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수만 가지 상념에 사로잡힌다.
어린 날의 나는 언제나 칭찬과 상장 속에서 우쭐대며 자라났다.
신동!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동네의 자랑거리였던 나는 중·고등학교를 읍에서 나와 군으로 통학을 했고, 군장님까지 내 이름을 외웠을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고추 농사를 하시는 부모님은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뒷바라지해 주셨고, 나는 그토록 원하던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든 아, 하고 알아주는 명문대 법대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또 즐겼다. 끔찍한 학점과 계속 떨어지기만 하는 고시의 압박 속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모든 일이 바르게 진행될 거라 여겼다.
……아니 그렇게 현실을 도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매섭게 나를 몰아세웠고, 거듭되는 학고와 군 제대 후 굳어진 머리로 인한 사시 낙방이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으니! 빠라바라바바밤!
으아아악, 안 돼. 무심코 혼자 나팔 부는 시늉까지 해 버리고 말았다.
자취 생활을 너무 오래 한 덕분에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진하게 삶에 새겨졌다.
이 버릇도 고쳐야 할 텐데……. 으아악,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딴 위기야 어떻게든 잘 넘어가면 되겠지만, 문제는 이번 여름 동안의 방세를 모두 경마로 날려 버렸다는 사실.
8번 마(馬) 위풍당당이 거기서 갑자기 자빠질 줄 누가 알았냐고! 마권이 휴지조각이 되는 순간, 나의 모든 희망과 꿈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내 꿈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학 생활 내내 당구장과 술집만 오가면서 내 꿈은 이미 죽어 버린 것이다.
일단 방에 있던 가구들과 물건은 친구 놈들에게 여기저기 부탁해 맡기긴 했지만, 차마 나까지 맡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꿈 없는 25세의 덧없는 청춘이여…….
“아따, 총각 겁나게 고아뿐지네잉.”
겁나게 고아뿐지……헉?
“거 어디까지 가요?”
“순……천이요.”
“허헐, 나두 순천까지 가뿐지는데. 고마 반갑구만.”
내 옆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가 목적지가 같다는 사실을 알고, 반갑다는 듯이 이것저것 먹을 것을 꺼내 권했다.
“이것 좀 먹어보랑게. 둘이 묵다 하나 뒈져뿐져도 모를 맛이여.”
“아니요, 괜찮습니다.”
“서울에서 오시오? 말뽄새가 워째 그래쓸까.”
“예, 서울에서 왔습니다.”
딱딱하게 대답하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삶은 계란을 자꾸 먹어 보라고 하는 아주머니와 말동무할 틈이 없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께 완벽한 거짓말을 해서 등록금을 뜯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할 시간도 부족하다.
만약 경마로 이번 학기 등록금을 모두 날린 것을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아버지 성격에 나를 맷돌에 갈아 고추밭에 퇴비 대신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집 근처 호수에 맷돌과 함께 묶어 던질지도.
아아, 왜 내 죽음 옆에는 계속 맷돌이 뒤따르는 것일까. 맷돌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 크아아악! 이게 아니잖아.
재빨리 창에 머리를 박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면 휴학의 원인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허점이 없는 이유와 근거를 대 보도록 하자.
1번. 길을 가다가 소매치기를 만났다. 아니, 말도 안 된다. 은행에서 자동이체하면 끝인데 이딴 이유는 완벽한 내 머리로서 도저히 내놓을 수가 없다.
2번. 잃어버렸다. 크하하하하하, 3백만 원이 액세서리냐. 귀에 걸고 다니다가 잃어버렸다고 할까, 허리에 차고 다니다가 잃어버렸다고 할까? 이 얘기를 하느니 내 머리를 스스로 맷돌에 갈아 버리고 말지.
3번.
“워메, 기사 양반! 차 좀 세워 보시요!”
워메, 기사 양반 차 좀 세워……크헉!
“뭐라고요? 아주머니?”
“아따, 나 시방 싸 버리겠네. 후딱 차 좀 세워 보소!”
내 옆의 아주머니가 팔을 휘두르며 난폭하게 기사 아저씨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연신 먹어댈 때부터 알아봤다!
“어이구―그 아주머니, 성격 한번 급하시네. 조금만 가면 휴게소 나오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허허허.”
마음씨 좋아 보이는 기사 아저씨가 웃으시면서 바로 앞에 보이는 휴게소 표지판을 가리켰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나에게도 잠깐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내 머리도 기름칠을 해 주고 산소를 주입해야 돌아가지.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아주머니는 차가 휴게소에 멈추자마자 화장실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녀가 왜 육상선수를 하지 않았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성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다음, 뭔가 마실 게 없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은색 고급 세단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먼지 하나 안 보일 정도로 반짝반짝하게 광택을 낸 것을 보아하니 오늘 세차를 하고 출동한 것 같았다.
저런 차를 떼로 몰고 다니는 놈들은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
차 안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무리가 우르르 내리는 것을 보고, 숨을 힉 하고 들이마셨다. 한결같이 까칠한 인상에 차가운 분위기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시미칼은 쓰되 생선회는 뜨지 않을 것이요, 나이프를 쓰되 스테이크를 썰진 않을 그런 종자들이겠지. 죄다 비싼 양복에 고급 양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왠지 심사가 뒤틀렸다.
나는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 이 따위로 살고 있는데 저것들은 쌈박질하고 살면서 저런 호사스런 생활을 누리고 있다니. 어찌나 배알이 뒤틀리는지 실제로 배가 아픈 건 아닌가 싶어 오른손으로 아랫배를 슬슬 문질렀다.
쓴 입맛을 다시던 내 앞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나타났다. 달고 차가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는 전 재산 만 원이라는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아이스크림 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점원의 말에 대답을 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누군가 나를 툭 밀쳐 버렸다.
“바닐라! 난 바닐라 주쇼.”
“난 초코.”
“난 딸기!”
우르르 하고 내 앞을 가로막은 무리들 때문에 발끈해서 버럭 소리질렀다.
“이봐요! 지금…….”
“뭐?”
“지금 뭐!?!”
뒤를 돌아보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방금까지 나불거리던 주둥이를 합 하고 다물어 버렸다.
“뭐야, 너.”
“지금 우리한테 한 얘기야?”
우락부락한 덩치들이 험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 아니요.”
“뭐? 크게 말해. 안 들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버럭 외치는 내 주둥아리를 꿰매 버리고 싶다. 바느질을 할 줄 알던가. 못하면 어떠냐. 세탁소에 맡겨 버리면 되지.
“크하핫, 뭐야. 별것도 아닌 놈이. 여기 바닐라 아이스크림 하나 후딱 줘라카이.”
“난 초코.”
“난 딸기. 아이스크림 길이 재 봐서 야박하다 싶으면 우리 섭하니까 알아서 꽉꽉 눌러 줘야 한다, 주인장.”
보통 아이스크림보다 몇 배는 긴 아이스크림의 행렬이 이어졌다. 조폭 놈들의 주문이 끝나길 기다렸던 나는, 10여 분이 지나고 나서야 주문대에 손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주문하실 건가요?”
점원의 표정이 약간 굳어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조폭한테 쫄아서 새치기당해 준 인간은 아이스크림도 먹으면 안 되냐!
“바닐라 아이스크림 더블로 주세요, 시럽도 팍팍!”
오기가 났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엄청 먹어 주겠다 이거야!
아슬아슬하게 높이 올라간 아이스크림 콘을 받아들고 계산을 마쳤다.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혀를 대는 순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주머니 안의 사정은 악화되었지만, 일단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탄 버스로 돌아가기 위해 주차장을 가로질러 오다가 아까 새치기한 무리들의 차가 분명한 세단에 눈이 갔다.
대체 니들은 뭐가 그렇게 잘나서 그렇게 좋은 양복에, 좋은 차에, 나보다 아이스크림도 일찍 처먹을 수 있는 거냐! 니들이 뭔데!
다시 한 번 분노가 울컥 치밀었다. 주변을 한 번 휘 둘러보고 차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옳거니, 기회는 이때다.
발치에 보이는 돌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힘차게 뻥하고 차 주었다. 손가락 마디만한 작은 크기이긴 했지만, 날아간 돌은 관성과 만유인력 등의 합력에 의해 차체에 퍽하고 제법 묵직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발치의 돌을 차서 세단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면서 흐흐흐, 하고 그 모습을 즐거워하던 내 뒤에서 갑자기 살벌한 외침이 꽥하고 날아들었다.
“야! 너, 이 문디 새끼!”
“――――!”
뒤를 돌아볼 것도 없었다.
목소리에 담긴 분노의 아우라는 차와 아주 관련이 깊으며, 거친 인생을 살아왔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그대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저 새끼 잡아라카이! 잡아 족쳐라!”
“너 잡히면 뒈질 줄 알아!”
살벌한 외침들이 들려왔다.
정말 말 그대로 죽을 듯이 달리면서, 대체 어디서부터 내 팔자가 이리 꼬이기 시작한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잘나고 잘나가던 순천 구산리 고추밭집 아들 한봉……아니, 한준.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저주를 받았나? 젠장 빌어먹을! 미치겠네. 저 새끼들은 대체 어디까지 따라오는 거야! 요즘 조폭들은 육상 기록대로 잘라서 지원을 받는 건가. 하나같이 왜 저렇게들 잘 뛰고 지랄이래!
“너, 거기 서! 이 새끼야!”
“진짜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썅!”
뒤를 힐끔 돌아보면서 내가 달릴 수 있는 최대 속력과 지속력, 그리고 저들의 가속도의 상관 그래프를 그리며 몇 초가 지나면 따라 잡히는가에 대한 암울한 계산을 시작했다.
몇 초 혹은 조금 이따가, 라는 좆같은 답이 떨어져 나오자마자 나는 이를 악물고 죽을힘을 다해 저 멀리 보이는 버스를 향해 돌진했다.
일단 저 버스까지만 가면 살 수 있을지도……!
“――――!”
“크악――!”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내게 스치기도 전에, 엄청난 불행이 내 발을 걸어 넘어트렸다.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인간 때문에 나는 달려오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세 바퀴를 굴러 버리고 만 것이다.
더 끔찍한 것은 구른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윽―.”
낮게 신음을 내뱉으며 내 아래서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남자는…….
“워메.”
“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옆으로 살짝 올라간 서늘한 눈매. 얼굴 정중앙에 자리잡은 코는 미술 시간 석고상에서나 봤을 법한 균형미를 지녔고, 입매 역시 단호하면서 우아한 느낌을 주는 보기 좋은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눈이 튀어나올 만큼, 엄청난 미남이었다.
하지만.
“야, 이 새끼! 너 죽었어!”
“거기 그대로 있어! 개새끼야!”
저딴 말들이 나를 향해 있는데, 지금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크억, 죄송하구마잉.”
재빨리 남자의 몸 위에서 일어나며 사과의 말을 던졌다. 평소였으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일으켜 줌이 당연하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이니까 어쩔 수 없지.
“지가 좀 바빠서……나중에, 나중에……은혜 갚을 테니. 나는 이만 후딱 가 보겠소!”
“뭐라고?”
화가 난 것인지, 어이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남자를 그대로 두고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떠나기 직전의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유리창으로 밖을 확인했다. 나를 잡으러 오던 조폭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일으켜 주고 있었다.
“하아……다행이여.”
저 녀석들, 그래도 시민을 도와줄 예의는 갖추고 있구나. 불행 중 다행이다.
“아니,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학생 때문에 10분 넘게 기다렸잖아요.”
“……죄송하당게요.”
기사 아저씨가 투덜거리면서 차를 다시 출발시켰고, 나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워메, 학상 뭐하느라 그리 땀이 범벅이여.”
“아, 아무것도 아니요. 놓칠까 봐 쪼매 달려서 그러지라.”
“워메! 워메! 학상 말투가 어쩜 고로코롬 변한데요잉! 아따 신기하구먼!”
“헉――.”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방금 전 내가 무슨 말을 내뱉은 것인지 재빨리 리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대체 언제부터 사투리를 쓰고 있던 거지! 흥분하면 사투리가 나오는 버릇이 아직도 내 몸 안에 살아 숨쉬고 있던 것인가. 에일리언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이놈의 사투리. 제발 좀 죽어 버려라!
“학상도 순천이 고향인갑제?”
“아닙니다. 서울에서 왔습니다.”
다시 또박또박 서울말을 발음하며 대답했다.
빌어먹을. 내가 사투리 쓰는 버릇을 고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차라리 영어회화가 서울말 회화보다 나에게 쉬웠던 그 시절! 입에 볼펜을 물고 입술이 터질 때까지 표준어를 발음하던 그 시절! 그 시절들을 떠올리면 절대로 사투리를 다시 입에 담을 수는 없는 것이여! 캬악, 아니 없는 것이다!
“이거라도 좀 마셔볼텨?”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아까 마시던 김빠진 사이다를 내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도…….”
아이스크림이 있는걸요, 라고 대답하려던 내 손에는 썰렁하게 남은 콘만 쥐여 있었다.
“크악!”
화들짝 놀라 다시 창밖을 확인했다. 좌우 시력 2.0을 자랑하는 내게 포착된 것은 싸늘한 얼굴을 하고 손수건으로 양복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내는 남자의 모습.
버스가 출발하자 남자의 모습은 몇 입 베어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조금씩 뒤로 멀어졌다.
“……저도…….”
잘나가던 순천 구산리 고추밭집 아들 한준.
“저도……사이다 좋아합니다.”
내 인생과도 같은 김빠진 사이다를 꿀꺽꿀꺽 들이켜며, 인생의 회의를 느끼고 만다.
“워메!”
“워메!”
나를 보자마자 외친 부모님의 첫 마디.
“……안녕들 하셨어요.”
“워메, 네가 여긴 워쩐 일이여. 온다고 전화도 안 넣고.”
“그냥요…….”
“셤도 얼마 안 남은 애가 뭬가 그냥이여. 뭐 사고 친 건 아니겄제?”
뜨끔. 역시 불량 고추는 눈 감고 손끝으로도 골라내는 아버지답게 날카롭다.
“아니, 그 양반 뭔 소리를 그렇게 해싸요. 야가 집에 오고 싶어서 왔겄지, 뭔 놈의 꿍꿍이가 있겄소. 오랜만에 보는 아들한테 그게 할 소리요잉!”
“그러게요. 아버지……제가 무슨 사고를 쳤다고 그러세요.”
오랜만에 왔지만 꿍꿍이가 있는 아들인 내가 대뜸 대답했다.
“설 때 그리 오라고 전화를 때려도 공부 땜시 바쁘다고 안 오더니, 갑자기 나타나니까 내가 그러제. 어디 우리 봉팔이 얼굴 한번 보자.”
“거! 내가 고로코럼 부르지 말라고……!”
혀를 잘근 깨물었다. 이 불치병 같은 사투리.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버지.”
“아니 봉팔이가 우때서. 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아니여! 거가 워디가 워떻다고 그러능겨!”
“이름 바꿨잖아요. 준! 준! 제 이름은 준입니다, 아버지!”
“내 보기에 준이나 봉팔이나 오십보백보구만, 뭐 땀시 그러는지 몰겠구만.”
준과 봉팔이라는 이름이 비슷하다는 어머니의 센스에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튼 봉팔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제부터 절대!”
나의 엘레강스하고 럭셔리한 이미지와 백억 광년 떨어진 봉팔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명 신청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얼마나 피나는 고생을 했는데!
“하이고, 사내새끼가 깨탈스럽게 굴기는. 그랴―알았응게, 봉팔이 밥은 묵었냐?”
“봉팔이 아니라니까요!”
“그랴, 밥은 묵었제?”
“……아직이요.”
“뭐하느라 여태 밥도 못 얻어먹고 댕겨. 후딱 씻고 오랑게. 내 금방 밥 지어 줄 텡게.”
“예, 알겠어요.”
“잠깐!”
아버지의 굵직하고 거친 손이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순간 심장이 덜컹하고 흔들렸다.
“예?”
방금 대답한 목소리가 너무 높았다. 레 정도가 적당한데, 파로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태양 아래서 강인하게 타오르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짐이 워째 그리 큰 겨? 며칠 묵고 갈라고?”
“예, 좀 지내다 가려고요.”
“아따메! 잘 생각했당게! 온 김에 기냥 여서 푸욱 지내다 가라잉. 공부하느라고 힘들었을 텐디, 잘됐제!”
어머니가 활짝 웃으시며 반갑게 내 등을 떠밀었다.
“그려. 공부도 좋고, 셤도 좋지만 몸 생각을 해야제. 코에 바람 넉넉하게 집어넣고 가야제. 너무 앞만 보고 가면 엎프라진당게!”
아버지 역시 웃으시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며칠간 느꼈던 위기감과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사라져 갔다.
그래, 작전은 일단 뒤로 해 두고 얼마간 푸욱 쉬면서 지친 내 영혼을 달래 보자. 이 아름다운 태양과 촉촉한 호수의 공기를 마시면, 나의 영혼도 금세 포동포동 살이 찔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운 나의 집이여!
……안녕.
“허구헌날 흘릉할릉 방구석에 처박혀서 뭐하고 있능겨!”
그리운 집이여, 안녕.
집으로 돌아온 지 정확히 일주일 만에, 어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제가 뭘요.”
재빨리 베개 아래에 넣어두었던 헌법 책을 펼치며 대답했다.
“……봉팔아.”
밭에 나가려고 신발을 신던 아버지가 내 모습을 보며 쓸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봉팔이 아니라니까요!”
“책 거꾸로 집었다.”
“―――!”
놀라서, 후다닥 책을 바로 들었다.
“닌장맞을 지럴 그만허고, 싸게 일어나라잉!”
“아우, 일어나서 뭐하라고요. 할 것도 없어 심심해 죽겠는데!”
대학 생활 동안 몸에 독처럼 퍼진 게으름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인터넷도 없는 시골에 와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밥을 먹고 자다가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뿐이었다.
가끔은 공부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 책도 읽었지만, 펼치면 1분도 지나지 않아 수면 상태에 돌입했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이토록 오래 집에 머물러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게을러진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심심하면 밭에 가야제.”
“네에?? 뭐라고요?”
“밭에 가라고 했응게 얼릉 일어나.”
“저보고 지금……, 밭에 나가서 일을 하라고요?”
“왜? 내가 뭐 허믄 안 되는 말 했냐?”
고추밭집 외동아들 한봉, 아니 한준, 금이야 옥이야 길러져 그동안 손에 흙 알갱이 하나 안 묻히고 자라왔건만. 대학 졸업하고 사시 준비한다는 나에게 어머니는 밭일을 권장하다니. 내 어찌 이런 수모를 겪으며 목숨을 보전하리오!
“지금, 어머니 저,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세요?”
“그럼 니헌테 허지. 내가 누구한테 하겄냐. 씨언허게 일어나서 후딱 나가라잉.”
“고추를 따라고요?!”
“아, 그럼 고추를 따제, 감자라도 캐게? 시부렁거리지 말고 얼릉 인나!”
구슬픈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자, 아버지는 말없이 커다란 소쿠리를 가져와 내게 건네주었다.
“여 그득 채워오라잉.”
“……아버지.”
“뭐혀. 싸게 안 가고.”
“한 번도 고추를 따 본 적도 없는데 어떤 걸 따라는 거예요!”
“네놈 다리 밑에 달린 것마냥, 풋내 나는 놈들 따 오는 거제. 뭐 별거 있남.”
어머니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
캬아아악!
“워따메, 뭔 말을 그렇게 했쌌소. 그래도 봉팔이도 올해면 스물다섯인디.”
아버지 파이팅!
“옆 동네 맹구는 일찍이 색시 데려다가 벌써 애가 둘인디, 쟈는 색시는커녕 색시꽁맹이도 한 번 안 델쿠 왔응게 그게 풋고추지 뭐겄어!”
“크하하핫, 또 듣고 보니 그렀네! 크허허허헛!”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바닥을 치며 신나게 웃어 버리고 만다.
“에잇!”
소쿠리를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낄낄거리고 웃던 어머니가 뭔가 휙하니 던져 주었다.
“뭐예요.”
“수건 메구 해라잉. 니는 워째 생겨먹은 애가 살이 타는 게 아니고 빨갛게 익어 버링게, 그걸로 댄댄히 쫌매고 해야제.”
“이, 이걸요!?!”
“이렇게 이렇게 쫌매는 기다.”
아버지가 옆에서 진지한 얼굴로 시범까지 보여주며 설명해 주었다. 그 자리에 있다가는 어머니의 몸뻬 바지까지 착의당할 것 같아 후다닥 나와 버렸다.
밭이랑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끝없이 펼쳐진 고추밭이 나를 반겼다.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고추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내키는 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주변을 살펴도, 어느 놈을 따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풋고추를 따라고 했지? 가만있어 보자.”
일단 푸르스름한 놈들 중에 통통한 것을 하나 집어 톡, 하고 뽑아냈다.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맡아 보았지만 뭐가 어떤 것인지는 여전히 구분되지 않았다.
“……먹어 봐야 하나.”
고추 끝을 살짝 입 끝에 대고 깨물어 보았다. 와삭하는 소리와 함께 풋내가 입으로 밀려들어왔다.
“……음…….”
조금 우물거렸다가, 혀끝을 자극하는 화끈함에 입에 있던 것을 뱉어 버리고 말았다.
“퉤퉤―! 으아아악!”
아주 잠깐 머물렀을 뿐인데 입 안이 벌에 쏘인 것처럼 얼얼했다. 자기가 키운 고추가 국내 최고로 매울 것이라고 자부하던 어머니의 말이 허풍이 아니었다. 수차례 침을 뱉고 수건으로 혀를 닦았지만,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맵다. 아, 젠장…….”
맵지 않은 풋고추를 찾아내야 하는 것인데 첫번부터 죽을 만큼 매운 고추를 찾아냈으니, 소쿠리 가득이라는 미션이 내게는 너무도 심난했다.
시퍼러딩딩한 고추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고추밭이 지뢰밭 같아 보였다. 군대에서도 행정병으로 우아하게 타자만 치던 내가, 지뢰 따위를 제거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에라, 모르겠다.”
정말 닥치는 대로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뽑았다. 그렇게 고추를 채취하자 눈 깜짝할 사이에 커다란 소쿠리가 가득 찼다. 고추 소쿠리를 나무 아래에 던져 버리고, 바지를 툭툭 턴 후에 밭을 탈출했다. 오랜만에 호수나 보며 바람이나 쐴까 하고 걷던 중에 낯선 한옥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누구네 집이지?”
처음 보는 으리으리한 집을 바라보며, 누가 이사왔다던가 하는 얘기가 있었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끔찍할 정도로 좋은 기억력의 소유자인 내 머리에 이 집의 소유주에 관한 정보는 주입된 적이 없었다.
“거 참……. 크네.”
댐을 건설하고 난 이후, 도로를 낀 곳에 숙박업소나 매운탕집이 생겨나긴 했지만 이런 후미진 곳에 저렇게 큰 집이 세워졌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별장이라기엔 집이 너무 고풍스럽고, 그렇다고 사가라고 하기엔 규모가 지나치게 컸다. 이런 호수 끄트머리 깡촌에 민박집을 지었을 리도 없고.
“진짜 사람 사는 집인가?”
발끝을 들어 올려 담 안쪽을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황금 송아지라도 키우는 건지 겹겹이 둘러싸인 담장은 사람의 접근을 일체 막고 있었다.
몇 번 기웃거리다가 염탐을 포기하고, 호수가로 발길을 돌렸다. 집에 처박혀 운동을 거의 하지 않으며 지냈던 터라 다리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서울과는 다른 깨끗한 공기가 기분 좋게 나를 호수로 이끌었다.
어렸을 적과 조금의 변화도 없는 길을 걸으며, 어울리지 않는 상념에 젖어 들었다. 가끔 머리가 아프면 바람을 쐬러 갔었던 장소가 떠올랐다. 원체 몇 가구 살지 않는 마을이었지만, 그곳은 호수 안쪽에 있는 숲길에서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만의 비밀스런 공간이라는 유치한 소유욕으로 의자나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가져다 두곤 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해가 호수에 잠겨 온통 붉게 풀어질 때까지 그곳에 앉아 있곤 했던 과거의 모습도 저절로 떠올랐다.
그래, 일단 그곳에 가서 고추 냄새에 질식할 것 같은 나의 심신을 달래자.
목표가 생기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성격상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숲을 가로질러 한참을 걷고 나자 비밀 장소가 있는 언덕에 도착했다.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래, 이거야. 살랑거리는 바람,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우거진 나무, 언덕 아래로 펼쳐진 반짝이는 호수와 우뚝 서 있는 시커먼 양복의 남자……, 으엑? 남자?!?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앞에 있는 존재를 확인했다.
남자였다. 장신의, 검은색 양복을 입은, 그것도 엄청난 미남인……히익!
“――!”
“――.”
눈이 마주치자 놀란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뒷걸음치다 발을 헛디뎠을 정도니까.
“그……저…….”
너무도 놀라워서, 입 안에 맴도는 말들이 단어로 나오질 못했다.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참 나를 노려보더니, 이윽고 한마디를 던졌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이라고 대답했다간 한 대 처맞을 분위기다.
어째서 휴게소에서 부딪혀 양복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두고 온 상대가 내 눈앞에 서 있는 것일까.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사투리로 감탄사를 날렸을 만큼, 여전히 엄청난 외모였다. 깊게 그늘진 눈매는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오싹하다 못해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냉정해 보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이 봤다면, 주저 없이 신성비례(神聖比例)라고 외쳤을 완벽한 비율의 콧대와 입술 모양은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밥맛.
“하하, 자주 보네요.”
안 돼! 방금 전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안 그래도 살벌해 보이는 얼굴에 단번에 날카로운 기운이 어린다. 이러다 뒈지게 맞고 호수에 거꾸로 처박힐 수도 있다.
“아, 그……저기, 양복……괜찮아요?”
“…….”
씨입. 양복의 안부를 묻자 이번엔 주변 공기가 흔들린다. 한여름에 호수의 물이 쩍쩍 얼어붙을 것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 머리를 굴리자. 힘내라, 전두엽!
“저어……고, 고추 좋아해요?”
밭에서 일을 하다 주머니에 몇 개 집어넣은 고추를 불쑥 내밀며 던진 한마디.
“…….”
머리 위로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들어 천둥번개를 치고, 거센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수영을 할 수 있다면 이대로 호수에 뛰어들어, 호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을 텐데.
“드, 드실래요? 맛있는데!”
최대한 상큼한 표정을 지으며 한입 덥석 베어 먹었다. 그러나 몇 번 씹지 못하고, 순식간에 입속 가득 퍼지는 불기운에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고추를 뱉어 버리고 말았다.
“크아악―. 퉤에, 카악, 퉤퉤!”
“…….”
“……생각보다 맵네.”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지금, 놀리는 건가.”
침묵을 고수하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겨울의 새벽 호숫가에 깔리는 차가운 안개 같은 목소리. 명확한 저음이 내 심장에 직격으로 내리꽂히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아니……요.”
나 같아도 안 믿겠다.
“그럼 시비 거는 건가.”
“그것도……아닌데요.”
……이것도 안 믿지.
“그럼 뭔데.”
“…….”
자아, 힘내라, 뇌야. 일단 우리집이 고추밭 농사를 한다는 것부터 말해야 하나, 아니 그날 왜 부딪히고 도망쳐야 했나를, 아니아니 왜 그 휴게소에 있었나부터……, 그렇다면 위풍당당이 어떻게 졌는지부터 설명해야……, 크악, 어떻게 해! 다가오지 마!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커억―!”
남자가 내 멱살을 그러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이 살벌한 상황 속에서도 얼굴 하난 끝내주게 생겼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럴 때만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는 나의 전두엽을 교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답이 없다는 것은 긍정으로 간주하지.”
“예에??”
그게 아니라고 항변할 틈도 주지 않고 남자는 그대로 나를 호수 안쪽으로 던져 버렸다.
촤아악――!
거센 물보라와 함께 입수에 성공한 나.
하지만 생존에는 실패하고 있었다.
“아푸우―! 푸하―!”
발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엄청난 중력이 작용하듯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과학시간에 그렇게 열심히 계산했던 부력 같은 건 소용없었다. 애초에 그딴 건 작용하지 않는다는 듯 내 몸은 아래로, 아래로 계속 곤두박질쳤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뭍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뚱이는 깊은 곳으로 떠내려갈 뿐이었다.
호흡이 가물어지면서 정신이 까무룩 흐트러질 무렵.
멀리 강가에 서 있음에도 얼굴선이 단번에 들어올 만큼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냉정한 표정조차 근사해 보이는 그 남자를 보며 아이스크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가우면서도 달콤한.
아아, 당신 양복 위에 놓고 온 그 바닐라 아이스크림 맛있었나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떠올리던 나의 뇌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뜬 건 한밤중이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내 앞의 어둠이 실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캄캄한 밤이었다.
살아 있음을 확인한 후, 가장 먼저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이곳이 어디인지 추측을 시작했다. 일단 집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공기의 흐름을 봐서 우리집치고는 천장이 터무니없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르겠다.
우리집 말고 내가 누워 있을 곳이 어디 있겠는가. 호수 속에 용궁이 있다면 모를까. 용궁치고는 너무 조용하고, 정결한 분위기인데.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사이 어둠에 익숙해진 덕분에 주변의 윤곽들이 어슴푸레 보이기 시작했다.
문의 모양을 보니 한옥인 거 같은데, 우리 동네 근처에 이렇게 깨끗한 한옥이 있었던가? 황씨 아저씨네 집이 사 년 전에 공사를 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문을 더듬다가 살며시 힘을 주었다. 조금씩 열리는 문틈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고급 목재로 깔린 나무 복도가 보였다.
……내가 알기로 우리 동네에 저렇게 고급 복도를 깔 수 있을 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이 없단 말이지.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밖을 내다보았지만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마치자마자, 누군가 방 쪽으로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히익―.”
뭔지 모르겠지만 숨어야 한다는 본능이 나를 다시 방 안으로 구겨 넣게 만들었다. 누웠던 자리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쓴 후 숨을 죽이고, 발소리의 상대가 무사히 복도를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그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왔다.
자는 척하는 거다, 자는 척.
애써 숨을 고르게 내쉬며, 열심히 자는 연기에 몰두했다.
“깬 거 알고 있다.”
“…….”
“일어나.”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강둑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표정에서 1g의 변화도 없는 얼굴로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아……, 또 보네요.”
이 남자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1초도 안 돼서 후회하게 만드는 굉장한 힘을 지닌 듯하다.
“깼으면 가.”
아무래도 나를 강에서 건져, 이곳으로 옮겨준 모양이다. 이 집의 정체도 자연스레 풀리는 순간이었다. 깼으면 집에 가야지, 했다가 문득 나를 강으로 던져 버린 게 저놈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화가 불끈 치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어 몸을 빙글 돌려 저기요, 하고 말을 꺼냈다.
“저기……, 있잖아요.”
몸을 돌리자마자, 맞닥트린 살벌할 얼굴을 보고 다시 한 번 이 남자의 능력을 실감했다.
젠장, 입 열지 말 걸.
“뭐가 있는데.”
“아니, 저기 그러니까……, 하하.”
내게 있는 건 시간과 머리, 그리고 이 남자에게 있는 것은 살벌함과 얼굴인가. 크윽, 이대로 말했다간 다시 호수로 끌려가서 던져질 게 뻔하다.
“그러니까 음…….”
남자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뭐, 뭐가 있을까요?”
“…….”
갑자기 퀴즈 시간으로 돌변하자, 남자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하게 변했다. 오늘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으면 어머니께 바느질이라도 배워 두자. 입을 꿰매 두게.
“……가겠습니다.”
“처음으로 옳은 말을 한 거 같군.”
확인사살을 해 줄 필요는 없는데, 생각보다 친절하군 그래.
복도를 걸어 신발이 놓인 곳으로 내려왔다.
“저기요.”
“왜.”
대답과 동시에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남자가 대답했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깨끗해 보이는 인간은 또 처음이구나.
“저기, 보통 젓가락이나 장갑, 양말 등은 짝을 지어 다니지 않나요?”
“아까 그 얼빠진 질문의 연속인가?”
“……연속쯤이라고 해 두죠.”
“대답은 예스.”
“신발은?”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남자가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지금 상황이 어떤 건데요?”
“구해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
매몰찬 대답이 들려왔다.
당신이 집어던진 거잖아! 라고 외칠 용기가 있었으면 애초에 순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은행을 털었겠지.
“죄송합니다만.”
운을 띄우자마자, 남자가 담배 연기를 내 쪽으로 훅하고 내뿜으며 사정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시끄러우니까 입 닥치라는 거군.
하지만 거기에 굴할 내가 아니다.
“신발 한 켤레만 빌릴 수 있을까요. 집으로 가서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
“정 그러시다면 한 짝이라도.”
비굴하게 보이겠지만, 나로서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신발 한 짝만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간단 말인가.
“맞는 것이 있다면, 마음대로.”
짧은 허락이 내려졌다. 저 더러운 성질머리에 도로 말을 바꿀까 싶어, 신발장을 후다닥 열어젖혔다. 구두의 가죽 냄새가 훅하고 풍겼다.
그나저나 무슨 놈의 신발이 이렇게도 많냐. 사이즈랑 디자인도 제각각인 걸 봐선 모두 다른 주인을 모시는 신발들 같은데. 자아, 어디 보자. 나한테 맞는 신발이 어디 있을까나.
신발장을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훑어 내려갔지만 내 발에 맞는 사이즈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게 없는가 보군.”
캬악! 저 더러운 성깔머리!
남자가 신발장을 닫으려는 바람에 재빨리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신발이나 집어 들어 쾌활하게 외쳤다.
“이게 좋아요! 이게 딱이야. 이걸로 할게요.”
“그래?”
“하하하핫, 완전 맞춤 신발이네. 딱 맞아, 딱!”
……딱 맞겠지. 내 발이 한 개 반 정도 들어가면.
신발에 발을 넣었지만 신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슬쩍 들어간 느낌 정도랄까? 이 안이라면 발가락들끼리 탱고라도 출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항해 되길.”
“항해?”
남자가 담배를 끼고 있는 손가락으로 내 발을 가리켰다.
즉, 내가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이 보트 같아 보인다고 비꼰 것이다. 그걸 깨닫자마자, 얼굴에 붉은 기가 확 돌았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걸음을 옮겼다.
달그락 하고 발에서 미끄러지는 구두 때문에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그래도 절대 약한 모습 보여선 안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달그락―. 지익―. 달그락―. 지익―.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음향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열심히 발을 끌고 있는데 대문 쪽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발장 안의 신발 주인들이 오는 건가 싶어 고개를 내밀어 문 밖을 확인했다.
“히익―!”
내 눈을 의심하고 싶었지만, 좌우 시력 2.0의 기록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시력 자랑은 나중에 하고, 일단 몸을 숨겨야 한다는 결론이 전두엽을 통해, 두정엽, 측두엽까지 전해졌다.
왜 저 인간들이 여기에 있는지는 나중에 생각해내도 좋으니 빨리 도망을……컥.
“――.”
“――!”
제기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내가 그랬듯이 그들도 나를 단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어라, 저놈…….”
“야! 너!”
신발 따윈 이제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번에는 나왔던 길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본 휴게소의 조폭 무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야! 너 문디 새끼! 거기 안 서나!”
“거기 안 서면 네가 위험해진다! 빨리 서!”
“야, 인마! 너 좋은 말 할 때 서라!”
대체 거기 서! 라고 외치면 누가 선다는 거냐. 왜 하나같이 뒤쫓는 사람들은 창의성 없이 저딴 먹히지도 않을 말들을 내뱉는 것일까.
후다닥 달려서, 나무 복도를 향해 돌진했다.
“……?”
아직 복도를 걸어가며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 남자의 모습이 들어오자, 반가움에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았다.
“살려주세요!”
복도까지 쫓아왔는지 조폭들의 살벌한 발소리가 바짝 등뒤로 다가왔다. 여기서 잡혔다간 호수에 던져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대로 남자에게 달려들어 몸을 날렸다.
“살려주세요! 빨리 도망가야 해요! 빨리!”
남자의 팔을 붙들고 잡아당기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그래도 싸가지 없는 이 인간이라도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야! 너 거기 안……, 히익.”
“이 자식, 진짜……, 컥!”
“시상에!”
“……저거……저거…….”
쫓아오던 남자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이건 또 뭔 조화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모두 창백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는 대치 상태였다.
“아니, 왜들 저러……컥!”
무심코 시선을 위로 올렸던 나는 보고 말았다.
남극의 빙하도, 북극의 빙산도 따라올 수 없는 냉기를 내뿜으며 나를 노려보는 남자의 얼굴을.
“딱 한마디만 하지.”
표정만큼 살벌한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들고 있던 담배를 장식장에 놓인 재떨이에 비빈 후에 그가, 천천히 내 손을 잡아 떼어냈다.
“함부로 내 몸에는 손을, 대지 마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날아든 무쇠 같은 주먹은, 나에게 두 번째 페이드아웃을 안겨 주었다.
정정한다.
달콤하고 차가워?
팔뚝에 좀 매달렸다고 펀치를 날려 상대를 기절시키는 저 인간이 아이스크림이라면, 그 맛은 토할 만큼 매운 고추맛일 것이다.
고추맛 아이스크림.
세기의 획기적인 발명품이 되리.
“거참 말도 더럽게 안 들어요.”
“그러게나 말이야. 형님 있는 쪽으로 냅다 달려갈 때부터 알아봤다.”
“아야야, 살살 좀 해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소독약을 바른 약솜을 내 뺨에 사정없이 꾸욱 눌렀다.
“으아아악! 살살 하라니까 왜 이래요!”
“……겁이 없는 건지, 개념이 없는 건지.”
“개념 없는 건 그쪽 형님이겠죠. 사람을 호수에 던져 버리질 않나, 냅다 후려패질 않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그 싸가지 없고, 살벌하고, 성격 더러운 인간이 이 검은 양복 무리들의 우두머리, 소위 형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뒤로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정상인이라고 하기에 심각할 정도로 부담스러운 그 살기는 ‘형님’이란 단어로 모두 설명되었다.
“이 녀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지금 이 정도로 끝난 게 얼마나 다행인 줄 아냐?”
“다행이라는 단어를 이런 경우에 쓰는 겁니까?”
시퍼렇게 멍이 들다 못해, 피가 맺힌 눈가를 거울로 들여다보며 버럭 소리질렀다. 처음에는 보자마자 도망쳤을 만큼 무서웠던 조폭 아저씨가 내 얼굴에 약을 발라 주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보다 보니 익숙해져서 버럭버럭 말대답까지 하게 되는 나의 적응력에 브라보.
“쪼끄만 게 진짜 시끄럽네. 너 죽다 살아난 거야. 어떻게 감히 도해 형님 양복에 아이스크림을 묻혀 놓고, 게다가 팔에 매달리기까지 하고 살 생각을 하는 거냐!”
검은색 양복 무리에 파묻혀 있던, 말 그대로 쪼끄만 놈이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뭐? 쪼, 쪼그맣다고?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냐? 그러는 그쪽은?”
덩치들 사이에서 유난히 더 작아 보이는 그 녀석이 나의 말에 발끈해서 소리쳤다.
“뭐? 내가 작다고?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너 죽어 볼래!”
“크하하하하, 막내 열받았다.”
“유수야, 내 생각에도 네 입에서 키 얘기 나오는 건 좀 그런기라.”
“형님! 지금 누구 편을 드시는 겁니까!”
“야야, 아그야. 입은 문드러져도 말은 바로 하라 안 카나.”
“형님!”
“푸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핫!”
모두 웃기에 바빴다. 막내로 보이는 유수라는 사람은 얼굴이 금세 시뻘게져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마,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고는 오늘 처음 본 조폭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함께 웃고 있는 나를 째릿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너 두고 보자.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방 안으로 들어가는 유수라는 녀석을 보고 모두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웃기네, 진짜.”
“웃고 있을 때가 아니지요. 유수 말이 농담은 아니니까.”
“에비, 내가 아무리 그래도 저 녀석보다는 클 텐데요.”
“키 얘기 말고, 아따 이 녀석 진짜 쪼끄만 게 간땡이가 부었다카이. 니 유수 말대로 오늘 살아 있는 게 하늘의 은덕인 줄 알아라.”
약을 발라 주던 남자가 반창고를 붙여 준 뒤,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우이―씨. 이 꼴을 해서 어떻게 집에 가. 어머니가 보시면 뒤집어질 텐데. 그나저나 아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죽을 뻔했다니요?”
크게 붙은 반창고를 둘러보면서, 눈 밑에 길게 흉터가 있는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살벌해 보이긴 했지만, 그나마 제일 말이 통할 것 같은 상대였다.
“며칠 전에 휴게소에서 형님하고 부딪히셨죠?”
“예? 에……, 그게 갑자기 추격전 모드로 변해서.”
“아, 맞다. 그때 생각하니 아직도 열받네! 너 그렇게 가고 우리가 도해 형님께 죽을 뻔했다고!”
“그러게 누가 새치기하래요!”
“새치기?”
“……아이스크림 먹을 때 했잖아요, 쳇.”
“뭐라카노. 너 지금 그러면 그때 우리 차에 돌 집어던진 게 그놈의 아이스크림 때문에 그랬다는 기가?”
“…….”
침묵으로써 긍정했다.
“푸하하하하하. 이 녀석, 생긴 건 얌전하게 생겨서 진짜 골 때리네.”
“하하하핫, 그러게.”
덩치가 멧돼지만한 녀석과 머리가 부스스한 녀석이 낄낄거리며 나를 비웃었다.
“아니, 내가 뭘요. 그렇게 치면 그깟 아이스크림 좀 양복에 묻혔다고 호수에 던지는 그쪽 형님은 어떤데요? 완전 골을 때리다 못해 박살을 내는 거 아닌가요?”
“……도해 형님 얘기는 거기서 나오면 안 되는 거지요.”
“……형님이랑 왜 너랑 비교를 하냐.”
“……미쳤어.”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갑자기 다들 정색하는 것을 보고, 궁금증이 커졌다.
“왜요? 그 사람이 뭔데 그렇게 특별해요.”
“……뭐 모르는 게 약인기라.”
“왜요? 뭐가요?”
“아무튼, 당분간 이 동네에서 머물러야 하니 마주치게 될 것 같아 말씀드리죠. 도해 형님은 절대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왜요! 만지면 닳아요?”
“닳지는 않지만 네가 박살나지.”
부스스한 머리의 사내가 긁적거리면서, 대답했다. 어찌나 앞머리가 길고 부스스한지, 눈이 안 보일 정도였다.
“박살이 나다니요?”
“그러니까 그게 몇 년 전이었지?”
“이 년 전이었다카이. 내가 그날 옆에 있었으니 똑똑히 기억한다!”
회상이 갑자기 흑백 장면으로 펼쳐졌다.
그날은 흑건파와 해서파가 만나 그간의 충돌을 씻고, 새로운 화합을 도모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흑건파의 보스 강대길과 해서파의 보스 정만철이 참석하는 자리인 만큼 주변 경계가 살벌하다 싶을 정도로 삼엄했고, 모두 바짝 긴장해 있었다.
엄청난 덩치의 남자들이 수십 명 들어가도 넉넉해 보이는 커다란 룸에, 흑건파와 해서파의 중요한 간부들이 앉아 있었다.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날카로운 긴장이 이어졌다.
흑건파의 보스 강대길 옆에 앉은 국도해만이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잠깐, 잠깐! 왜 이 장면에서 차를 마셔요? 보통 술을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형님은 원래 차를 즐겨 마시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차나무에 처음 싹이 났을 때 채취한 잎으로만 만든 최고급 왕하이산 녹차밖에 안 마시지.”
“……그게 뭔데.”
“아무튼, 형님은 밖에 나가서 함부로 음식을 입에 안 대신다고! 말 가로막지 말고 계속 들어!”
멧돼지같이 생긴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의 궁금증을 잘라냈다.
“오랜만입니다.”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정만철과 강대길이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총을 겨누던 사이였기 때문에 이러한 제스처마저도 주변 사람들에겐 조심스러웠다.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이제야 자리를 만들게 되는군요.”
“허허허, 제가 먼저 정 사장님을 초대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습니다.”
두 남자의 말대로 늦은 만남이었다. 그간 흘린 피가 많았기 때문에, 오늘의 자리는 더욱 중요했다.
“국도해 씨도 오랜만일세. 그간 별고 없었나.”
“네.”
정만철의 인사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하는 남자가 바로 흑건파의 차기 두목으로 지목되고 있는 국도해였다. 이 바닥에서 국도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얘기가 있을 만큼, 유명한 사내였다. 한번 보면 잊지 못할 만큼 수려한 외모만큼이나, 그의 실력은 엄청났다. 일처리가 깔끔하고 대담했으며, 정확했기에 강대길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흑건파 조직원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서 국도해는 완벽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견제를 하고 있는 해서파에서조차 그를 은근히 동경하고 있는 자들도 제법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괴팍한 국도해의 성격 탓에 그와 가까워지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소문이 돌았다.
“자네는 여전히 얼굴에서 빛이 나는구먼! 하하하하, 주먹이 아니고 얼굴로 먹고살아도 부자가 됐겠어!”
“하하핫, 저 역시 가끔 도해에게 그런 얘기를 하곤 합니다.”
“얼굴만큼 실력이 있으니, 강 사장님이 도해 씨를 못 놓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지요.”
능구렁이 같은 자식.
백여우 같은 새끼.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 날카로운 전류가 흘렀다.
정만철이 국도해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었다는 소문도 이미 한차례 돌았다. 국도해가 망설임 없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얘기는 부록이었다.
국도해가 움직이면 비등한 두 파의 세력이 큰 흐름을 타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국도해라는 존재는 그만큼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키고, 뺏어야 하는 노른자 같은 사내였다.
“오랜만이다, 국도해.”
해서파 측에 앉아 있던 날카로운 눈매를 한 사내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국도해의 입에서 짧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차를 마시고 있는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네 그 버릇은 아직도 여전한가 보구나. 설마 컵이랑 포크도 준비해 가지고 다니는 건 아니지?”
해서파의 강력한 차기 두목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윤기가 그에게 빈정거렸다. 같이 이 바닥에서 시작한 사이였기에 국도해가 결벽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윤기는 알았다.
“갖고 다녀.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안 될 거야 없지. 그냥 신기하다 이거야. 기집년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쓰던 컵으로는 물도 못 마시고 젓가락질도 못하는 네가.”
“말씀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무례하십니다! 말을 삼가 주십시오.”
국도해의 뒤에 서 있던 무리에서 불쾌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흑건파 내에서 신성불가침 같은 존재였다. 그에 대한 모욕은 흑건파 전체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화합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대놓고 저런 언사를 하는 이윤기의 행동은 흑건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됐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국도해였다.
“내 자리가 아니다.”
국도해의 성격은 괴팍했다. 단순히 성격이 더럽다고 표현하기에는 독특한 구석이 분명히 존재했다. 일단 그의 결벽증은 그를 아는 모두가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그는 타인이 사용한 컵과 식기는 절대 쓰지 않고, 사람과의 일체의 접촉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악수를 하는 일조차 거의 없었다.
그가 타인과 접촉하는 순간은 단 두 가지밖에 없을 거라고 모두들 수군거렸다.
여자와 섹스할 때, 그리고 일을 처리하기 위해 주먹을 쓰는 경우.
그렇다고 여자에게 접근을 허락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주변에 늘 여자가 많았지만 섹스할 때 외에는 어떠한 접촉도 허용하지 않았고, 이를 어긴 상대는 남녀를 막론하고 죽지 않을 만큼 팼다. 어지간해서 화를 내는 법이 없을 만큼 냉철한 성격이었지만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난 일에 관해서는 소름 끼칠 만큼 냉혹하게 분노했다.
그런 국도해가 참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노크 소리가 들린 후에 음식들이 나왔다. 서울의 요정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청하관이란 이름에 걸맞게 모두 정갈하고 먹음직한 음식이었다.
어느 곳을 가든 주방에 따로 메뉴를 전할 만큼, 국도해의 식성은 까다로웠다. 육식은 즐기지 않지만, 생선회는 좋아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신선도가 떨어지면 그는 접시에 젓가락도 갖다 대지 않았다. 음료는 항상 갖고 다니는 차만 마셨다. 샐러드를 내올 때는 얼음과 함께 내와야 했으며, 그 얼음은 무색무취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이것 말고도 수많은 요구 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주방장은 국도해가 오는 날이면 아예 따로 요리를 만들었다. 가져온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국도해를 보며, 이윤기는 다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어휴, 그렇게 깔끔을 떠셔서 공기는 어떻게 마시는지 몰라. 나중에 산소통을 들고 다니는 거 아니야?”
“글쎄.”
국도해는 표정의 변화 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눈앞의 상대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국도해 성격 많이 좋아졌네. 병원 치료라도 받는가 보지?”
뻔히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해서파의 보스는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제안을 단칼에 무시한 국도해를 이윤기가 혼쭐을 내 주길 내심 기대하는 것이다.
“이윤기.”
“왜.”
“말이 너무 많군.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나.”
예상치 못한 국도해의 반격에 이윤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흑건파뿐만 아니라 해서파 진영에서도 억눌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국도해에 대한 이윤기의 집착이 콤플렉스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모두 아는 터다.
“자자, 두 사람만의 자리는 나중에 또 마련하고, 오늘은 즐겁게 마시지.”
그때까지 팔짱만 끼고 앉아 있던 정만철이 너그러운 척 중재에 나섰다. 속이 빤히 보이는 언사였지만, 흑건파의 보스 강대길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워낙 오랜만이라 두 사람 모두 퍽이나 반가웠나 봅니다.”
“모처럼 어렵게 마련한 자리니까 오늘은 편안하게 놀다 가시지요.”
정만철이 웨이터에게 눈짓을 해 보이자 문이 열리고 대기하고 있던 여자들이 들어왔다. 총책임을 맡고 있는 마담이 인사를 하고 여자들을 적절히 자리에 앉혔다. 이윤기와 국도해의 대립 때문에 얼음장처럼 살벌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화사해졌다. 이곳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회원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일을 하는 아가씨들도 엄선해서 뽑았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똑똑하고 말재주까지 있어야 했다. 청하관을 지나간 여자 중에 유명한 연예인도 여럿 있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방에 들어온 여자들이 국도해의 옆모습을 흘깃거리며 쳐다보았다. 다들 이곳에서 일하면서 정재계의 돈 많은 남자들을 많이 상대한 베테랑들이었지만, 국도해는 사뭇 달랐다.
얼굴만 번지르르한 연예인이나, 무게만 잡는 조폭, 거들먹거리는 돈만 많은 재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무엇이 있었다.
오른쪽 눈에만 깊게 진 쌍꺼풀과 유려하게 뻗은 콧날, 보기 좋은 입술 모양은 섹시하다는 단어만으로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냈다.
별것 아닌 행동 하나에 묻어나는 절도와 카리스마가 여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단정하게 맨 넥타이와 흰색 와이셔츠가 금욕적이면서도, 한숨이 나올 만큼 섹시한 매력을 부추겼다.
그렇기에 방에 들어온 여자가 국도해의 모습에 넋을 잃는 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윤기는 다시 배알이 꼴렸다. 그렇다고 대놓고 질투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주먹을 꽈악 쥐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술과 여자, 그리고 남자.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분위기는 저절로 무르익어 갔다. 마담으로부터 방에 들어오기 전에 각별한 주의를 들었던 터라, 국도해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여자는 없었다. 그녀들 모두 그저 조심스럽게 음식을 건네고, 옆에 앉아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국도해가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서 검은색 담배 케이스를 꺼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찰칵―.
달칵―.
탈칵―.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라이터 불이 대령되었다. 주변에 앉은 여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근처에 서 있던 남자들까지 모두 두 손으로 공손하게 라이터에 불을 붙여 내밀고 있었다. 일렁이는 라이터의 불꽃에 그에 대한 연모의 정을 담아.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국도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신의 건너편 이윤기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거기.”
듣기 좋은 명확한 허스키 보이스였다.
“네?”
“불 좀.”
구태여 그녀에게 부탁할 필요 없이 살짝 고개만 돌려도 해결될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이윤기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그것은 지명이나 다름없었다. 룸 안에 있던 모든 여자들이 질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국도해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고 자리를 옮겼다. 이곳의 특징 중 하나가 술을 마시다가도 여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자리를, 즉 다시 말해 모시는 손님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었다.
졸지에 여자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이윤기의 얼굴은 분노로 새하얗게 질렸다. 그 역시 어디서든 빠지는 외모는 절대 아니었다. 제법 말끔한 얼굴 탓에 그에게 목을 매는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국도해라는 존재 앞에서 그는 그 무엇도 내세울 수가 없었다. 싸움 실력도 모두 자신보다는 국도해를 우위에 두고 있는 데다, 묘한 그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래에는 실력파들이 득실거렸다. 게다가 국도해에 대한 사람들의 충성도는 가히 하늘을 찌른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났다.
한마디로, 국도해라는 인간은 이윤기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조차 사람들의 넋을 빼게 만드는 국도해를 노려보며, 이윤기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떻게 해도 이윤기는 국도해를 넘어설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손에는 담배와 다른 한손에는 포크를 든 국도해가 샐러드를 천천히 먹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냐?”
이윤기가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국도해의 접시를 젓가락으로 통통 치며 물었다. 국도해는 대답하지 않고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표정을 본 이윤기의 심술은 극에 달했다. 자신의 젓가락으로 국도해가 먹던 샐러드를 쿠욱 찔러 휘휘 저었다.
“소스가 덜 섞였네. 자아, 먹어 봐.”
“…….”
국도해는 남이 먹던 음식이라면, 일주일을 굶는 한이 있어도 결코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 그의 접시에 손을 대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알고도 이윤기는 젓가락을 접시에 담가 버린 것이었다. 칼부림이 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부드러워졌던 공기가 극도의 긴장감으로 날이 섰다. 상석에 앉아 있던 강대길과 정만철조차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국도해를.
평소보다 조금 굳은 표정으로 국도해는 담배를 입에 가져다 댄 채, 이윤기를 슬쩍 바라보았다.
“손버릇이 좋지 않군.”
“뭐?”
그 후의 상황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천하의 국도해가 다른 사람의 타액이 묻은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먹어 버린 것이다. 천천히 샐러드를 입에 넣고 씹고 있는 그의 모습에, 흑건파뿐만 아니라 시비를 건 장본인 이윤기마저 놀랐다.
“괜찮으십니까.”
뒤에 서 있던 국도해의 보디가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상관없잖아.”
다른 사람들의 경악 어린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샐러드 접시를 말끔히 비워 냈다. 국도해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이윤기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리 때문에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국도해의 성품에 고개가 숙여진 터다. 사적인 감정 때문에 오늘 이 자리의 목적까지 뒤집을 뻔했던,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남자였다.
이윤기는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하하하하, 도해 씨 역시 성격이 호탕하시구만!”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하하하.”
모두 테이블 아래에서 쥐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았다.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다시 왁자지껄해진 분위기 속에서, 모두 즐겁게 잔을 기울이고 술을 마셨다. 국도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와 음식을 번갈아 맛보았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흑건파와 해서파의 길고 지루했던 전쟁에도 종지부를 찍는 날이 오게 되었다.
“저는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그때 시계를 보고 있던 국도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니, 왜 벌써 가시려고?”
“도해, 무슨 일 있나?”
“형님, 조금 더 있다 가시지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도해 씨, 조금 더 있다 가세요. 네?”
모두 일어서려는 국도해를 말리며, 그가 자리에 있어 주길 바랐다.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그럼 이만.”
한번 입에서 뱉은 말은 절대 돌리는 일이 없는 국도해를 아는 흑건파의 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사무실에서 보도록 하자.”
“예, 알겠습니다.”
국도해가 나가려는 것을 보고, 앉아 있던 이윤기가 몸을 일으켰다.
“잘 가라. 다음에 다시 만나서 술이나 마시자.”
오늘 국도해가 보여 준 어른스러운 태도에 그간 쌓여 있던 앙금이 녹은 이윤기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불같은 성격만큼 해금이 빠른 사내였다.
“시간 나면.”
짧게 응수하는 국도해를 보며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친애의 표시로 이윤기가 문 앞에서 나가려던 국도해의 어깨를 두드렸다. 문을 열려던 국도해가 잠시 멈칫하더니 몸을 빙글 돌렸다.
“……정말이지.”
표정이 없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짜증이 묻어났다. 그 이유에 대해 묻기도 전에, 국도해는 이미 이윤기를 벽으로 밀쳐내고 그의 양복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윤기는 칼잡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슨 짓이냐고 외칠 새도 없이 이윤기는 눈앞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번뜩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으아아악!”눈 깜짝할 사이에 왼쪽의 모든 손가락이 한 마디씩 잘려나간 이윤기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꺄아아아아악!”
“크악――――!”
“젠장!”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중에 솟구치는 피와 후드득 떨어져 꿈틀거리는 손가락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좋을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손버릇이 안 좋군.”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피를 뒤집어쓴 국도해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 냈다.
“자, 자네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해서파의 보스인 정만철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국도해의 성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자리에서, 저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도해……자네.”
놀란 것은, 흑건파의 강대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윽―. 이 씨발새끼, 뭐해! 개새끼들아! 내 손가락 주워! 빨리 주우란 말이야!”
이윤기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왼손을 넥타이로 감으며, 국도해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국도해 개새끼,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반드시 널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리고 말겠어! 가만 안 둬! 이 씹새끼야!”
피를 닦아낸 손수건을 휙 하고 던지며 그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두 번은 못 참는다.”
“뭐, 뭐라고!?! 씨발 저 개새끼! 어딜 간다는 거야! 잡아! 잡으라고!”
이윤기가 발악을 하며 소리를 지르자 해서파의 몇 명이 문을 가로막고 섰다.
“비켜.”
권유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투였다.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병원.”
“네?”
“뭐라고!?!”
의외의 대답에 모두 놀라, 국도해를 바라보았다. 병원에 가야 할 상대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놀라서 떨던 여자들은 국도해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피로 얼룩진 흰색 와이셔츠가 그의 위험한 매력을 은근히 부추겼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으로 방 안을 살펴보던 국도해가 다시 한 번 짧게 대답했다.
“위세척하러. 그럼 이만.”
칼날처럼 매서운 그의 결벽증 앞에 그 누구도 막아설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옷깃이라도 닿을까 두려워 모두 주춤주춤 물러서기까지 했다.
아까 전 「상관없으니까」라는 대답은 위세척을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는 얘기였다.
……한마디로 절대로 상관없는 것이 아니었다. 싫은 상대의 손끝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을 모두 잘라 버렸을 만큼.
모두가 얼이 빠져 있는 상황 속에서 국도해는 그렇게 사라졌고, 그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자, 잠깐!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떻게 됐어요?”
“당연하지. 협상 결렬.”
“…….”
“그때 이윤기 녀석 손가락 찾아서 얼음통에 집어넣어 병원에 갔지만, 네 번째 손가락은 끝끝내 못 찾았지 아마.”
“나중에 소파 아래에서 나오긴 했지만, 너무 늦었다고 하던데요.”
“그렇게 찾을 땐 없더니.”
“당연하다카이.”
사투리의 사내가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뭐가 당연해요.”
멧돼지 같은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사투리가 대답했다.
“내가 갖고 있었으니까.”
“으엑?”
“뭐?”
“그걸 네가 어떻게? 그 분위기에서?”
“해서파 새끼들 그거 찾는다고 눈에 불을 켜고 그 지랄을 했는데, 형님이 그걸 어떻게 갖고 있어요! 말도 안 돼.”
멧돼지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사투리 씨가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혀를 가리켰다.
“……입에 물고 있었냐?”
“형님…….”
망할, 상상하니 속이 메슥거려 온다.
“도해 형님을 모욕한 새끼는 그리 당해도 싸다. 내 그 새끼가 얄미시럽게 살살 시비질할 때부터 알아봤다 안카나.”
“…….”
국도해라는 남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에 소름이 돋았다.
“자아, 아그야. 그러니 니가 월매나 운이 좋은지 알 수 있지 않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나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집중되었다.
“……네.”
떨리는 목소리로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어머니가 문을 벌컥 열면서 역정을 내셨다.
“아니, 너는 뭔놈의 아가 따던 고추는 패댕이를 치고 사라져서 한나절이 지나고서 들어오냐! 대체 어딜 갔다온겨!”
“용궁이요.”
“뭐어?”
“농담이에요.”
어머니가 말없이 나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 보았다.
“……뭐하세요.”
“열 있능겨? 너 좀 이상해졌당게.”
부모님이 알고 있는 나는 얌전히 앉아 공부만 하는 모습일 테지. 나도 내가 이딴 인간이란 사실을 대학 생활을 통해 깨달았다. 나라는 인간은 게으르고, 나태하며, 타고난 잘난척쟁이라는 사실 역시 근래에 알았다.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중, 고등 시절.
내 주변에는 풍부한 당근뿐이었다. 기대와 칭찬을 받을수록 우쭐해졌던 나의 콧대와 적당히 해도 차지할 수 있던 일등의 자리. 하지만 대학은 달랐다. 나와 같은 레벨의 인간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고, 나보다 뛰어난 인간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 같은 사람을 지칭하려면 천재가 아닌 범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5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현실로부터 열렬한 도피를 시작했다.
수업은 빠지고, 술 마시고, 경마와 슬롯머신.
“뭔 놈의 혼잣말을 그리 중얼거려. 아따 너 참말로 이상해졌당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심한 사이 또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린 건가.
“그 얼굴의 상처는 또 뭐여. 누가 이 동네에서 우리 귀한 아들 얼굴에 상처를 낸겨?”
“넘어졌어요.”
“워떠케 넘어지면 그러코롬 다친다냐. 거짓부렁도 현실성 있게 하라고 내 누누이 니헌테 이르지 않았었냐?”
“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 줄을 새치기한 조폭 차에 돌을 차다가 딱 걸려서 막 쫓겼었거든요. 그러다 어떤 남자랑 부딪혀서 양복 위에 금쪽같은 아이스크림을 두고 오게 됐어요. 그런데 어제 호숫가에서 그 남자랑 딱 마주친 거예요. 근데 그 남자가 저한테 건방지다고 호수에 거꾸로 집어던지더니,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내가 자기 몸에 매달렸다고 나를 두들겨 팼어요. 아, 물론 그 남자는 저를 뒤쫓던 조폭들의 두목이래요. 얼굴은 잘생겼는데 진짜 재수 없어요.”
숨도 쉬지 않고 순도 100의 진실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풋고추를 다듬으시던 어머니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되물었다.
“그랴, 워디서 넘어졌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