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94화 (393/407)

유명세 (3)

세원병원으로 향하는 출근길.

정설화는 휴대폰으로 각종 기사들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차에 탄 이후로 그녀의 시선은 휴대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렇게 재밌어?”

“당연하지. 우리 기사 엄청 많아.”

정설화의 대답에 최기석은 피식 웃었다.

바로 어제, 슈리텔이 전파를 탔다.

그 열 번째 경연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끈 방송은 단연 하트 최와 하트 정, 즉 두 사람의 방송이었다.

전반전 중반부터 아옹다옹하며 쌓은 케미, 질식사할 뻔한 김구린을 구해 준 에피소드가 큰 몫을 했다.

“후후후. 우리 여보보다 내 인기가 더 많은 걸?”

여러 기사와 사이트를 헤매던 정설화가 마침내 휴대폰을 손에서 놓았다.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도 별거 아닌데?”

“트리플 보드면 뭐해. 속된 말로 진지충에 설명충인데.”

“바보. 농담이잖아.”

“나도 농담이야. 하여간 고마워. 여보가 없었으면 이번 방송 완전히 망했을 거야.”

그는 방송을 돌이켜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설화와 슈리텔에 출연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만약 단독으로 방송을 했으면 어땠을까?

아마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욕만 먹고 분량도 대폭 잘렸으리라.

“그건 그렇고 슈리텔 한 번 더 나갈래?”

정설화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제 저녁에 PD님한테 전화 왔어. 열한 번째 경연도 나와 줄 수 있냐고.”

“윽. 내가 아니라 우리 여보한테 전화했구나.”

“방송에서는 내가 더 잘나가니까.”

“나야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데…….”

“그럼 가자. 분명 재밌을 거야.”

그녀의 독촉에 못 이긴 그는 슈리텔에 재출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슈리텔로 대화의 꽃을 피우다 보니 도착한 병원.

두 사람은 가볍게 입을 맞추고 각자의 병동으로 이동했다.

‘자. 시작해 볼까?’

최기석은 병실을 돌며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입원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밤사이 특별한 사고는 없는 듯했다.

수술 예정 환자의 상태만 불량이고 나머지는 보통이나 양호 수준이었다.

“선생님!”

성인 병실 관찰을 끝내고 소아 병실을 도는데 일찍 잠에서 깬 아이가 그를 불렀다.

아이의 이름은 김태환.

심한 부정맥으로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어디 아파?”

“아…… 아픈 건 아니고요. 어제 슈리텔에 나온 선생님 아니에요? 하트 최 선생님이요.”

“아, 맞아. 방송 봤구나.”

최기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역시 슈리텔에 출연한 보람이 있다고 할까.

“선생님 방송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정말? 고맙다.”

“저…… 사인 좀 해 주세요.”

아이가 입원생활 안내서 종이를 내밀었고 최기석은 그 뒷면에 사인을 해 주었다. 미국 휴게소에서 처음 사인을 한 후 이번에 영광의 두 번째 사인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 근데 혹시 하트 정 선생님 사인도 받아 줄 수 있어요?”

머뭇거리는 아이를 보며 최기석은 깨달았다.

사실 아이가 사인을 받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정설화라는 것을.

“그건 안 돼.”

“왜요? 하트 정 선생님 사인도 받고 싶은데.”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사인을 받아 주는 건 안 되고 오늘 중으로 네가 있는 병실에 찾아가 달라고 부탁해 볼게. 그게 더 좋겠지?”

“정말요?”

“물론이지. 약속.”

최기석은 아이와 새끼손가락을 걸고서 말을 이었다.

“우리 태환이는 꿈이 뭐야?”

“저는 선생님처럼 의사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저처럼 아픈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꿈이구나. 혹시라도 나중에 의대 졸업하고 인턴 마치면 꼭 흉부외과에 지원하렴. 그러면 분명 보람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네!”

대화를 마친 최기석은 그길로 아이와 헤어졌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다소 이른 감은 있지만 의사를 꿈꾸는 새싹들이 흉부외과를 전공하도록 작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흉부외과 의사가 조금이라도 더 늘어나지 않겠는가.

드르르륵.

의국으로 들어가자 당직 중인 심용준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좋은 아침. 새벽에 별일은 없었지?”

“네. TA 환자가 왔지만 가벼운 기흉이라서 흉강천자 하고 응급실에서 경과 관찰 중입니다. 그밖에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잘 됐네. 간만에 쪽잠 좀 잤겠어?”

“아, 네.”

심용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심용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과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뜬금없이 왜?”

“요즘 과장님이 일주일에 두 번씩 당직을 서 주시잖아요. 덕분에 저나 다른 레지던트들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심용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는 믿지 않았다.

최기석이 레지던트들을 위해서 당직을 서겠다고 말을.

전설의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가, 그것도 흉부외과를 대표하는 수장인 과장이 야간당직을 선다는 것은 세계 어느 병원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경천동지할 사건이 바로 세원병원에서 일어났다.

최기석이 정말로 당직을 섰던 것이다.

그의 희생으로 레지던트들의 빡빡한 생활에 다소 숨통이 트였다.

쉬는 날에 집에 다녀올 수도 있었고 기숙사에서 마음 편히 쉬거나 수련을 할 수도 있었다.

다른 과에 비하면 여전히 끔찍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 정도 여유만으로도 탈주(?) 욕구를 극복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도 레지 시절 겪어서 아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근무환경은 대물림이 없었으면 한다.”

“그래도 이러면 과장님이 너무 피곤하신 것 아닙니까? 외래 진료에 수술에, 당직까지 서시면 몸이 남아나질 않으실 것 같은데.”

“내 걱정은 마. 견딜 수 있어서 하는 거니까.”

최기석은 심용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전에 내가 내 준 숙제는 기억하고 있겠지?”

“입원환자 관리 말씀이시죠? 따로 문서를 만들어 놨는데 보여 드릴게요.”

심용준이 모니터에 문서를 띠었다.

문서에는 입원환자의 병명과 그에 따른 관리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 문서만 보면 인턴도 실수 없이 환자관리를 할 수 있을 듯했다.

띠링!

그 순간 머릿속에서 울리는 알림.

[ZZUL 시스템 1단계]

[심용준: 병동 환자 관리/3개월 완료!]

[해당 임무를 조기에 완성하여 특수한 능력이 부가됩니다. 위기대처능력이 두 단계 상승하며 후임에게 교육을 펼칠 경우 후임의 업무 이해도가 3배 올라갑니다.]

[다음 임무를 지정해 주세요.]

상태창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본래 아랫사람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스승의 기쁨이 아닌가.

자신의 성장을 지켜보던 송명진도 아마 이런 뿌듯함에 더 열심히 가르침을 내렸으리라.

“환자 관리는 이만하면 될 것 같고. 그 다음은…….”

“말씀만 해 주세요. 뭐든지 해낼 자신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실전으로 들어가자. 다니엘에게 말해 둘 테니까 이번 주부터 횡격막 복원하고 ICD(삽입형 제세동기) 시술 배워 봐.”

“버…… 벌써요? 그건 3년 차가 하는 건데…….”

“너 정도면 월반해도 돼. 겁먹지 말고 차근차근 익혀.”

[새로운 임무가 생성되었습니다.]

[심용준: 횡격막 복원과 ICD삽입을 비롯한 레지던트 3년 차 술기 학습, 목표 기간 2개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용준에게 학습목표가 주어졌다.

“회의 준비할 때 됐지? 이따 회의실에서 보자.”

“네. 과장님.”

최기석은 의국을 떠나 집무실로 이동했다.

ZULL 표식을 받은 후배들이 더욱더 성장하기를 바라며.

* * *

오전 회의와 회진이 끝나고 외래 진료 시간이 찾아왔다.

딸칵!

진료 예약표를 확인한 최기석은 혀를 내둘렀다.

바늘 하나 집어넣기도 빡빡할 만큼 환자들이 밀려 있었다. 슈리텔이 방영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니 환자는 앞으로 한층 더 늘어나리라.

“세정 선생님.”

그의 외침에 윤세정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니고. MHC에서 온 찰스와 제레미 선생님 환자들은 얼마나 돼요?”

“아까 확인해 봤는데 예약 다 찼어요. 과장님 진료 대기 시간이 길어서 그쪽으로 넘어간 환자들이 제법 많은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최기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두 사람을 불러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오늘도 파이팅 하고 시작할까요?”

“좋아요.”

짝!

두 사람이 친근하게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외래진료에 나섰다.

증상이 가벼운 환자, 심각한 증상의 환자.

남자 환자와 여자 환자를 비롯해 갓난아이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환자까지.

다양한 환자들이 진료실을 찾았다.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들의 질병을 정확히 짚어 내며 그들의 아픔에 최대한 공감하려고 애썼다.

몸이 고통스러우면 자연스럽게 마음도 고통스러워지는 법이기에.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전 진료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오후에는 TAVI(무봉합 대동맥 판막 치환술)와 폐암 절제술, OPCAB이 예정되어 있었다. 환자들의 상태가 위중한 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환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 안녕하세요.”

최기석은 낯익은 환자를 확인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환자의 이름은 박광진.

이름만 보고 동명의 배우와 이름만 같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 배우가 나타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박광진은 연기력이 탄탄한 배우로 각종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주연배우는 아니었지만 감초 같은 역할을 자주 맡아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진료 의자에 앉은 박광진이 입을 가리며 연신 기침을 했다.

청진을 하지 않았음에도 선명하게 들리는 폐포 끊는 소리,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 냄새에 최기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하게 병원에 올 때마다 어색하네요.”

박광진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

“누구에게나 그런 법이죠. 어디가 제일 불편하십니까?”

“그게…… 사실 얼마 전에 감기가 걸려서 동네 의원에 갔습니다.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거기서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하더군요.”

“…….”

“그래서 종합병원에 가 봤는데 폐암 4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광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최근 촬영에 지쳐서 몸이 피곤했을 뿐, 그동안 크게 아픈 적은 없었다. 그런데 검사를 받고 나서 폐암 4기라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아직도 자신이 겪는 모든 게 꿈인 것 같았다.

“그쪽에선 항암치료를 받으면 6개월 정도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더 살고 싶습니다. 아직 배우로서 이루지 못한 것들이 많아요. 선생님,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최기석은 그가 가져 온 검사 결과를 살피고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재차 진단명을 확인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폐암 4기.

비소세포성 암 조직이 좌측 폐에 자리 잡았으며 이것이 기관지와 림프절을 비롯한 다양한 병변에 퍼져 있었다.

그를 치료해야 하는 최기석 역시 눈앞이 깜깜해지는 경험을 했다.

“선생님이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고개 숙이는 박광진을 보며 최기석을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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