉했다.
“나……, 꼭 가야 하나요?”
국도해를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으로 물어봤다. 자아, 내 눈을 봐라.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좋아하고 있으니까 내 간청은 절대 거절 못해!
“타.”
……깔끔한 거절.
“타기 싫으면 트렁크에 싣고 가든지 하지.”
“아, 아니요. 타겠습니다.”
국도해라면 능히 나를 트렁크에 넣고 달리고도 남는다. 잽싸게 뒷좌석에 올라타자, 국도해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운전석에 탄 지용재 씨가 갑니다, 라는 말과 함께 차에 시동을 걸어 출발시켰다. 조금 후에 지잉하는 소리가 나면서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를 구분하는 유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라? 이거 뭐예요? 저거 왜 올라가요?”
“형님이 주문하신 기다. 방음 완벽하니까, 괜히 행님 속 긁어서 총 맞지 말고 잘 가라카이!”
지용재 씨의 목소리가 멀어지면서, 유리문이 꽉 닫혀 버렸다. 앞뒤로 모두 검은색으로 선팅까지 되어 있는 유리를 보며 이제 아예 밀폐된 공간에 이 인간과 둘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안절부절못하는 나와는 달리 국도해는 느긋한 얼굴로 시트에 머리를 묻고, 깨끗하게 다림질된 신문을 펼쳤다.
“으하하하, 그런데 얼마나 걸릴까요?”
목적지도 모른 채, 차에 태워진 불쌍한 내가 물었다.
“글쎄.”
성의 없이 대답하며 그가 읽고 있던 신문을 한 장 넘겼다.
나와는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지 눈길도 주지 않고 신문만 읽고 있는 국도해라니. 뭔가 울컥한데, 이거?
“저기요. 그런데 갑자기 웬 피서입니까? 실은 피서가 아니고 어디 도망가는 거 아닌가요? 혹시 서울에서 사고치고 내려왔어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들인데.”
“대답해 주시면 안 되나요?”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내 눈은 크고 예쁜 편이다. 누구처럼 짝쌍꺼풀도 아니고 두 눈 다 쌍꺼풀이 자리잡고 있어, 짙은 호소력을 지닌 호수 같은 눈인 것이다. 이런 내가 두 눈을 깜빡거리면서 부탁을 하고 있는데, 거절하면 넌 인간도…….
“트렁크에 타고 싶은가 보군.”
“…….”
……그래, 넌 인간이 아니었다.
입을 삐죽거리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까맣게 선팅되어 있는 창을 통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심해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거리고 있는 나와 달리, 국도해는 평온한 얼굴로 신문을 읽었다.
차 안 가득한 침묵에 질식당할 것 같아, 나는 다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역시 차가 좋아서 그런지 차체가 흔들리지 않네요. 아니면 지용재 씨 운전 솜씨가 좋아서 그런가? 저 가끔 멀미하거든요. 토하기도 하고, 막 그러는데.”
국도해의 눈동자가 멈칫했다.
내 말 중 어떤 단어가 그의 흥미를 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낚시질 성공.
“멀미 안 하시죠? 없을 것 같아요. 멀미하는 건 반고리관이 약해서 그런 거라던데. 반고리관이 몸의 평형 감각을 유지하는 기능을 맡고 있거든요.”
“토할 것 같으면 말해.”
신경써 주는 건가?
“던져 버릴 테니까.”
망설임 없이 국도해가 나를 차 밖으로 던져 버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평소에는 다들 국도해에게 절대 충성 모드이면서, 어째서 이 차를 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갈 길은 멀지만, 대화는 없고 창밖을 바라볼 수도 없다. 한마디로 감옥 모드.
“그럼 전 잘게요. 도착하면 깨워 주세요.”
푹신한 시트에 고개를 묻으며, 중얼거리듯 말을 건넸다. 물론 상대방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본인이 아무리 자각하지 못한다고 해도, 나를 좋아하면서 저렇게 뻣뻣하게 굴어도 되는 건가? 환심을 살 생각이 전혀 없는 거야? 정말 연애 못 해 본 거 티내는구만.
눈을 감고 있으니 어젯밤에 이루지 못했던 잠들이 스르륵 몰려왔다. 그래. 일단은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저 지긋지긋한 인간이 나에게서 관심을 끊게 만들 이 여행을 위해 체력을 비축해 두자!
그래도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우……웃.”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눈을 떠 보니, 바지가 무릎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물론 내 속옷과 함께.
“무, 무슨 짓……!”
무슨 짓이냐고 항변할 틈도 없이, 입안으로 혀가 파고들어왔다. 다리 사이를 움켜쥐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깜짝 놀라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차 안이라는 협소한 공간 때문에 도망갈 수도 없었다.
“으윽!”
능숙하게 움직이는 혀와 손의 이중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안 돼! 정신 차려. 이대로 가다간 되돌아올 수 없는 호모의 다리를 건너고 말아!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내 그곳을 주무르고 있는 국도해를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애당초 이 인간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겠지.
탐욕스럽고 관능적인 손놀림이 허리 아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 수치심도 없는 거시기 같으니! 남자 손에서 그렇게 기쁘다는 듯이 바들바들 떨면서, 무게를 더해 가지 말란 말이다!
“흐윽, 자, 잠깐만.”
입안에서 움직이던 혀가, 영역 표시를 하듯 몸의 이곳저곳을 훑었다.
“가만히 있어.”
목덜미에서 들려오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배아래 부근을 찌르르하게 만들었다.
젠장! 이 인간 자는 사이에 이상한 약이라도 먹인 거 아냐? 왜 내가 남자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느끼냐고!
“잠깐 손을…….”
요즘 통 스스로를 달래지 않았던 터라, 슬슬 한계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주먹을 쓰는 사람의 손이라고 믿기 힘든 깨끗하고 단정한 국도해의 손을 타고 흘렀다. 밀폐된 공간에 울리는 수치스러운 질척거리는 소리가, 온몸을 달리는 흥분을 가시게 하진 못했다. 아니 오히려, 조금씩 부추기는 듯했다.
선단을 훑어 내리던 손이 갑자기 내 것을 움켜쥐고 해소를 가로막았다. 허리 끝에 퍼지는 간절한 욕망이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놔, 놓으라고!”
“일방적인 흐름은 균형이 맞지 않으니까.”
“무, 무슨!”
국도해가 양복을 벗기 시작했다. 셔츠 아래에 단단하게 자리잡은 근육이 드러나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사람하고 있을 때는, 눈을 보라고 말했다.”
“그, 그…….”
그가 이번에는 바지를 벗어 내렸다.
“그리고 섹스를 할 때는, 그곳을 봐라.”
바지와 팬티가 한번에 내려가면서 비밀의 그곳이 드러났다.
“흐악!”
몸서리를 치며 일어서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숨을 할딱할딱 몰아쉬며 옆을 바라보니, 국도해는 세상모르게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잠이 든 채였다.
“꾸……꿈이었나.”
젠장, 꿈을 꿔도 어떻게 그 따위 꿈을 꿀 수가 있는 거지! 워낙 괴이한 사건들을 겪다 보니 내 정신세계도 피폐해진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에서 본 그것은, 맹세코 내가 지금까지 본 거시기 중 가장 크고 우람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의 그곳을 잘도 상상하는구나.
이마에 흥건히 흐르는 땀을 닦으려고 손을 들었다가, 내 몸 위에 있는 양복 재킷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산뜻한 고급 향이 그 재킷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해 주고 있었다. 자고 있는 건가 싶어, 그의 얼굴 앞에 대고 손을 두어 번 흔들어 보았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주름 하나 없는 셔츠와 언제나 단정하게 매고 있는 모노톤의 넥타이. 잠이 들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나와는 달리, 입술을 꾸욱 다물고 자는 모습조차 국도해다웠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옷을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재킷을 들었다가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고 말았다.
“크악!”
나의 다리 사이의 거시기가 자기주장이라도 하듯, 뚜렷한 형체로 발딱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꿈을 꾸고 지금 내가 느꼈다는 거냐!
“……뭐야.”
잠들어 있던 국도해가 내가 내지른 외마디 비명소리를 듣고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몸을 덮고 있던 재킷을 꼬옥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잘 자던데.”
“예, 하하하. 제가 원래 잘 때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그런 성장 과정을 겪어서,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시선을 창 쪽으로 돌렸다. 빨리 죽어라, 거시기야. 빨리 좀 죽어라! 지금 내 상태를 들킨다면,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빨리 죽어!
“다 잔 거면 돌려주지.”
“네?”
“그거.”
국도해가 자신의 양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하하. 이, 이거요? 아니, 저기 그러니까, 아 맞다! 저 더 잘 거거든요. 지금도 잠이 다 깬 게 아닙니다. 비몽사몽이에요. 잠결에 보니까 국도해 씨 훨씬 더 멋져 보이네, 하하.”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주둥이야!
“다 깬 것 같은데.”
“안 깼어요! 하나도 안 깼다고요. 졸려서 미치겠다니까요, 음하하하. 아이구, 졸려라.”
재빨리 눈을 감고, 시트에 고개를 푸욱 묻어 버렸다. 제발 속아 넘어가라, 국도해.
바들바들 떨면서 잠든 척하고 있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입술에 무언가 와 닿았다.
으아아, 젠장. 손가락이다, 손가락. 이 인간이 갑자기 왜 남의 입술을 주물럭거리고 난리야! 빨리 치우지 못해!
“눈 떠.”
“…….”
“안 자는 거 알아.”
손가락이 입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큭.”
젠장, 웃고 있나 보다. 저 희귀한 모습을 눈뜨고 구경해야 하는데, 자는 척해야 하는 지금이 원통할 따름이로다.
손이 떨어져 나가자, 더 큰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꿈은 이루어지고 말 것인가! 크아아악.
그때, 옆 유리를 누군가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해 형님, 휴게소입니다.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그래.”
국도해가 스윽 물러서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옆에 놓여 있던 신문으로 사정없이 내 얼굴을 내리쳤다.
“일어나, 휴게소다.”
“말로 해요, 말로! 말로 하면 누가 못 일어나나!”
“깊게 잠든 것 같아서.”
“…….”
간악한 인간.
이를 바드득 갈면서 양복 재킷을 그에게 던져 주었다. 그곳은 이미 신문지로 쳐 맞을 때부터 거짓말처럼 사그라져 있었다. 차 밖으로 나오자 어디선가 많이 본 휴게소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얼라라, 웬 보성 휴게소? 잠깐만, 세 시간은 달린 것 같은데 왜 보성밖에 안 왔어요?”
“뺑 돌아왔으니까 그런기다.”
지용재 씨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며,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행님 마시는 차. 뒤차가 아직 안 온 모양이라서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오일 좀 갈고 있을 테니까, 도해 행님 모시고 가서 먼저 자리 잡고 있은나.”
“으에에에엑!”
오만상을 찌푸렸다.
“……내가 살아오면서 말이다. 니처럼 대놓고 행님 앞에서 싫은 척하는 새끼는 처음 봤다 안카나.”
“티……나요?”
“억수로 난다.”
“…….”
“잔말 쌔비까지 말고, 가서 후딱 앉아 있어라.”
“알았어요.”
저 멀리서 담배를 피우는 국도해를 향해 걸어갔다. 휴게소에서 차를 멈추고 쉬러 온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려 있었다. 특유의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그 누구도 대놓고 쳐다보진 못해도, 본능적으로 그를 힐끔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목구비는 깊지만 동양적이고 수려한 외모와 모델처럼 긴 팔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밖에 없었다. 살짝 눈을 내리감고 담배 연기를 내뱉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한숨을 내쉬며 바라보는 여자도 여럿이었다.
“있잖아요!”
내가 소리쳐 부르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영화감독이 뛰어나와 ‘컷!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외쳐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뒤차 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래요.”
“그래.”
그가 비치파라솔에 꽂혀 있는 커다란 테이블로 앞으로 가서 나를 손짓하며 불렀다.
“아우, 덥다. 안 더워요? 양복을 그렇게 입고…….”
“닦아 놔.”
웃으면서 말을 건네던 내게 그가 던진 한마디.
“네?”
“닦아 놓으라고.”
그가 테이블과 의자를 번갈아 가리키며 명령했다.
“지, 지금 저보고 여길 닦으라고요? 테이블하고 의자를?”
테이블과 의자에는 사람들이 먹다 흘린 음식 잔해들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닦아 내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저 위에 나더러 앉으라는 건가?”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닦아.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그 가방 안에 티슈 있을 거다.”
차갑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저 인간 진짜 나 좋아하는 거 맞아? 아무래도 가설을 다시 설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44번이 아니라 58번으로. 나를 끔찍이 싫어해서 괴롭히기 위해 키스를 했다는 그 가설 말이다.
검은색 가방에서 물티슈와 티슈를 꺼내 의자를 닦으며 어쩌다 내 팔자가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찰했다. 답은 어려운 수학 문제처럼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막 다섯 번째 물티슈로 테이블을 닦을 무렵,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르 몰려들어 막 닦아 놓은 의자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행님요! 일로 오입시다. 여기 자리났심더.”
“아따, 이 자리 깨끗하고 좋다.”
“뭐 드실 낀지 다들 말 하이소.”
모두 검은색 양복에 잘 다듬어진 헤어스타일, 팔에는 얼룩덜룩한 그림까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요. 당신들의 정체는!
“여기, 자리 있는데요.”
“뭐라꼬?”
“이 존만한 새끼가 지금 뭐라 했노? 주둥이를 확 찢어뿔라!”
경상도 사투리라 지용재 씨와 비슷한 말투였지만, 수십 배는 거친 단어들이 난무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속해 있는 무리는 나름 말투가 정중한 편이었구나.
“너 지금 뭐라 했는지 다시 말해 보라!”
“여기 자리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화장실 쪽을 흘깃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국도해, 이 인간 왜 안 나타나는 거야! 빨리 와서 이것들 싸그리 내다 버리란 말이야!
“이기이기, 완전 대갈빡이 돌아 버렸나? 지금 니가 우리한테 시비질하는 기가?”
“아그야, 시방 뭐라 했다냐?”
덥석, 멱살을 잡혔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고 자리 닦아 놨는데 뺏기면 내가 죽…….”
“야, 형님 어디 갔냐?”
어느새 뒤로 다가온 김유수가 물었다.
“화장실. 저기 그러니까요, 이 자리는 제가 양보를…….”
대답을 해 준 후, 다시 비굴 모드로 돌아가서 변명을 늘어놓……, 잠깐!
“야! 꼬마! 너 어디 가!”
“화장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가는데 잡을 새도 없었다. 저 비겁한 자식!
“이기 완전히 간이 배 밖에 튀어나왔네. 니 시방 뒤지고 싶나? 여서 뼈마디마디를 오독오독 분질러 주까?”
“아니요, 잠깐만요. 잠깐만 계시면 저희 일행이…….”
“선생님, 나 우동 시켜 놓고 올게.”
“전 라면으로, 크악. 아니, 잠깐만. 박건우 씨! 잠깐만 기다려요!”
“라면 사 갖고 올게!”
화사하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며 달려가는 박건우를 보자니 뒷골이 땡겨 왔다.
“니 친구들은 하나같이 지대 병신들인 기가?”
“크크크크, 우짜 그런다냐?”
나를 둘러싸고 있던 무리들 속에서 와 하는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웃음당해도 좋다고, 절대로 비웃음당해야 한다고 동감했다.
저 쓸모라고는 개미 똥구멍만큼도 없는 인간들 같으니!
“차는.”
바로 옆에서 명확한 발음의 허스키 보이스가 들려왔다. 어느새 국도해가 내 옆에 앉아, 멱살을 잡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국도해 씨!”
우아! 이 인간이 이렇게 반가운 날이 올 줄이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차는.”
국도해가 다시 물었다.
“거기 가방에, 아니 그게 아니고. 이것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내 옷깃을 그러쥔 울퉁불퉁한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왜?”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하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아득하잖아!
“뭐가 왜예요! 지금 상황 안 보이세요? 여기 자리 맡으려다가……윽.”
내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대머리가 나를 던지듯 밀어내고 의자에 발을 터억 얹은 후 국도해를 노려보았다.
“여이, 형씨. 여가 거쪽 자리요?”
“다리 내려.”
그가 짧게 명령했다.
“크하하하하하, 이 잘생긴 형씨가 나를 지금 마구 웃겨 부리네. 지금 뭐라 했소?”
“발 치우라고.”
“못 치우겠다면? 잉?”
발을 다시 테이블에 터억 하고 올려놓으며 대머리가 으르렁거렸다.
“이래저래 손이 가는 녀석이군.”
그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왜 이러셔! 내가 시비를 건 게 아니라니까!
억울함을 항변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국도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정확히 자리에서 일어난 것까지는 확실히 알겠는데 그 다음에 무엇을 한 것인지는 보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대머리가 입과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터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 있는 국도해를 보고 나서야 주먹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으아, 썅! 저 새끼 죽여 버려! 가만히 두지 말아부려!”
흐르는 피 때문에 대머리가 어눌한 발음으로 외쳤다. 모두 흉흉한 얼굴을 하고 국도해를 감싼다. 이 인간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상대는 다섯 명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처리해.”
국도해가 손수건을 바닥에 던지면서 말했다.
“예, 도해 형님.”
“알겠습니다.”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옛써.”
내가 그렇게 애타게 부를 때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인간들이, 어느새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니, 다들 언제 온 거여!
“가자.”
국도해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으악, 잠깐만, 잠깐만요.”
의자 위에 있던 가방을 집어든 후, 그에게 그대로 질질 끌려갔다. 구석에 주차되어 있던 벤츠 앞으로 오자마자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뿌리쳤다.
“휴게소에서 시비 거는 게 취미인 줄은 몰랐는데.”
“내가 건 거 아니에요! 그쪽이 먼저 나한테……!”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내 혀를 감아올리는 그의 부드러운 혀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이런 부드러운 키스도 할 줄 아는 인간이었던가.
입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가고도 그는 한참을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봐.”
“…….”
“다른 놈한테 닿지 마라.”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기분이었다. 이보세요, 국도해 씨. 가, 갑자기 이렇게 로맨틱하게 나오면 반칙이잖아!
“가뜩이나 세균 가득한데, 다른 놈들 것까지 달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그래 나에게 가득한 세균을 당신은……, 뭐어?
“뭐, 뭐라고요? 세균이라니? 누구 말인가요?”
“너.”
그가 손가락으로 정확히 내 이마 정중앙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세균 수 늘리지 마. 참기 힘드니까.”
“아니, 잠깐만요! 이봐요! 이보세요. 누가 세균을 갖고 있다고! 으아악, 열 받아. 당신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으아, 말할 수도 없고 진짜! 내가 왜 세균덩어리야! 그러는 당신은! 차로 들어가지 말고 얘기하라니까요! 차문은 왜 또 잠갔어! 나 미쳐 돌아가시겠네, 빨리 열어요! 국도해 씨!”
잠긴 차문은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고 돌아온 운전수 님이 손수 열어 주기 전까지 열리지 않았다. 나는 20분간 땡볕 아래에 서 있었다. 그렇게 나는 멸균소독 당했다.
“와아, 진짜 좋다.”
“좋긴 뭐가 좋노. 다 풀떼기뿐인데.”
“저게 진짜 다 차밭인가? 장난 아니네.”
예약해 놓은 펜션에 도착한 순간 탄성을 날렸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차밭의 위세에 숨이 막혔다.
“경치 진짜 죽이네요. 빨리 짐 풀고 구경 가고 싶다. 아, 몇 층이에요? 저기였으면 좋겠다.”
펜션의 팔각형 지붕 모형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방 쓰시고 싶으면 쓰세요.”
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던 관표 형님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예? 저 방 예약하신 건가요? 신난다.”
“크하하하하하, 이 녀석 진짜 은근 웃긴단 말이야.”
성새민이 배를 잡고 깔깔거리면서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왜 웃어? 왜 웃는 거래?”
“웃기니까 웃지, 크크크. 빨리 들어와, 인마.”
꼬마 녀석도 짐을 바리바리 들고 웃어 젖혔다. 그 누구도 대답해 줄 만한 싸가지를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펜션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부부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열쇠는 여기 두고 갈 테니, 그러면 편히 쉬다 가세요.”
“예, 알겠습니다.”
뒤따라온 관표 형님이 열쇠를 건네받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에엥? 왜 열쇠를 주고 간대? 여기 손님 안 받아요?”
“손님? 받았잖아.”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데요?”
신발장 안이 텅텅 비어 있는 것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우리가 예약했으니까.”
가장 늦게 안으로 들어온 국도해가 간단한 대답으로 나의 어이를 날려 주었다.
“……여길 다?”
“그래.”
“일주일 내내?”
“그래.”
돈이 썩어 문드러지다 못해 녹차 밭에 퇴비로 뿌리려고 작정을 했냐!
“돈, 많으신가 봐요.”
씁쓸한 나의 비아냥거림을 눈치챘는지 국도해가 픽 하고 웃어 버렸다.
“많지. 누구한테 한 달에 과외비로 250만원을 지불할 만큼.”
“와아! 창문으로 녹차 밭이 한눈에 보이네!”
창가로 두다다다 달려가 내 생각에도 지나치게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딴청을 피웠다. 뒤에서 국도해의 기가 차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누가 데려오자 했나?”
“도해 형님이잖아요.”
“처음에는 실없는 녀석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보면 보통이 아니라니까. 완전 맛이 갔어, 맛이.”
상식 없는 것들. 어떻게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대놓고 뒷담을 깔 수 있냐. 아니, 이 경우에는 앞담이라고 해야 하나.
“도해 형님 어떤 방을 쓰실 건가요?”
“3층.”
역시 층으로 골라 버리는 저 대범하고 괴팍한 센스.
“그럼 내는 1층에 저 큰방 쓸란다.”
“전 용재 형님 옆방이요.”
“전 2층 쓸래요. 2층이 엄호 사격할 때 각이 제일 잘 나오거든요.”
“나도 2층. 난 높은 곳이 좋아.”
“전 큰 부엌이 있는 1층을 쓰도록 하지요. 한 선생님은?”
“저는 팔각형 모형 방이요!”
밖에서 보자마자 찍어 두었던 방을 외치며 생긋 웃었다. 영화에서 옥상 다락방 같은 다각형 모양의 방을 볼 때마다 은근한 동경을 갖고 있던 터였다.
“꼭, 그기 써야 하나?”
지용재가 잔뜩 인상을 쓰면서 물어 왔다. 갑자기 왜 저런대?
“예. 전 그 방이 마음에 드는데요.”
“다른 방 쓰지.”
“그래! 2층에도 좋은 방 많아! 한번 같이 올라가 보자고!”
다들 굳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뭔가 이 사람들이 곤혹스러워한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더욱더 굳건하게 팔각 방을 외쳤다.
“싫은데요. 전 그 방 아니면 안 잘래요. 다른 방에서 자라고 하면, 그냥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모두의 표정이 어둡게 변하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금치 못했다. 으하하하. 쌤통이다, 인간들아. 그러게 평소에 잘하지 그랬냐.
“괜찮겠습니까? 도해 형님.”
“상관없겠지.”
응? 뭐가 상관이 없다는 거야.
“어쩔 수 없군요. 자아, 다들 짐 풀지요.”
“너 이 갈지도 말고, 코도 골지 말고, 잠꼬대도 하지 마. 그게 살 길이다.”
김유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내 옆을 지나갔다.
“안 올라가?”
국도해가 계단 앞에 멈추어 서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올라간다.
그렇다. 나는 그 동사를 듣기 전까지 내가 택한 방의 층수를 전혀 계산하지 못했다.
“살아남으세요.”
함께 계단을 밟아 올라가던 박건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팔각형의 방. 그곳은 국도해의 지역인 3층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짐을 풀고 발코니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익숙한 담배 향이 느껴졌다. 옆 발코니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는 국도해와 눈이 마주쳤다.
“아하하, 안녕……하세요?”
뻘쭘하게 인사를 건네니 예상외로 그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쪽 방은 좋아요? 무슨 모양이에요?”
“사각형.”
“여긴 팔각형인데. 하하, 내가 이겼다.”
입 밖으로 내어 놓고도 쪽팔려 죽을 정도로 유치한 대사였다. 이기긴 뭘 이겨! 나의 손댈 수 없는 유치함에 기가 막혔는지 국도해는 발코니 안쪽으로 사라졌다.
무시당한 건가? 그래, 잘했어. 어차피 저 인간이 갖고 있는 호감을 박살내는 것이 이 여행의 목적이니까 잘된 일이지 뭐.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입맛이 씁쓸했다.
“특이한 모양이긴 하네.”
“헉.”
예고 없이 뒤에서 들려온 저음에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국도해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 좀 기척이라도 내고 다니세요.”
“냈는데, 네가 못 들었겠지.”
안 냈고 내가 못 들었다, 에 만 원 걸겠다.
“뭘 그렇게 투덜거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발코니로 나온 그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별것 아닌 동작조차 분위기 있어 뵈는 건 역시 얼굴 탓이겠지. 그가 옆으로 와서 서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어쩌겠어, 마음 넓은 내가 옆으로 가 줘야지.
“왜 여기에 왔냐고 했었던가.”
멀찌감치 옆으로 서자 어쩐 일인지 국도해가 먼저 말을 건넸다.
“네? 아아, 예.”
이제야 대답해 줄 마음이 생긴 건가.
“가야 하긴 하는데 두고서, 너무 먼 곳은 갈 수 없더군.”
무엇을 두고 간다는 거지. 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왜 그럴까.”
이 세상의 어떤 색소로도 낼 수 없을 것 같은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지며, 촉촉한 안개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로 또 한 번 물었다.
“이유가 뭐지.”
“그건…….”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형님! 큰일났습니다!”
흥분하면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지는 성새민이 홍옥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코 평수는 평소보다 두 배는 넓어진 채였다.
“무슨 일인데.”
뺨에 닿았던 손이 내려갔다. 어째서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거지.
“가방이……가방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활짝 열린 검은색 가방을 들이밀며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 안에는 투명한 작은 비닐에 형형한 색의 알약이 담겨 있었다. 국도해가 슬며시 눈가를 찌푸렸다.
“관표 형님 말로는 약인 거 같다는데요. 이 정도 양이면 보통 일이 아니잖습니까.”
“무슨 약이요?”
제발 소화제나 두통약이어라! 아니면 멀미약도 좋구나!
“K.”
대답은 국도해에게서 나왔다.
“그게 뭔데요?”
“필로폰.”
국도해가 짧게 대꾸했다.
“이게 요즘 유행이라서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젊은 애들 사이에서 이거 한 알에 수십만 원이 넘는다고 하던걸요.”
“그렇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떨려 벽을 짚고 간신히 서 있는 나와는 달리 국도해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까요? 주인을 찾아줄 수도 없고…….”
“적당히 손을 봤어야지.”
그제야 가방이 바뀐 상대가 휴게소의 그 남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거 그럼 그때 바뀐 건가요?”
“그때밖에 없으니 그렇겠지.”
우리가 차에서 내린 것은 보성 휴게소, 단 한 번뿐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요? 경찰서에 갖다 줘야 하나?”
“미쳤냐! 우리가 잡혀 가게! 게다가 지금……, 됐다. 아무튼 절대 일 크게 벌이면 안 된단 말이야!”
“버려.”
국도해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간단하게 결론 내렸다.
“네? 이걸 다? 어디에요?”
“국도 따라 조금만 가면 바다 나올걸.”
“그, 그래도.”
“필요도, 쓸모도 없는 물건은 옆에 두지 마라.”
“알겠습니다.”
이런 쪽에는 무지하지만, 저 정도 분량이라면 엄청난 돈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걸 망설이지 않고 버리라고 명하는 국도해의 모습에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의외로 정말 괜찮은 남자일지도.
“그 가방은 누가 들고 온 거지?”
“누구겠습니까. 이런 짓 할 인간이.”
성새민의 시선이 나에게 매섭게 꽂혔다.
“아하하하, 가방이 비슷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
“뭐, 그럴 수도 있지.”
완벽주의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실수를 한 당사자인 나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성새민마저 입을 떡 벌리고 놀랐다.
……진짜, 당신 나에게 단단히 빠졌구나. 치명적인 나의 매력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런데 바뀐 물건은.”
“네?”
“우리 쪽 가방에 들어 있던 물건 말이다.”
그가 재떨이를 찾아 재를 털어내면서 물었다.
“그게……저기……. 그러니까…….”
성새민이 우물거리면서 말끝을 흐리자 국도해의 얼굴에 단번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말 똑바로 해. 어물거리지 말고.”
“도, 도해 형님의 차입니다!”
“……뭐.”
“도해 형님이 마시는 차, 용봉차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몽땅…….”
생김새뿐만 아니라 저돌적인 성격까지 멧돼지와 꼭 닮은 성새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어째서? 라고 생각한 순간 재떨이가 바람소리를 내며 날아가 산산조각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누가 바꿔 온 거라고?”
“―――――!”
국도해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내 머릿속에는 그의 손에 갈기갈기 찢기는 내 모습이 아주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상상을 상상에 머물게 하기 위해 나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기세로 내 뒤를 쫓아오는 악귀 같은 인간을 피해, 나는 차밭을 가로질러 미친 듯이 뛰고, 또 뛰었다.
“흐윽……흑. 흐엉…….”
“훌쩍거리지 마.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천만다행인 줄 알아.”
“뭐가 천만다행이야!”
달리다가 어디선가 벗겨진 운동화 한 짝은 끝끝내 찾을 수 없었고, 양말은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옷은 차나무 가지에 걸려 너덜너덜. 게다가 넘어진 채 국도해에게 잡혀 차밭을 가로질러 그대로 질질 끌려왔기 때문에 흰색이었던 내 티셔츠는 녹색이 되어 있었다. 머리는 까치가 두어 마리 살아도 좋을 만큼 엉망이었고, 몸의 이곳저곳에는 울긋불긋하게 멍이 남아 있었다.
“허엉. 그 인간 진짜 재수없어. 흐윽, 어떻게 지가 나를 이렇게 때릴 수 있냐고. 허어엉.”
싫다고 발버둥을 치는 나를 국도해가 질질 끌고 올 때까지도, 설마설마했다. 하지만 펜션으로 들어오자마자 한 대 얻어맞는 순간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목숨을 걸고 뜯어말려 줘서 그나마 몇 대로 끝났지만, 나의 서러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크허어엉, 나쁜 놈. 나쁜 새끼, 국도해 죽어 버려! 나쁜 놈! 악마 같은 자식!”
“자, 문질러.”
김유수가 냉장고에서 가져온 생달걀을 내밀며 눈가를 가리켰다.
“멍들었어? 아으, 젠장. 멍들 때까지 패다니! 그게 인간이야! 내가 왜 그놈한테 맞으며 사냐고, 허어엉. 열받아! 열받아 죽겠다고!”
어떻게 명색이 처음으로 연정을 느끼는 사람을 상대로 이따구로 팰 수가 있느냐고! 기가 막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죽지 않은 기 다행인 줄 알아라. 딴놈이었으면 벌써 차밭에 파묻어 버렸을 끼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가방 좀 바꿨다고 그러는 게 어디 있냐고요.”
처음엔 그럴 수도 있다고 관대하게 말하던 인간이 바뀐 가방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 악마로 변했다.
“니 그라믄 우짤 낀데. 행님 이제 아무것도 못 마신다 안카나!”
“뭘 못 마셔! 여기 죄다 차밭인데! 아무 이파리 뜯어다 마시면 되잖아요!”
“알잖아. 형님 그 차밖에 안 마시는 거. 아, 저기 관표 형님 나오시네.”
“어떻게 됐어요? 지금 주문하면 언제 온대요?”
“워낙 주문하는 사람이 없는 물품이라, 재고가 없다는데. 최소 나흘은 기다려야 한다는군.”
“괜찮아요. 인간은 수분 없이 일주일은 버티니까.”
내가 눈물을 닦으며 말하자, 김유수가 사정없이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괜찮으면 너도 그럼 나흘간 물 마시지 마! 마시면 죽을 줄 알아!”
“내가 왜! 나는 그 이상한 녹차 말고도 다 마실 수 있다고!”
목마르면 구정물도 먹을 수 있는 인간이 바로 나다. 중국에서 건너오는 그 알 수 없는 녹차만 마시는 천하의 생또라이 국도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관표 형님!”
성새민이 또 얼굴이 빨갛게 익어 헐레벌떡 뛰어왔다. 저 인간의 빨간 낯짝만 봐도 이제는 자동적으로 심장이 벌렁거린다.
“왜? 또 무슨 일인데.”
“도해 형님이 밥을 안 드신답니다.”
“…….”
관표 형님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온화한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누군가 거부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다름 아닌 국도해.
“왜 안 드신다는 건데?”
웃는 얼굴이 저렇게 무서울 수 있구나.
“저기,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편이 수분이 없을 때 더 참기 편하시다고…….”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왜, 왜 쳐다봐요.”
“몰라서 묻냐?”
“웬수 같은 놈. 하필이면 이런 때…….”
“그렇게 못 참겠으면 집으로 돌아가서 차 가지고 오면 되잖아요. 여기서 멀지도 않고.”
“지금은 안 돼.”
“왜애!”
“안 되니까 안 되는 거다.”
“그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뭔데요! 왜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안 된다는 건데요!”
내가 눈을 치켜뜨고 묻자, 관표 형님이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미소 지었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습니다.”
“약 필요 없어요. 전 건강하니까.”
“건강해서 억수로 좋겠데이. 불쌍한 우리 도해 행님은 우짤 낀데?”
“살인자.”
“천하의 잔인한 새끼.”
“선생님, 그러면 안 돼.”
모두 한마음으로 나를 비난하기 바빴다.
“살인은 무슨 놈의 살인이에요! 그 인간 성격이 이상해서 자기가 안 마신다는 걸 왜 나한테 그래!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하면 되잖아요! 내가 그 용봉산인지 용각산인지보다 더 좋은 차로 뜯어 올게요! 됐죠? 됐죠?”
“뜯긴 뭘 뜯는다고! 이 밤중에!”
“걱정 마. 나 고추밭집 아들 한봉, 아니 한준이라고요. 두고 보라고. 또라이, 아니 국도해 씨가 보기만 해도 침을 흘릴 만큼 굉장한 찻잎을 대령할 테니까.”
큰소리를 뻥뻥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모두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보았다. 물론 나도 내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차마 이 사람들 앞에서 그런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갔다 올게요.”
“잠깐만요.”
관표 형님이 내 어깨를 붙들며 말렸다. 하아, 역시 이 중에서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은 형님뿐이라니까.
“괜찮아요. 이파리 몇 개 따 오는 것뿐이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저 이래봬도 고추밭집 아들이에요. 손으로만 만져도 어느 놈이 실한지 비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이파리가 뭐 별거 있나요.”
“저기…….”
“말리지 마세요. 할 수 있어요. 까다롭기가 독사보다 사악한 국도해 씨의 비위를 맞춰 보일게요.”
“이거 가져가시라고요.”
관표 형님이 작은 바구니를 내밀며 말을 덧붙였다.
“맨손에다 뜯어 오실 수는 없잖아요.”
“…….”
“많이 뜯어 온나.”
“처음으로 나온 잎만 드시니까 최대한 어린 것들로만 따 와. 알았지?”
“기왕 따 오는 거 우리가 마실 것도 따 와라.”
“…….”
잊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철저한 국도해빠라는 사실을.
“뭐해? 안 가고?”
철저한 확인 사살까지 받은 나는, 바구니를 옆에 끼고 그대로 차밭으로 달려갔다.
어둠 속을 더듬어 간신히 따 온 나의 찻잎은 국도해의 문 앞에서 흩뿌려졌고, 그의 단식 수행은 계속되었다. 모두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일 초 일 분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국도해를 제외하고 이 무리의 최강 실권 관표 형님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형님, 저기 이거 국이 조금 짠 것 같……, 크악.”
숟가락을 입에 물고 중얼거리던 성새민은 코앞을 스치고 가는 식칼의 기세에 비명을 내질렀다. 나 역시 젓가락을 떨어트리고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물 타 먹어.”
“예, 예. 알겠습니다.”
지용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통을 내밀었다. 괜한 말은 왜 했느냐는 힐난의 눈초리도 함께 주면서.
“저기 저는 이만 일어날게요. 생각이 없어서.”
이런 자리에서 계속 밥을 먹었다간 체할 확률이 95%를 넘어간다는 계산을 마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남기시겠다는 건가요.”
“네?”
“음식을 남기시는 겁니까.”
“아니, 저기 생각이 없어서……. 음식이 맛이 없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요!”
“단지 생각이 없다는 하찮은 이유 하나로, 누구는 먹고 싶어도 수분 부족을 걱정해서 한 숟가락도 들지 못하는 밥을 반 공기나 남기시겠다는 겁니까?”
관표 형님의 안광에서 밥 처먹어라의 포스가 흘러나왔다.
“아니요. 먹을게요. 처먹겠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아 밥공기에 남아 있는 밥을 입에 쑤셔 넣었다.
온화한 얼굴을 한 관표 형님이 어떻게 넘버 투 자리를 꿰차고 있는가? 했던 나의 의문이 슬슬 해소되어 간다. 슬프구나.
“관표 형님은, 안 드세요?”
식탁 끝에 앉아 있던 김유수가 눈치를 보며 건넨 한마디.
관표 형님이 식칼을 식탁에 내리꽂으며 시체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해 형님이 곡기를 넘기지 않으신 지 만 이틀이 지나가는데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는가 보군.”
일동 아가리 묵념.
이것이 요 며칠간의 반복되는 레퍼토리였다. 음식을 산처럼 만드는 관표 형님. 먹지 않겠다고 하면 날아드는 식칼. 먹으려면 어떻게 음식이 넘어가느냐는 그의 질타.
……먹으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둘 중 하나만으로도 괴롭다.
“걱정입니다.”
관표 형님이 식탁에 꽂힌 칼을 빼내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걱정입니다. 우리 도해 형님.”
시선의 의도가 너무나 뻔했다.
“알았어요! 내가 올라갈게요! 내가 올라가면 되잖아요.”
식탁 한 귀퉁이 정갈하게 준비된 소반을 집어 들고 소리쳤다.
“파이팅.”
“살아돌아온나.”
“죽지 마라.”
모두 밥을 먹으면서 무심한 목소리로 응원을 보내 주었다. 국도해에게 식사를 권했다가 다들 한바탕 수난을 겪은 후였기에 이 행차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관표 형님은 죽 그릇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돌아왔고, 지용재는 날아드는 숟가락에 이마를 얻어맞고 기절했으며, 성새민은 젓가락이 손바닥에 꽂혀 붕대를 감고 다니며, 박건우는 3층에서 고공낙하를 했고, 김유수는 밥그릇에 코를 맞고 쌍코피를 흘렸다.
한마디로 전멸.
“소금은 사용하지 않아서 음식이 짜지 않으니 제발, 한 숟가락이라도 떠 달라고 말씀 전해 주세요.”
“예.”
가능하면, 전해 드리죠.
“저기.”
침통한 얼굴로 박건우가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래,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은 너뿐이냐.
“칼이 날아오면 이렇게 피해, 이렇게요.”
리얼하게 흉내까지 내는 모습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빌어먹을 자식.
“형님은 오른손잡이라서 오른쪽으로 날아올 확률이 25%. 왼쪽이 38%.”
“남은 37%는 뭔데?”
“정중앙. 이건 죽었다 깨어나도 못 피해.”
깨끗하고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는 박건우 놈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한숨을 푸욱 쉬면서 소반을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굳게 닫힌 방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아까 오른쪽이 몇 퍼센트였지? 왼쪽이 30대였던가? 정중앙이면 어쩌지? 이렇게 피하라고 했던가? 이렇게?
박건우가 보여 주었던 피하는 방법을 대충 연습하고 있을 무렵, 문이 벌컥 열렸다.
“크악!”
“뭐야.”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국도해가 문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저기 이것 좀…….”
정갈하게 담아 온 음식을 앞으로 내밀자, 그가 귀찮다는 듯이 밀쳐 냈다.
“좋은 말 할 때 치워.”
“나쁜 말 해도 안 치우면 안 되나요.”
“안 돼.”
그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에 몸을 구겨 넣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저도 안 돼요! 이거 이대로 가지고 내려가면, 저 죽어요.”
“죽든 말든.”
정말 상관없다는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대답했기 때문에, 울컥 열불이 솟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죽어도 진짜 상관없어요?!”
“그런데.”
완벽한 아몬드 형의 눈에 무심함이 스쳐갔다. 저런 싸가지 없는 표정조차 화보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외모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잘, 잘 생각해 봐요.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내가 없어도 돼요? 내가 죽어도 상관없어요?”
그가 쭉 뻗은 손가락을 제 왼쪽 가슴 위에 얹었다. 별것 아닌 동작이었지만 괜스레 심장이 쿵쾅거렸다.
“상관없는데?”
“――!”
국도해가 허리를 굽혀 내게 자신의 얼굴을 바싹 가까이 대고 다시 한 번, 찬찬히 말했다.
“네가 죽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지?”
굶는 와중에도 샤워는 거르지 않는지, 익숙한 샴푸 냄새가 화악 풍겨 왔다.
아니, 그런데 내 얼굴은 왜 붉어지고 난리야. 미쳤냐! 미쳤냐? 한봉팔. 여기서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할 상대는 내가 아니고, 바로 국도해라고. 누가 누구를 짝사랑하는 건지 기억 좀 해라, 이 바보 같은 몸뚱이야!
“마, 마음대로 해요. 그럼 나도 그쪽이 죽든 말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소반을 바닥에 소리 나게 내려놓으면서 몸을 돌렸다.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기 전에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는 나의 결심은 간단히 가로막혔다. 내 팔뚝을 부서져라 움켜쥔 국도해의 손에 의해.
“아파요! 놔요.”
“다시 말해 봐.”
“네?”
“다시 말해 보라고.”
이 인간이 왜 또 눈을 부라리면서 난리야.
“뭘 다시 말해요. 팔 아프니까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됐어요?”
“그 전에 한 말.”
“나가 죽어, 아니 이건 마음속 말이고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이요?”
“그래.”
“그게 지금 제 팔뚝에 멍이 남을 정도로 붙잡힐 이유가 되는 겁니까?”
눈썹을 찡그리며 항의를 해 보았지만, 여전히 먹히지 않았다.
“왜 상관이 없지?”
“네?”
“왜 나와 네가 상관이 없는지 묻고 있잖아.”
“…….”
입을 떡 벌린 채, 국도해를 바라보았다. 모든 일을 초 단위로 계산해서 계획하는 인간이 규칙적인 식사를 건너뛰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싶었다.
“대답해.”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니신가요. 먼저 상관이 없다고 하신 건 국도해 씨라고 기억하는데요.”
“불쾌하군.”
“네?”
“네 입에서 그딴 얘기를 듣는 게 불쾌하다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상관이 없다고 해서 내가 불쾌해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취소해.”
“뭘 취소해요.”
“아까 한 말.”
그가 고집스럽게 입술을 꾸욱 다물고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미쳤나? 저 모습이 어째서 귀여워 보이지?
“……밥.”
“뭐?”
“밥 한 숟가락만 드시면 취소할게요.”
바닥에 놓인 소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대로 내려가면 관표 형님의 무언의 압박에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간식을 해 주는 빈도가 두 배로 는 것도 괴로웠지만, 그때마다 국도해를 걱정하며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는 말을 듣는 게 한층 더 괴로웠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모두 같이 죽을 것이다.
“지금 제안을 하는 건가?”
“예. 협상이라고도 하죠. 밥 한 숟가락, 딱 한 숟가락. 이거 죽이라서 드셔도 괜찮습니다.”
“…….”
그가 무표정하게 그릇을 노려보았다.
그래 알고 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차를 마시는 너의 습관상 그것 없이 뭔가를 입안에 넣는 게 싫은 거겠지.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예전에 국도해의 서재에서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발견해서 몰래 꺼내 읽은 적이 있다. 그러고서 책을 꽂아 놓은 후 잊었는데, 그날 저녁 국도해가 정확히 그 책의 제목을 대면서 누가 그걸 만졌느냐고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에, 책의 위치가 한 칸 잘못 꽂혀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수천 권이 넘는 책의 위치를 모두 기억한다는 말에 소름이 확 끼쳤다. 그 정도의 편집증을 가진 국도해가 자신의 고집을 꺾을 리 없는 것이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한 숟가락.”
“――――?!”
“취소해라.”
……그러고는 정말, 죽을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었다.
그날 저녁은 식탁에 한 번도 칼이 꽂히지 않고 무사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일어나세요.”
“싫어. 더 잘래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며 잠투정을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일어나세요. 충분히 주무셨습니다. 일곱 시간 이상의 수면은 뇌세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거 모르시나요.”
이불 속에서 눈만 빠꼼히 내밀고, 나를 깨우는 관표 형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어제는 오랜만에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모두와 새벽 4시까지 고스톱을 쳤다. 흘깃 시계를 확인하니 7시도 미처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일어나서 준비하셔야죠.”
“뭘요.”
“식사 준비요.”
부드럽게 웃는 관표 형님의 눈매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불길한데 이거.
“저, 아침 안 먹을래요. 생각도 없고…….”
어제 무사히 한 숟가락을 국도해의 입에 골인시켜 역전극을 보여 준 나는 꾸물꾸물 이불 안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예, 생각 없으면 안 드셔도 됩니다.”
그 인간 입에 죽을 한 숟가락 처넣은 위력이 이 정도란 말인가.
“그래도 도해 형님은 다르시니까.”
“네?”
“도해 형님은 드셔야 하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도해 형님께서 아침 식사를 하실 시간이 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먹겠대요?”
“그럴 리가.”
그래, 그 인간이 그럴 리 없지.
“그럴 리 없으니까, 한 선생님께 부탁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예에에엑!?”
“어서 일어나서 샤워하시고 준비하세요. 아침은 간단하게 두 스푼으로 끝내죠.”
“잠깐, 잠깐만요. 지금 이게 무슨…….”
쾅――.
그의 주먹이 방문에 내리꽂혔다. 우수수 떨어지는 목재의 잔재를 바라보며, 딸꾹질을 했다.
“부탁, 드립니다. 한 선생님.”
고개까지 90도로 숙여, 관표 형님이 나에게 공손히 협박했다. 그는 진정한 넘버 투였다.
똑똑.
노크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돌아 가려 했지만 관표 형님이 싱긋 웃으면서 방문의 손잡이를 손수 돌려 주셨다. 문은, 불행히도 열려 있었다.
“들어가시죠.”
“아, 아니. 허락도 안 받고 들어가면 화내시거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들어가세요.”
라면서 관표 형님은 나를 억지로 방에 밀어 넣었다. 방은 병적일 만큼 깔끔했고,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방의 주인이 어디 있나 둘러보는 사이 뒤에서 문이 닫히면서 철커덕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
재빨리 달려가서 열어 보려고 했지만, 밖에서 관표 형님의 단호한 목소리가 내 의지를 말끔하게 꺾어 버렸다.
“임무 완수하실 때까지 열어 드리지 않겠습니다. 끝나시면 전화하세요.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 이런 게……!”
“그럼 이만.”
“안 돼! 안 돼! 이러면 안 돼요!”
방문을 두드리며 애처롭게 외쳐 봤지만 들려오는 것은 계단을 내려가는 규칙적인 발소리뿐이었다. 국도해와 한방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무거운 적막과 함께 내 숨통을 조여 왔다. 조심조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어기요.”
떨리는 목소리로 방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거실에서도 그 인간의 잘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침실로 들어가 보았지만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청소를 하면 이렇게 깔끔할 수 있는 걸까.
“크하핫, 풉.”
걸레를 들고 여기저기 청소하는 국도해의 모습이 떠오르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근엄한 얼굴을 하고 청소를 하다니!
“크하하핫. 푸하하하.”
한번 상상이 되기 시작하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지.”
“크하하하핫, 생각만 해도 웃기잖아. 그 인간이 이렇게 걸레질을……, 히익.”
국도해가 뒤에 서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며.
“하하하하, 안녕하세요. 굿모닝.”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아침 식사 하셔야죠.”
쟁반을 앞으로 쭈욱 내밀며 왕의 식사를 올리는 무수리 같은 포즈로 말했다.
“왜?”
“네?”
“내가 왜 식사를 해야 하는데.”
아니 밥 처먹는 데 어째서 이유를 꼬박꼬박 달고 먹어야 하는겨!
“무슨 식사 거부 아동도 아니고, 당연히 드셔야죠.”
우물쭈물 대답했지만 상대는 내 대답 같은 것은 관심 밖이라는 얼굴이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수건을 바구니에 던지고 침대에 털썩 앉은 국도해의 모습에 절로 눈이 갔다.
흰색 목욕 가운 사이로 보이는 균형 잡힌 근육이 그리스 조각처럼 신성하게 느껴졌다. 아니, 대체 어떻게 하면 군더더기 한 점 없는 완벽한 형태의 근육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보면 쪽팔린다고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을 정도였다. 허여멀건 내 몸과 비교하자니 가슴이 아파 오는구나.
“뭘 그렇게 봐.”
“……근육이요.”
넋이 빠진 채 대답했다가, 그대로 혀를 깨물었다.
시방 지금 내가 뭐라고 한 거여!
“근육?”
“아니, 그러니까 고기의 근육! 육질 말입니다. 육질이 잘 보여야 좋은 고기라고 하잖아요. 아이쿠, 맛있겠다.”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쟁반을 내려다보았지만 그 위에는 멀건 죽만 놓여 있었다.
아니! 관표 형님! 당신의 국도해 씨를 위해서 고기 한 점 굽지 않았단 말인가요? 아침에 고기가 없으면 그게 무슨 아침이야!
“아하하하, 쌀도 근육이 필요한 거 아시나요?”
“…….”
“쌀의 표면에 섬세하게 보이는 근육이 있는 거 모르시죠? 모르실 거야. 그런 건 직접 벼를 재배해 본 사람만 안다니까요. 도시에서만 지낸 양반이 뭘 알겠어요. 하하하하핫.”
“너희 집 고추 농사짓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
젠장, 기억력은 쓸데없이 좋아 가지고.
“밥을 먹으면 뭘 해 줄 건데.”
“네?”
“나는 일방적인 관계는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지.”
알고 있다. 뭐든지 짝이 맞지 않으면 질색팔색하는 그 더러운 놈의 성깔! 알 수 없는 그놈의 균형!
“아니, 본인이 밥을 드시는데 왜 제가 꼭 뭘 해 드려야 해요. 애도 아니고…….”
마지막 애도 아니고, 는 소심하게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렇군. 애도 아니고 말이지.”
아니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 주시다니! 웬일이래?
“으아악, 지금 뭐, 뭐하시는 겁니까!”
“옷 갈아입을 준비.”
옷을 갈아입는 것은 좋다. 하지만 왜 꼭 내 앞에서 목욕 가운을 벗어던지고 근육 자랑을 하냐고! 살짝 물기를 머금은 국도해의 몸이 내 앞에서 움직이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빠, 빨리 옷 입으시죠.”
“무슨 상관.”
짓궂어 보이는 미소까지 지으며 유유히 내 앞을 지나가는 국도해 때문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안 나가고 뭐해.”
“저, 저도 나가고 싶어요!”
“그런데.”
“…….”
이걸 어느 정도 비우지 못하면 방 밖에서 자물쇠를 안 열어 주니까 문제지. 그냥 내가 퍼먹어 버릴까? 그러다 걸리면? 산 채로 회가 떠져 차밭에 비료로 뿌려질지도.
예전 같았으면 가장 신뢰했을 관표 형님이 지금은 가장 두려운 존재로 부각되었다. 물론 눈앞의 인간이 부동의 넘버원이긴 하지만.
“드세요.”
다시 한 번, 왕에게 산해진미를 진상하는 무수리의 마음으로 쟁반을 내밀었다.
“싫어.”
저 천하의 폭군 같으니! 너 같은 게 왕이었으면 백 년 전에 반정(反正)이 일어났을 거다!
“알았어요! 거래해요. 무슨 소원인데? 뻔하지. 키스하자는 거죠? 탐스러운 내 입술에 입 맞추고 싶다는 얘기 하려는 거죠?”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외쳤다.
“해요! 자, 하라고! 빨리.”
입술을 앞으로 쭈욱 내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때, 한 번 당하나 두 번 당하나 그게 그거지. 키스한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젠장, 그나저나 키스하다가 갑자기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나 샤워도 안 하고 왔는데. 아니, 덮치면 당연히 반항을 해야지 당하긴 내가 왜 당해! ……3층에서 뛰어내리면 살 수 있을까.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내 입술 위로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
살며시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옷을 다 갖춰 입은 국도해가 한심하단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안 하세요?”
“내가 왜 너한테 키스를 요구해야 하는데.”
“―――!”
크아아악, 지금 이 순간 내 손이 포크레인으로 변한다면 소원이 없겠다. 땅을 파고 안으로 들어가 바다 건너로 도망가 버리고 싶구나!
그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순식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이건 요구하지 않아도 할 수 있잖아.”
“하지 마세요! 이제는 요구하고 하란 말입니다!”
셔츠의 단추를 잠그던 국도해가 짧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요구는 따로 하나 있어.”
“뭔데요.”
될 대로 돼라. 뭘 해도 이보다 쪽팔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림이 그리고 싶은데.”
“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스케치북과 연필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도 않음은 물론이요, 누군가를 모델로 삼는 일도 없다는 국도해의 버릇에 관해 전해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이 사람 나를.
“너 말이다. 나의…….”
짙은 눈썹 아래의 지적인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자 심장이 펌프질을 시작했다. 국도해가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 요구를 하면, 여자는 물론 남자들까지도 넋이 나가 들어 주곤 한다는 멧돼지의 농담이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모던한 디자인의 담배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그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긴장된 공기 속에서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성대를 통해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의 정물이 되어라.”
……그렇게 나에게 모델 아닌 정물로의 초대장이 내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