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넘어진 몸이 아프다고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도 며칠 가지 못했다. 흰 수건을 내어 주면서 고추밭으로 내모는 매정한 어머니 덕분에 다시 땡볕 아래 앉게 되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초여름의 밭이 이렇게나 뜨거운 줄은 미처 몰랐는데. 위로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와 아래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합쳐져 그대로 익어 버릴 것 같았다.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쓴 것은 정말 본능에 의해서였다. 그대로 폭사당하고 싶지 않은 생존에 대한 순수한 본능.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한참 고추를 따고 있는데 등 뒤에서 시원한 그늘이 형성되었다. 누군가 싶어 돌아보려다 발 옆으로 보이는 낯익은 구두에 고개를 푹 숙였다.
“…….”
못 본 척, 탐스럽게 열린 풋고추에 손을 뻗었다. 그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계속 내 위에 머물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벌떡 일어나 반갑게 인사를 건네야 하는 것인가? 젠장, 생각해 보니 지금 내 머리에는 수건이 밭 매는 아낙처럼 둘둘 매어진 채다. 역시 계속 모른 척해야 할까. 설마 나를 알아보지는 않겠지? 그래, 나랑 몇 번이나 봤다고 뒷모습만 보고 사람을 알아보겠어.
끝까지 시치미를 떼기로 작정을 하고, 광주리에 고추를 따서 집어넣었다.
“…….”
“…….”
고추를 23개쯤 따서 넣었을 무렵에도 그림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드리워져 있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내가 아닌 척 말을 건넸다.
“거……어……어쩐 일루 그래 뻐뻣하니 꼿꼿이도 있소?”
마음만 먹으면 자유자재로 나가는 이놈의 사투리. 처음에 학교에 입학했을 때 친구들이 외모와 지독히도 안 어울린다고 얼마나 놀려댔던가. 여자 동기 중 하나는 내가 사투리를 할 때 느껴지는 위화감은, 외국 방화를 우리나라 성우가 더빙했을 때의 수준이었다고 증언했다.
“신기하군.”
“뭐가……!”
신기하냐고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지를 뻔했다. 다시 흠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사투리를 구사했다.
“뭐가 긍게 신기혀다고…….”
“표준어와 사투리. 2개 국어를 구사하잖아.”
“2개 국어라니!”
흥분해서 머리에 두른 수건을 집어던지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 더운 날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지만 남자의 주변 공기는 묘하게 시원해 보였다.
“그 정도면 2개 국어라고 생각하는데.”
진심으로 한 대 치고 싶다. 평화주의자인 나로서는 대단한 분노가 아닐 수 없다.
“그러는 그쪽은 할 일이 없으신가 보군요.”
“산책 중.”
“허헛, 웃기네. 산책을 남의 집 고추밭을 가로질러 하시나 보죠? 빨리 나가요.”
“아직 구두를 못 돌려받은 것 같아서.”
……젠장, 그날 빌려서 집까지 끌고 온 구두를 깜빡하고 있었다.
“가져다주면 되잖아요. 내, 내가 언제 그런 거 떼어먹는다고 했어요!”
“당장 가져다 놔.”
“네?”
“당장.”
“…….”
저 차분한 얼굴을 봐서는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지?
“못 알아듣나?”
“……저는 저쪽 푸른색 기와집에 살아요. 청기와집이라고 하면 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 없고요. 당분간 이사 예정도 없어요.”
“그래서.”
“그깟 구두 한 짝 떼어먹을 계획은 없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짝이 안 맞는 구두는 참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는데.”
“…….”
“당장 가져다 둬.”
저건 권유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저 인간의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지 하루 만에 두 번의 기절을 통해 체득했기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하죠.”
아직 못 다 찬 광주리를 들면서, 불쑥 심술이 치솟은 나는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남의 밭에 너무 오래 서 계시네요. 사유지 주인이 퇴거 요구를 했을 경우 응하지 않으면 주거 침입으로 고소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형법 319조에 정확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징역 3년 이하 500만원 이하의 벌금.”
“고추밭에 살고 있다는 얘기인가?”
“그――!”
죄목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유지 무단 침입으로 해서 들어갔어야 했는데. 으아악, 쪽팔려.
“묘한 거주지군.”
남자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밭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인간하고 만난 것은 오늘이 세 번째이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시, 신경쓰지 마시죠. 구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대학생?”
“네?”
“대학생?”
남자가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담배를 입에 가져다 문 채, 반복해 물었다.
“……뭐, 일단은.”
한 학기 남겨두고 방세는 물론 학비까지 날려 버려서 졸업이 불투명하긴 하지만. 아아,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 나니 다시 우울해졌다.
대체 돈 500만원을 어떻게 마련한다지.
“과는?”
“네?”
“과.”
“……법학과요.”
이놈이 갑자기 왜 프로필 조사에 들어간 거지? 눈치를 슬슬 살피며 대답하자 남자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면서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공부를 잘했나 보군.”
“……네, 잘했죠.”
그거 하나는 정말 내게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장점이었지. 부모님은 아직도 F학점이 최고의 점수인 줄 알고 계시다.
First의 약자 F는 일등에게만 주는 학점이고, Difficult는 어지간하게 공부 잘하지 않으면 받기 힘들어서 D. C는 똑똑하다의 Clever에서 C.
영어사전을 옆에 두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 드렸었다. B와 A는 내 성적표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설명을 건너뛰어 버렸다.
순천 최고의 영재, 최강의 천재 한봉팔, 아니 한준의 인생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그렇단 말이지.”
“……?”
“구두.”
남자가 짧게 명령했다.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투덜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가 마루 밑에 쑤셔 박아 둔 구두를 찾아 예의 그 삐까번쩍한 집에 건네주고 왔다. 구두 한쪽을 돌려받은 남자들이 왜 이제야 가지고 왔느냐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간신히 들어갔던 입이 다시 댓발 나와 버렸다. 기분이 좋지 않아 호숫가를 한참 서성이다 해질 무렵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난리였다.
“니는 머땀시 하던 밭일은 패댕이치고, 워딜 그리 쏘다니냐.”
“잠깐 볼일 있어서 갔다 왔어요.”
“워메, 네가 볼일은 뭔 볼일이 있어. 이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
“그건 그렇고, 너 저짝에 있는 한옥집 아냐? 거 있잖여, 번쩍번쩍하고 겁나게 이쁜 집 말이여.”
“새로 지은 집이요?”
“그랴.”
“그 집이 왜요.”
“그 집에서 뉘가 잠시 너 찾아왔당게. 너한테 그 뭣이더냐 과, 과외 이런 거 할 생각 없냐믄서.”
“과외요?!”
“그랴. 아까 너 뭐 들고 나간 다음에 한참 지나서 누가 왔었제. 아주 덩치 좋구 탱탱한 게 멧돼지같이 생겼었지.”
왜 이제야 구두를 가지고 왔냐고, 그동안 구두 짝이 안 맞아서 집안 분위기가 얼마나 썰렁했는지 아느냐고 가장 크게 소리 지르던 멧돼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그 멧돼지가 왜!”
“거 과외 선생 구한답시고 왔다는데……. 난 그 집에서 나온 사람이 동네 주민한테 말 거는 거 첨 봤다야.”
“…….”
“할 거제?”
“하긴 뭘 해요! 그 집하고는 다시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아따 하기 싫으면 안 허믄 그만이제, 뭔놈의 소리를 그래 질러싸.”
어머니가 귀를 후비면서, 인상을 찡그리셨다.
“죄송해요.”
그놈의 집만 떠올리면 머리가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반응이다. 무릎을 치면 발이 올라오거나, 재채기를 할 때 눈을 감는다거나, 물건이 눈앞으로 날아들 때 눈을 감는다든지. 기타 등등. 흐음, 다 무조건 반사들의 예구나. 무조건 반사는 몸이 위험에 처했을 때 신속하게 반응하는 것들인데, 생각해 보면 진짜 그렇다. 그 집하고 엮이면 몸은 물론 내 이성까지 위험하니까. 절대로 엮이지 말아야지, 절대로.
“그라믄 우짤 수 없제. 저 아랫동네 철수네한테 넘기든지 해야 하겄네. 달에 백은 준다든디 거참…….”
마루에 앉아 전화기를 들려던 어머니의 손을 부여잡은 것은 그와 동시였다.
“뭐라고요!?!”
“뭐가 뭐시여?”
“다, 달에 얼마라고요?”
“백. 돈두 억수로 많은가 보드라잉. 그나저나 철수네 전화번호가……잉? 너 뭐하는겨!”
단호하게 전화기의 코드를 뽑아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할게요, 제가 해야 해요, 해야만 해요, 절대로.”
“워메, 아까는 절대 상관 안 한다 허지 않았었냐?”
“마음이 바뀌었어요.”
“변덕은…….”
그래, 비굴하고 더럽고 치사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좋다. 일단 내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방세와 마지막 학기 등록금이다. 과외라고 해 봤자 그 성격 나쁜 고양이처럼 생긴 꼬마 놈일 테지. 지금까지 과외 한번 하지 않고 부모님이 주시는 돈 받아다 쓰는 생활만 했으니, 이렇게 건설적으로 돈을 버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 조폭 상대면 어떠하리. 차근차근 돈 모아서 까먹은 돈 채우고 건실하게 돈 벌면 되는 거지. 올 여름의 계획은 과외로 재벌 되기로 설정해 두자.
백지 같았던 인생에 이정표가 세워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너 시방 어디 가능겨!”
“네? 새로 이사 온 집 가 보려고요.”
일단 결심한 것은 그 자리에서 깔끔하게 해결하는 게 내 특기이자 장점이었다.
“가긴 이 저녁에 어딜 간다는겨. 할 맴 있으면 내일 오전에 오라 했응게 그때 가든지. 후딱 씻고 밥이나 먹어라.”
“내일 오전이요? 몇 시쯤이요?”
“오전이니께 12시 전후겄제. 아따, 그렇게 좋으냐?”
“네? 아니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들기며 재빨리 벌어들일 수 있는 금액을 산출해냈다.
운명의 여신이 이제야 나를 다시 돌아보며 미소를 보내 주었다.
다음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어차피 못 볼 꼴을 다 보여 준 후지만 과외를 시작하려면 선생으로서의 위엄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걸어가면서 문을 어떻게 열어 달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대문 앞에 서는 순간 그 고민은 말끔히 걷혔다.
“……열려 있네.”
워낙 한적한 동네라 도둑이 없긴 하지만, 도둑이 든다 해도 그가 살아서 나갈 확률은 희박하겠지. 한마디로 훔칠 테면 훔쳐 봐라 이건가. 하긴 알리바바에 나오는 40인의 떼강도들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겠지. 음, 거기서 나오는 주문이 뭐였더라. 열려라, 열려라…….
“어서 오십시오.”
“참깨!”
“…….”
“…….”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속으로 우물거리던 주문을 외쳐 버리고 말았다.
이러지 말자. 선생으로서의 위엄 위엄.
“하하하핫. Barley! 영어로 참깨가 Barley죠. 요즘 이 단어가 좋아졌단 말이에요.”
“Sesame겠죠.”
“네?”
“일찍 오셨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왼쪽 눈가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공손하게 나를 안내해 주며 대답했다. 그나마 이 집에서 가장 정상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냥, 원체 부지런해서요. 하하하핫.”
차마 어젯밤에 수중에 떨어질 돈을 생각하면서 잠을 설쳤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네요. 형님께서 운동 중이셔서.”
“운동이요?”
인간 같지 않던 그 인간의 차가운 얼굴이 떠오르자, 운동이란 단어가 지극히 생소하게 들려왔다.
“네, 거의 끝나 갑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마당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집이 나눠지는 작은 문 앞에서, 남자가 나를 제지했다.
“왜요? 무슨 운동 하는데요? 설마 총 쏘기 이딴 건 아니겠죠?”
“설마요.”
작은 정원으로 들어서는 문을 열고 살짝 고개를 들이밀자마자,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에 기겁하고 말았다.
“―――!”
성인 남자 허리까지 오는 장검을 들고, 앞에 놓인 대나무 묶음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전신에서 흐르는 살기에 멀리서 지켜보는 나조차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왜……왜 저런 걸 운동이라고 하고 있는 거죠.”
“쉿.”
이미 검날에 희생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는 대나무들을 바라보며 소름이 돋은 팔뚝을 어루만졌다.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던 남자가 팔을 치켜들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미 검이 공중을 갈랐다. 대나무는 말끔하게 반 동강이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내 손에 붙어 있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지금처럼 이렇게 예뻐 보인 적은 기필코 없었다.
“멋지십니다!”
“역시 형님!”
“대단하세요!”
옆에서 수건과 찻잔을 건네며 모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어딜 가시려는 건가요?”
“아, 저기 잠시 집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나중에 찾으시죠. 도해 형님, 손님 오셨습니다.”
도망가려던 내 뒷덜미를 덥석 잡아 마당으로 밀어 넣은 남자는 여전히 공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젠장, 아까 한 말 취소한다. 말이 통하긴 개뿔이 통해.
스르르릉―――.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이 검 집으로 들어가는 날카로운 소리에 머리끝이 쭈삣 솟았다.
“일찍 왔군.”
땀을 닦은 수건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남자가 나를 흘긋 보며 말했다.
“에? 저거…….”
쓰레기통으로 향한 내 시선을 옆에 서 있던, 멧돼지 씨가 단호하게 바로잡아 주었다.
“저런 건 신경쓰지 말고 대화나 하지. 죽고 싶지 않으면.”
“예에? 히익―.”
검 집에 들어가 있어야 할 녀석이 어느새 내 뺨에 다가와 서늘한 감촉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람하고 말을 할 때는 눈을 마주보는 게 기본이다.”
“그럼요. 그렇지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재빨리 한마디 덧붙였다.
“검을 치워 주는 것도 기본일 것 같은데요.”
한순간 뺨에 닿아 있던 검이 검기를 내뿜는다고 느꼈다.
“과외 경험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검이 거두어졌다.
“네?”
“과외 경험을 물어보고 있는데.”
“아, 과외 경험이요? 그냥 조금…….”
“숫자로 대답해.”
“그냥 그럭저럭…….”
옆에 서 있던 멧돼지가 내 허리를 비틀어 꼬집으면서 눈짓을 보냈다.
“윽, 그럭저럭 세 명.”
비명을 억누르면서 숫자가 들어간 대답을 해 주었다.
“과목은?”
“네?”
“할 수 있는 과목.”
“글쎄요. 예체능 빼고 다?”
전교에서 한봉팔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난 뛰어난 수재였다. 젠장, 이때는 아직 한봉팔이었기 때문에 편의상 그 이름으로 설명을 해 주겠다. 아무튼 나는 모든 과목에서 고른 우수함을 보였고, 학교에서는 플래카드로 내 이름을 써서 붙일 만큼 모든 선생이 나를 예뻐했다. 하지만 예체능 쪽으로는 재능 제로(zero)에 도전하던 나는, 그쪽 계열 선생에게만큼은 사랑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예체능도 분명히 성적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나는 노력했다. 미술시간을 위해서는 쉬는 시간 내내 석고상을 닦아 놓았으며, 음악시간을 위해서는 피아노 건반을 일일이 손수건으로 닦아 놓았다. 바람 빠진 공에 공기를 넣는 것은 물론 다 나의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3년 내내 모든 예체능 과목의 실기 A플러스를 획득할 수 있었다. 비굴하고 치사하다고 욕을 하던 사람도 3년간 계속되는 나의 노력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재능으로 메울 수 없는 부분은 노력으로 메운다.
빛나는 날의 젊은 나는 그렇게 외치곤 했었지. 떠올리니 눈물이 날 것만 같구나.
“너 미쳤냐. 무슨 말을 그렇게 혼자 중얼거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꼬마 녀석이 내 등짝을 후려치면서 물었다.
“으앗, 왜 때려.”
“그런데 네가 선생……이냐?”
나보다 약간 작은 키를 가진 꼬마 녀석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왜? 내가 선생님이 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이 녀석이 나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기선 제압이 필요한 것이다. 선생으로서의 위엄, 위엄.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지.”
“역부족이지 않을까?”
꼬마와 남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것들이 진짜! 선생을 앞에 두고 뭐라는 거야!
“다들 조용히.”
남자의 나지막한 지시에 모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실력은 두고 보도록 하지.”
“예? 예에.”
기가 막힌다. 아니 지가 뭐라고 실력을 두고 보고 지랄이야. 웃기는 놈이야, 진짜.
“자,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눈가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안쪽을 가리키며 나를 안내해 주었다. 자신이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두목 씨의 말을 듣고 나서 픽, 웃어 버렸다. 의외로 오지랖이 넓은 인간이구나.
잘 손질되어 은은한 광택을 내는 나무 복도를 걸으며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속으로 거듭 되뇌었다. 아자아자, 파이팅!
“…….”
“…….”
나무 테가 그대로 살아 있는 고풍스러운 상을 사이에 두고 학생이 될 사람과 마주보고 앉았다.
“저기…….”
간신히 꺼낸 첫마디였다.
“왜.”
남자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어째서 거기 앉아 계신 건가요.”
“여기 과외 하러 온 거 아닌가.”
“예, 그런데요.”
“그럼 해.”
“……누구랑?”
“나.”
짧은 대답 한마디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아, 아니 그러니까 지금 그쪽이 저한테 과외를 받고, 저는 과외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계신 건가요. 그러니까 그쪽이 학생, 내가 선생?”
“그런데.”
실낱같은 희망이 새파랗게 날이 선 가위로 싹둑싹둑 잘리는 기분이었다. 아아, 이건 세계에서 가장 바느질을 잘하는 사람이 온다고 해도 이어붙일 수 없는 수준이다.
어떻게! 어째서! 보기만 해도 살점이 베어져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저 살벌한 인간에게 내가 과외를 해야 한다는 건데! 왜!
“저기, 그게요……, 과외라는 것이 그러니까…….”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말도 제대로 나와 주지 않았다.
“계속해 봐.”
“……왜 그쪽이 거기 앉아 있는 것이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까 말했잖아. 과외를 받으러.”
“……왜요.”
“필요하니까.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도록 하지.”
쓸데없는 말이 아니라고, 나에게는 목숨과도 직결되는 일이라고 버럭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 역시 내 목숨과 다이렉트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기에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일단 과외라는 것이 서로를 잘 알고, 그리고 성격도 잘 맞아야 하고, 에……, 또 그리고…….”
“누가 너랑 연애라도 하자는 줄 알아.”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때려죽여도 저 역시 그런 생각은 안 합니다. 교재가 없으니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쿵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종이 박스가 놓였다.
“…….”
“고르시죠.”
다른 상자를 계속 옆에 내려놓으면서 눈 밑에 흉터를 가진 남자가 말했다. 그 안에는 출판사 시리즈별로 문제집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일단 그러면……, 어떤 과목을 해야 할지.”
“전부.”
“전 과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눈앞의 풍경이 점점 더 색채를 잃어 간다.
“그렇다면 일단 주요 과목을 중심으로 하고, 나머지 과목은 틈틈이 하는 걸로 하죠.”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한숨을 내쉬며 가지런히 쌓인 문제집을 꺼내들어 대충 안을 살펴보았다. 그 중 정리가 잘된 출판사의 문제집을 과목별로 골라냈다.
“이게 좋을 것 같네요.”
목재로 만든, 평상 상석에 앉은 남자가 턱으로 문제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줘 봐.”
“…….”
두 손으로 문제집을 다소곳이 건네주고 쓴 입맛을 다셨다. 선생은 나인데 어째서 내가 검사받는 기분을 느껴야 하지.
문제집을 건네받은 남자가 꼼꼼히 책장을 넘겨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안 돼.”
“네?”
“안 된다고.”
“네? 왜요? 개념 정리도 잘 되어 있고 문제 유형이나 보기가…….”
“색채에 일관성이 없어.”
“…….”
“기본 문제의 디자인과 연습 문제의 디자인은 같은데 심화만 다르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예, 가능하죠.”
“절대 불가능해.”
“그게 뭐가 중요해요! 공부만 하면 되는데!”
옆에 앉은 남자들이 모두 필사적으로 눈짓을 보내 나를 말리려고 했다.
“무질서 안에서 무슨 공부를 하는데.”
남자가 목소리만큼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엔트로피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즉, 질서에서 무질서한 방향으로 흐른다고요. 그건 만고의 진리입니다!”
“2법칙이죠.”
옆에서 차를 따르고 있던 흉터 씨가 살짝 끼어들었다.
“1이든 2든 아무튼 그것이 우주의 원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선생은 저고, 교재 선택은 가르치는 사람이 해요.”
책상 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당당한 목소리로 주장을 펼쳤다.
그래 이거다! 선생으로서의 위엄!
“교재 선택은 선생이 한다, 라.”
남자가 다시 문제집을 휘리릭 넘기면서 내 말을 되씹었다. 그러고는 옆에 놓인 담배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뭐, 뭐야. 그런다고 누가 쫄 줄 알아! 교실에서는 선생 말이 법이라고, 법!
“가상한 용기군.”
“…….”
선생의 말이 법……, 선생의 말이…….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만세! 비바! 선생의 말이 법!
그 순간 문제집이 화르륵 소리를 내며 환한 불꽃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 사이로, 그 무엇으로도 온도를 높일 수 없는 차갑고 단단한 빙하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남아 있는 것 중 골라 보도록 하지, 선생.”
……나의 교실은 그렇게 붕괴되었다.
그가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첫째, 자신에게는 닿지 않을 것.
그래. 이건 하라고 정화수를 떠놓고 빌어도 하지 않을 것이다. 뭐가 좋다고 그딴 또라이에게 닿고 싶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으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네.
둘째, 자신의 집에서는 질서를 존중해 줄 것.
이것이 미묘하다. 결국 8개의 출판사 문제집을 불태우고 간신히 통과한 문제집이 그놈의 질서를 대변해 준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첫날에 칼같이 100만 원짜리 수표를 과외비로 내미는 자리를 어떻게 팽개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까짓 거 그놈의 결벽증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줘야지.
셋째, 수업 시간을 엄수할 것.
1분 1초라도 시간이 어긋난다면 그날로 과외는 끝낸다고 했다. 어차피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건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1초라는 사소한 단위도 용납하지 못하는 그 인간의 더러운 성격이 무서운 거지.
넷째, 밖에 나가서 자신들의 이야기는 하지 말 것.
지들이 무슨 비밀 첩보원이라도 된다고 유난을 떠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조폭에게 과외해 줘서 돈 벌었다는 소문은 그다지 달갑지 않으니까.
다섯째, 자신이 화가 났을 때는 자신의 말을 들을 것.
……이 부분이 심하게 마음에 안 든다. 아니, 24시간 내내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화가 났을 때」 따위의 단서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 당신 같은 인간이 그딴 단서를 사용하면 법에 저촉되는 거 알아? 라고 외쳐 주고 싶었지만 꾸욱 참아냈다. 내 손에는 백만 원짜리 수표가 들려 있었고, 붕괴된 교실에서는 선생의 위엄보다는 목숨이 더 중하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잘 알고 있으니까.
“봉팔아, 너 고래집에 가서 선생질 한담서.”
그날 저녁 밭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거나하게 취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집을 고래등같은 기와집이라 해서, 고래집이라고 부른다 했다. 우리 동네 사람들 센스야 내 이름 듣고 남자답다고 좋다고 박수칠 때부터 알아봤다.
“예, 오늘부터 과외 시작했어요.”
“돈두 많이 준다 해서 야가 귀가 솔깃했나 보지라잉.”
늦게 저녁을 차리시던 어머니가 한마디 거드셨다.
“돈? 그까이거 월매나 된다고 청기와집 한봉팔이 코흘리개 애들을 가르치고 있어!”
“봉팔이 아니라니까요!”
“네가 봉팔이가 아니면 뭔데잉!”
술에 취한 아버지는 평소보다 다섯 배쯤 완고하게 변신하시곤 했다.
“……알았어요. 봉팔이라 쳐요.”
“그려, 한봉팔. 세상에서 제일 잘난 우리 아들! 쬐매 있음 법관 돼서 세상을 호령해야제! 그깟 코 묻은 돈을 받아가며 지내서야 쓰겄냐!”
그 집 분위기를 봐서 코보다는 피가 묻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겠다.
“방학 동안만이요. 방학 동안만 하는 거예요.”
“뭐시여? 방학 동안? 그럼 너 방학 내내 여기 있겠다는 말이냐!”
“……그럼 안 돼요?”
“공부는 안 허구 여서 농사라도 짓겠다는 것도 아니구, 대체 뭔 생각인겨!”
“그냥 좀 쉬려고요.”
“뭐여? 공부는 안 혀?”
“아따, 야가 좀 쉬겄다는데 뭘 그래싸요.”
“시험도 얼마 안 남은 아가 당신 닮아서 게으름을 피우려고 하니까 그러제!”
“뭐, 뭐여! 봉팔이가 싼 똥까정 자기 꺼랑 똑닮았다고 했던 양반이 시방 뭐라는 거여!”
“아니, 이 여편네가. 그러는 지는 봉팔이 방구 냄새까정 자기랑 똑같이 구수하담서!”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열심히 하세요.”
“넌 또 어델 간다고 그람시롱 나간다는 거냐! 야, 봉팔아!”
그대로 집에서 나와 호숫가로 달렸다.
당신들이 싼 똥과 방귀 냄새가 나와 똑닮았다고 주장했다가 부부싸움에서는 그 말을 재빨리 철회하는 부모님과 조폭의 과외를 여름 내내 해야 한다는 현실.
둘 중 어느 것이 더 불행한 것일까.
몇 시간 동안 호수 주위를 걸어 다니다 새벽별이 보일 때쯤 집에 돌아온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그래. 얼마나 푸욱 잠들었는지 알람 소리는 내 잠 속에 침투할 수 없었다.
단단하고 견고한 나의 잠이여.
“……젠장!”
덕분에 수업 시간인 10시로부터 1분 남짓 남아 있는 이 상황에서 나는 세수도 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언덕을 넘어 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초침이 막 6을 지나 데드라인이 30초 정도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안 돼! 어떻게 잡은 돈줄인데!
“으크아아악!”
폐와 심장이 과부하로 고장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돈을 위해서는 죽도록 달릴 수밖에.
강 씨 아저씨네 옥수수 밭을 가로지르며 있는 힘껏 팔다리를 움직였다. 장담할 수 있다. 중․고등 시절의 체육 선생들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모두 손을 잡고 안과를 단체 방문했을 거라고. 초침이 10을 지나 11을 향해 움직이는 순간 간신히 내 몸을 으리으리한 대문 안에 밀어넣을 수 있었다.
“세이프.”
대문 앞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결과를 통보했다.
“하아……하아…….”
숨을 몰아쉬며 예의상 웃어 주려고 얼굴을 들자 남자가 정떨어지는 목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간신히.”
“…….”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대응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깨물었다. 1초 차이로 들어왔기 때문에 양심상 간신히라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이런 아슬아슬한 출근을 계속할 생각인가.”
“하아, 아니요. 쿨럭, 오늘은……흠……늦잠을 잔 것뿐입니다.”
옷에 붙어 있는 옥수수수염을 떼어내며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꼴이 그게 뭐지?”
“네? 저요?”
“그럼 누구.”
“제가 왜요.”
옥수수수염이 그렇게 많이 붙어 있나?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그렇게 큰 흠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박건우.”
“네, 형님.”
부스스한 머리로 이마를 가리고 있는 남자가 앞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처리해.”
“알겠습니다.”
“크악!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항변은 먹히지 않았다. 그대로 내 어깨를 잡고 끌고 가는 박건우의 힘은 엄청났다.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조금도 소용이 없었다.
아니, 옷 좀 대충 입고 왔다고 해서 살인을 저지르다니! 늬들이 인간이냐! 인간이야!
“잠깐만요. 이것 좀 놓고 얘기해요. 우리 이성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자구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돼.”
“에엑? 너야말로 무슨 말이야.”
“일단 널 처리해야 해.”
“크아악!”
좁은 방 안에 억지로 밀어 넣어졌다.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는 놈을 노려보며, 당당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살려 줘!”
“…….”
“살려 달라고!”
단순하고 간단한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녀석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린 후 대답했다.
“……처리하고 나서 생각해 볼게.”
그리고 그대로 나는 갈아입혀졌다.
“보기 좋군.”
“…….”
“전과 비교해서.”
남자가 재빨리 단서를 붙였다.
아무리 집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왔다고 해도,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떻게 처리하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도널드덕이 그렇게 싫으세요.”
“――?”
남자가 말없이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아까 내가 입고 있던 옷에 도널드덕이 그려져 있던 부근을 가리켰다.
“아, 그거.”
남자가 불쾌한 것을 떠올린다는 얼굴을 하고 말을 이었다.
“싫다.”
단호해서 좋군 그래.
“앞으로는 계속 그런 차림이었으면 하는데.”
“전 양복 없어요.”
입고 앉아 있기도 황송한 브랜드의 양복을 내가 무슨 수로 갖고 있단 말인가! 도널드덕 잠옷을 입고 온 죄로, 단정한 양복으로 갈아입혀진 내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여기 있는 옷으로 갈아입어.”
“제가 지금 무슨……!”
“계속해.”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생각 같아선 상 위로 뛰어 올라가 그대로 남자의 입에서 담배를 가로채서 버럭 소리질러 버리고 싶다.
“수업 중에는 금연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고급 레스토랑도 아니고 왜 정장을 입고 일을 해요!”
얼라라. 그런데 왜 내가 상 위에서 담배를 손에 들고 있는 거지.
“……방금 나 입 밖으로 그거 말해 버렸어요?”
“…….”
남자가 말없이 노려보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큰일이다. 자취하면서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게 하는 이상한 병으로 이르고 말았구나.
“그렇다면 선생 네 말대로 담배는 피우지 않도록 하지.”
“…….”
선생님 말이면 선생님 말이고, 네 말이면 네 말이지 선생 네 말은 또 뭐냐.
“대신 너도 정장을 고수해.”
“그……!”
“계속해.”
“……알겠습니다.”
책상 안에 고이 모셔둔 푸른색 백만 원짜리 수표를 떠올리며, 두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그럼 이제 책상에서 내려가서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지.”
“예.”
주춤주춤 책상에서 내려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미닫이문을 통째로 뜯어낸 구조의 방이었기 때문에 밖에 앉아 있던 시커먼 남자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안에는 연민과 동정, 그리고 잔인한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럼 언어부터 먼저 할게요. 수능 준비를 위주로 하면 되는 거죠?”
“그래.”
저런 인간이 수능을 봐서 어떤 대학에 들어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그 대학 신입생들과 재학생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다.
“일단 시부터 할게요. 첫 장에 나와 있는 시를 한번 읽어 보세요.”
공무도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막내.”
“네, 형님.”
멀찌감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꼬마 녀석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읽어.”
“네! 알겠습니다.”
“잠깐만요!”
황송하다는 얼굴로 책을 받아들어 막 시를 읽으려던 꼬마를 제지하고 나섰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왜 이 녀석한테 이걸 읽으라고 해요?”
“뭐? 이 녀석? 야! 너 몇 살인데 나한테 반말이야!”
“너보다 많겠지! 아무튼 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대답은 이쪽이 해야지.”
책상 상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외쳤다.
“무슨 대답?”
끔찍할 정도로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제가 시를 읽으라고 한 건……, 너 이름이 뭐였지?”
꼬마 녀석이 황당하단 얼굴로 대답했다.
“김유수.”
“그래. 김유수 씨한테가 아니고, 그쪽이라고요.”
“한 번 들으면 외워 버리니까 상관없어.”
“―――!”
“막내 읽어.”
“네! 형님.”
“그 말 진짜죠?”
“뭐가?”
“한 번 들으면 외운다는 말이요. 오늘 끝나고 시험 볼 겁니다.”
천하의 영재 소리를 듣던 나도, 한 번 듣고 외우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거늘.
“마음대로.”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럼 네가 여기부터 읽어 봐.”
수업 끝나고 재수 없는 저 고추맛 아이스크림 같은 자식의 자존심을 박살내 줄 상상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손가락으로 공무도하가의 제목을 가리키며 꼬마를 돌아보았다. 의기양양했던 녀석의 표정이 책을 받아들자마자 단번에 굳어졌다.
“뭐해? 안 읽고.”
“고……공무 도하.”
한글로 독음이 적혀 있지 않았나? 몸을 숙여 책을 확인했을 만큼 녀석은 어눌하게 시를 읽어 내려갔다.
“다음 줄 읽어.”
“알았어! 존나 재촉하네. 고……공격도……하.”
“도하가 뉘긴데 그래 공격을 하나?”
“형님도 거참. 나쁜 놈이겠죠, 나쁜 놈!”
맨 뒷줄에 앉아 있던 사투리와 멧돼지가 속닥거렸다.
“똑바로 읽어. 공경도하(公竟渡河)잖아!”
“알아! 갑자기 읽으라니까 헷갈려서 그래!”
“한문 읽지 말고, 옆에 적힌 한글 독음을 읽으란 말이야. 누가 네 한문 실력 시험한대?”
“한문? 뭔 소리 하나? 야는 한문이란 존재 자체를 인식 몬한다 안카나.”
“그래도 한문으로 삼까지는 쓸 수 있어요!”
“사는 못 쓰잖냐. 크하하하하하하!”
멧돼지가 바닥을 구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형님은 쓰실 줄 알아요!”
“뭐?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러는 거야! 4! 넉 사. 사는 이렇게 쓰는 거지.”
“새민아, 그건 죽을 사(死) 자고.”
그새 과일을 씻어 온 흉터 사나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형님은 역시 억수로 유식하다카이!”
“이거 말고 또 무슨 사 자가 있는데요?”
“모르겠는데.”
부스스한 머리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잠시만, 잠시만요. 지금 나누신 대화가 저를 웃기기 위한 하이 테크닉의 농담이라거나 한 건 아니죠?”
“야 뭐라카노? 내 뭔 시간이 나자빠진다고 니를 붙잡고 시덥잖은 농담을 지껄여쌌노.”
“왜? 뭐 문제 있어?”
순식간에 뒷골로 썩은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지금 그걸 진담이라고 한 얘기예요? 한문은 그렇다 치고 한글을 헷갈릴 수 있어요?! 한글을 읽는데 버벅거린다는 게 말이 돼요!”
“버, 버벅거리긴 누가 버벅거렸다고 그래! 갑자기 읽으려니까 헷갈려서 그렇지.”
“그러니까 이게 헷갈릴 만한 부분이냐고! 당신, 미국에서 이십 년 살다가 보름 전에 막 귀국했어? 늑대한테 이십 년 길러지다가 인간 손에 들어온 지 갓 한 달 된 거야?”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돼.”
더벅머리 총각이 손을 들고 말했다.
“그 나이 먹고 한글 못 읽는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묻고 있는 거잖아!”
“이게! 내가 어디가 어떻다고! 누가 한글을 모른다고!”
“그럼 증명해 봐! 증명해 보라고!”
“하면 되잖아!”
연습장을 부욱 찢어서 나누어 주려던 찰나, 멀리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그쪽이 테스트를 받고 있는 거지.”
두목이었다.
“급한 건 당신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니까요. 그쪽이 감기 환자라면 이 사람들은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모르는 응급 환자라고요.”
“야! 너 듣자 듣자 하니까 누가 숨이 끊어져!”
“고마쌔리 다리몽댕이를 콱 뽀샤삘라!”
“죽고 싶냐, 너!”
응급 환자들의 반응이 격렬했다.
“내가 고용한 게 의사였던가.”
……감기 환자 쪽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쪽도…….”
“국도해.”
“네?”
“내 이름이다.”
“예, 그러니까 그쪽도……, 히익!”
볼펜이 일직선으로 날아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국도해라고 알려 줬다.”
젠장, 뭐 저딴 인간이 다 있냐.
“……예, 그럼 국도해 씨도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천치 레벨이라면 기분이 좋진 않을 거잖아요.”
“저게 누구더러 천치래!”
“그럼 지금 당장 「산기슭」 써 봐.”
“…….”
간단하게 봉쇄.
“아무리 직업이 지적인 분야와는 일억 광년 떨어져 있어도 읽기 쓰기는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이라고요. 생필품이라고도 하죠.”
“…….”
국도해 씨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눈을 치뜨며 말했다.
“그럼 어디 한 번 해 봐.”
“예, 잠깐이면 됩니다.”
그렇게 받아쓰기 레슨은 시작되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적으세요.”
일단 초등학교 1학년 수준으로 1번을 장식했다. 시커먼 남자 네 명이 바닥에 엎드려 열심히 연필을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살아생전 다시는 보지 못할 장관이리라.
어라, 가만 왜 네 명이지?
“그쪽은 안 하세요?”
“저는 그냥 넘어가시죠.”
사과를 깎고 있던 흉터 사나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토끼 모양으로 사과를 깎아 내는 솜씨가 눈부실 정도로 능숙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인지…….”
그때 남자가 내 옆으로 다가와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
“됐나요? 부족하시다면…….”
“아니요, 됐어요.”
“관표 행님만 봐주는 게 어딨나! 행님도 어서 엎드리라 안카나!”
“그래요! 불공평하잖아요.”
사투리와 꼬마가 툴툴거리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됐어요. 판단은 선생이 해요. 관표 씨는 사과를 깎으실 거고, 우리는 2번 문제를 받아 적을 거예요. 2번 문제.”
“아따! 거 참말로 성질도 급하네!”
“잠깐만! 잠깐만!”
모두 연필에 침을 묻혀 가며 2번 문제를 준비했다.
“삶의 궁극적 목표는 앎의 자취를 찾아 허심탄회한 고뇌의 발자국을 옮기는 것인데…….”
“크아아악!”
더벅머리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
“젠장! 왜 안 끝나는데! 고마 해라! 많이 묵었다 안카나.”
사투리 씨의 처절한 제지.
“너 자꾸 쌍받침 단어만 부를래! 그거 반칙인 거 모르냐!”
멧돼지의 말도 안 되는 주장.
“쌍받침이 어디 나와요? 새민 형님.”
……다음 문제를 포기하게 만든 꼬마 놈의 한마디.
“심각하군.”
어느새 또 담배를 꼬나문 두목 국도해 씨의 결론.
“그럼 그룹 과외라도 받는 건가요, 하하핫.”
참외를 깎던 왼쪽 눈 밑에 상처를 가진 관표라는 남자의 어이없는 해결책.
“그럼 단돈 이백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지막은 돈에 굶주린 나의 깔끔한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