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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96화 (395/407)

유명세 (5)

수술방 휴게실.

최기석과 신지훈이 서로를 마주보고 소파에 앉았다.

기 싸움처럼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신지훈이었다.

“TAVI 잘 봤어요. 반신반의했던 내가 우스울 정도로 완벽하더군요.”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오히려 내 쪽에서 해야죠. 멀리 안 가고 우리 병원에서 TAVI를 볼 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흉부외과의가 심장내과 처치까지 잘해도 되는 건가요?”

“내과 영역까지 손댈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MHC에서 내버려 두질 않더군요.”

최기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 생각해도 MHC는 특별한 곳이었다.

흉부외과의에게 내과 처치를 전부 가르치지를 않나, 실력주의에 따른 수련기간 단축 시스템을 갖추질 않나, 레지던트 때부터 팀 활동을 시키지를 않나 등등.

그 아수라를 뚫는다면 실력은 보장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한국에서 계속 수련했다면 트리플 보드는 못 땄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요?”

최기석의 허심탄회한 말에 신지훈이 호기심을 보였다.

“우선 트리플 보드라는 개념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흉부외과 세부 전공을 복수로 익히고 계신 분이 전무하니까요. 또 파벌 싸움에 휘말리면 또 거기에 신경 쓰느라 수련이 힘들고요.”

“딱히 반박할 말이 없군요. 수련이 힘든 이유 자체는 최 과장님과 많이 다르지만.”

“조교수님이 생각하는 이유는 혹시 전공의 수 부족인가요?”

“맞습니다.”

신지훈의 고개가 움직였다.

“사람이 없어서 잡일에 치이다 보면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건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P.A 도입을 찬성해요.”

P.A(Physician Assistant)는 의사보조인력을 뜻한다.

이들은 의사가 아님에도 레지던트들이 하는 약품처방을 비롯해 환자관리, 때로는 간략한 수술업무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P.A 대부분은 간호사지만 간혹 의료기사나 응급구조사가 업무를 볼 때도 있었다.

“최 과장님도 딱 잘라서 반대는 못하지 않습니까?”

“…….”

신지훈의 대답에 최기석은 침묵을 지켰다.

그의 말대로 세원병원 흉부외과 역시 P.A 인력에 도움을 받고 있었다.

아니 조금 과장하자면 전국에 있는 종합병원 또는 대학병원 흉부외과에서 P.A를 쓰지 않는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P.A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흉부외과, 비뇨기과등의 비인기 과이기에.

“P.A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건 압니다. 특히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과실을 판단하는 부분은 정말 골치가 아플 정도죠. 하지만…….”

신지훈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P.A는 필요해요. 이 기회에 P.A를 합법화해서 업무범위와 책임을 명확하게 정하자는 거죠. 최 과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론 그것도 방법 중 하나겠죠. 그 전에 정부에서 부족한 의사 수를 늘리고 수가 인상을 선행하는 편이 더 좋겠지만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신지훈이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압니다. 최 과장님이 왜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여기서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말이에요.”

“…….”

“레지던트들에게 들었습니다. 그 녀석들을 대신해서 일주일에 두 번씩 당직을 서고 계신다는 것을. 그뿐만이 아니죠. MHC에 있는 의사들을 세원병원으로 끌어왔으며 얼마 전에는 TV 출연까지 했죠. 병원에 온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무언가를 해 보고자 하는 열정에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

“믿을지 몰라도 난 최 과장님 편이에요. 이제는 김한철 부교수님을 따르지 않을 겁니다. 최 과장님이 보고 싶어 하는 희망을 나도 보고 싶어졌거든요.”

그의 목소리에서 점점 기이한 열기가 뿜어졌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으며 테이블에 올라간 주먹은 굳게 말려 있었다.

최기석은 그가 진심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았다. 속 깊은 말을 꺼낼 때 그 사람이 보여 주는 행동과 말투는 평상시와 다르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요. 이카루스는 태양을 향해 날던 중 날개를 잃고 추락했다는 걸.”

“…….”

“제가 흉부외과에 몸담은 23년 동안 변한 건 없었고 앞으로 크게 변하는 것도 없겠죠. 그걸 명심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현실과 타협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최 과장님을 위한 길이에요.”

지이이잉.

가운에 넣어둔 콜폰이 떨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벌써 다음 수술 스케줄이 찾아왔다.

“죄송하지만 수술실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최기석은 신지훈과 작별하고 휴게실을 떠났다.

어쩐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스케줄을 마치자 저녁 8시가 되었다.

오후에만 무려 세 개의 수술을 끝냈음에도 최기석은 여전히 쌩쌩했다. 강화 10단계의 환자 바라기의 체력회복 효과 덕분이었다.

드르르르륵.

의국으로 들어가자 독서 중인 심용준이 보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과장님.”

“너도 고생 많았다. 뭘 보고 있어?”

“낮에 새로운 숙제를 주셨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었어요.”

“됐으니까 그만 기숙사로 가 봐. 오늘 당직은 나잖아.”

“괜찮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제가 과장님 대신 당직을 서겠습니다. 의국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되는데요. 뭐.”

돌처럼 자리를 지키는 심용준을 보며 최기석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말을 예쁘게 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건 그렇고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뭐?”

“과장님이 수술하는 동안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찾아왔어요. 촬영허가도 받았고 촬영 과정도 설명했고요. 오늘부터 바로 촬영에 들어간다는 데요?”

“촬영은 빠를수록 좋지. 그래야 방영도 빨리 되잖아.”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계속 TV에 얼굴을 비추는 게 좋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 말이다.

슈리텔에 이어 다큐멘터리까지 방영되면 흉부외과에 대한 관심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그 기세를 몰아 의료적인 성과를 보여 주고 문제 제기를 하면 소정의 성과를 거둘 거라 최기석은 믿고 있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고. 어쨌든 빨리 가 봐.”

“오늘 당직은 제가 서기로…….”

“마음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기숙사에서 편히 주무시고 내일 더 열심히 일해 주세요.”

최기석은 버티는 심용준을 장난스럽게 기숙사로 보내고 의국에 남았다.

똑. 똑. 똑.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시간을 보내는 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다큐멘터리 스태프들이 의국으로 쏟아졌다. 슈리텔을 한 번 경험해서 그런지 카메라가 들이닥쳐도 그리 당황스럽지 않았다.

그는 스태프들이 자리를 잡도록 도와준 후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다큐멘터리 7일 팀의 책임 PD 강병만입니다.”

“흉부외과 과장 최기석입니다.”

강병만과 최기석이 악수를 주고받았다.

“촬영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먼저 찾아뵈려고 했는데 오후에 계속 수술 중이라고 들어서.”

“하하하. 방금 막 들었습니다. 방금 막 스태프분들이 찾아오셨고요.”

최기석의 농담으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두 사람은 촬영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이쯤해서 촬영을 시작할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물론입니다. 근데…….”

최기석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배가 고파서 냉장고에 있는 피자를 데워 먹을 생각인데. 그런 건 상관없죠?”

“상관이 없는 게 아니라 아주 추천하는 행동입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중요하거든요.”

강병만이 큐 사인을 보내자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고 최기석은 하던 대로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과장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왜 과장님이 당직을 서십니까? 야간당직은 레지던트의 일 아닌가요?”

VJ의 질문에 최기석은 쓰게 웃었다.

“사람이 부족해서 레지던트들이 쉬지를 못해요. 그래서 제가 일주일에 두 번씩 당직을 서 주고 있죠.”

“과장님이 당직도 서나요?”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최기석의 역질문에 VJ가 당황한 듯 말문을 잇지 못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진료를 보고 수술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안 피곤하세요?”

“제가 힘들어도 환자들이 편할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우리나라 흉부외과는 다른 과에 비해 인기가 없는데.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VJ가 화제를 돌렸다.

“비교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소방관분들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소방관이요?”

“네. 소방관분들이 고생하는 건 누구나 알겁니다. 하지만 정작 그 처우는 좋지 않은 게 사실이잖아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적겠죠.”

“그렇군요. 그러면 과장님은 왜 흉부외과를 택하셨나요?”

“의대 시절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처럼 아픈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야기를 마친 최기석은 피자를 한 조각 베어 물고 TV를 응시했다.

때마침 뉴스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오늘 오후 보건부에서 메르스 의심 환자를 검사한 결과 해당 환자가 메르스에 걸린 것으로 확정 판정이 났습니다. 김00 씨는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첫 번째 메르스 환자로…….]

메르스.

정확은 명칭은 메르스 코로나 바이러스.

이는 중동에서 건너온 바이러스로 고열, 기침, 호흡곤란 등의 심한 호흡기 증상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다.

[현재 환자는 00병원에서 격리 치료 중이며 질병통제 본부는 메르스의 정확한 발병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역학조사를 실행 중입니다. 질병통제 본부에 따르면 추가 감염자는 없는 것으로 보이며 감염 및 괴소문이 퍼지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성명을 내놓았습니다.]

뉴스를 지켜보던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등골이 오싹한 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과장님. 메르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신도 없고 치료법도 딱히 정해진 게 아니라 조심해야 할 질병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염자가 늘어나지 않는 거고요.”

“SARS가 퍼졌을 때도 잘 이겨 냈으니까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길 바랍니…….”

띠리리링!

갑자기 울리는 전화 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가려졌다.

최기석은 헛기침을 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흉부외과 최기석입니다.”

[과장님. 응급의학과 인턴 안용태입니다. 방금 TA 환자가 왔는데 의식은 혼미한 상태고 수축기 혈압이 80 mmHg입니다.]

“수축기가 80 mmHg이란 말이지?”

[네! 승압제를 투여해도 혈압이 안 올라가길래 방금 막 심장초음파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심외막액이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심장압전 소견까지 나타나서…….]

“바로 내려간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응급실로 향했으며 그 뒤를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아기 새처럼 따랐다.

의식을 잃은 채 죽은 듯이 누운 환자.

그 곁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보호자와 그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인턴을 헤치고 최기석이 환자에게 다갔다.

환자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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