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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90화 (389/407)

세원 병원 (5)

“허허…….”

이력서를 확인한 나상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최기석이 추천하는 인물은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처음에는 이력서를 구체적으로 보지 않고 사진과 경력만 대략 훑었는데 그때부터 등줄기가 짜릿했다.

“정말 이 사람들이 우리 병원에 오는 건가?”

“네. 이야기는 다 끝냈고 아까 한국에 도착했다는 연락도 받았습니다.”

“살다 보니 별 일도 다 있군. MHC 스태프들을 만나는 날이 올 줄이야.”

“병원장님. 저도 MHC 출신입니다만…….”

“하하하. 제일 중요한 걸 잊었군. 하지만 자네와 대화하면 이상하게 포근한 기분이 들어.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 건가?”

“아마도 그렇겠죠.”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희망 연봉만 맞춰주면 내일 당장 일하게 될 겁니다.”

“대충 얼마 정도 예상하고 있지?”

나상철의 질문에 최기석이 공란에 금액을 적어 넣었다.

“화끈하군. 이것도 MHC 스타일인가?”

“미국 흉부외과의는 보통 이 정도 받습니다. 한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금액이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나상철이 탐탁지 않다는 듯 턱을 쓸어내렸다.

“트리플 보드인 자네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건 이해가 안 가는 걸?”

“흉부외과 현실이 그만큼 암담한 거겠죠. 만약 제 자존심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상관없습니다. 제가 돈에 연연하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의료봉사도 떠나지 않았을 거고요.”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이 사람들 한국말은 잘하나?”

MHC 흉부외과의라고 해도 환자나 동료 스태프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불현듯 걱정이 밀려오는 나상철이었다.

“열심히 배우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수술이야 영어로 진행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고 문제는 외래진료인데…….”

“…….”

“당분간 영어 가능한 외래 간호사를 붙여 주면 문제없을 겁니다.”

“으음…… 간호부에 연락해 봐야겠어.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친구들이군.”

“다만 그만한 값어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겠지. 어쨌든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 봐.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까 이 거지 같은 판을 한번 뒤집어 보라고.”

“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채애애앵.

술잔이 부딪치고 잔이 비었다.

최기석은 나상철에게 잔을 채워주며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흉부외과에 고급인력을 확보하는 첫 번째 임무가 끝났다. MHC에서 도착한 동료들이라면 세원 병원의 다소 부족한 전문성을 메꿔 줄 수 있으리라.

“최 과장.”

“네, 병원장님.”

“아까부터 귀가 간질간질한 게 이상한데. 혹시 또 할 이야기가 있나?”

“귀신같이 맞추셨습니다. 사실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막 첫 번째 외래진료를 끝낸 사람치고는 할 말이 지나치게 많은 거 같군. 전생에 세원 병원에 원수라도 졌나?”

나상철의 농담에 최기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생이 존재한다면 그때는 세원 병원이 없었을 텐데요.”

“…….”

“다만 제가 여러 가지 일을 서두르는 건 흉부외과의 밝은 미래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입니다.”

“흉부외과의 밝은 미래라……. 그런 게 있다면 꼭 죽기 전에 보고 싶군.”

나상철의 아련한 시선이 천장에 닿았다.

* * *

다음 날 오전 흉부외과 회의실.

치프 레지던트 이다니엘의 진행으로 오전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케이스 스터디와 입원환자 브리핑이 차례대로 끝나면서 회의는 막바지로 치달았다.

“회진 전에 잠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최기석이 스태프들을 훑으며 운을 뗐다.

“어제 외래진료 이야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그 이야기라면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최 과장 인기 폭발이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적당히 하시죠.”

찬물을 끼얹는 김한철을 보며 최기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비록 부교수님보다 어리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참을 수 없다니. 최 과장, 그게 무슨 소리에요?”

“어제부터 제가 뭐라고 이야기만 하면 빈정거리며 한 마디씩 덧붙이지 않았습니까?”

“흠흠.”

김한철은 최기석의 시선을 피해 헛기침을 했다.

‘걸려들었군.’

김한철의 입가에 짙어지는 미소.

상대의 말에 사사건건 토를 다는 건 애 같은 짓이지만 신경을 긁기엔 그만한 수법도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최기석이 느끼는 짜증은 그가 느끼는 짜증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가 뭐 어쨌다는 말인가.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과장이라고 완장질 하는 걸 순순히 볼 수만은 없었다.

“이 자리에서, 모든 스태프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치한 짓은 그만하세요.”

“뭐, 뭐라고요? 유치한 짓?”

“지금 하시는 행동이 유치한 행동이 아니면 무슨 행동이죠?”

“내 입으로 말도 못하고 삽니까?”

“그 논리, 그대로 돌려드리는 겁니다. 유치한 짓 하지 말라는 제 말이.”

서로를 향한 불꽃 튀는 시선, 최기석이 바짝 공격의 고삐를 당겼다.

“그리고 앞으로는 최 과장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뒤에 꼭 님자를 붙이세요. 저는 부교수보다 상급자에요. 앞으로 친구처럼 부르는 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최기석은 부교수라는 단어를 끼워 넣으며 김한철의 신경을 건드렸다. 효과가 있었는지 그의 얼굴이 금방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최 과장!”

“최 과장이 아니고 최 과장님!”

김한철의 호통에 최기석이 호통으로 맞붙을 놓았다.

그러자 김한철이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의 눈은 ‘나를 이렇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편, 다른 스태프들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최연소로 트리플 보드를 획득한 흉부외과 과장과 세원 병원터줏대감인 부교수의 기 싸움.

이런 좋은 구경은 어디 가서도 할 수 없었다.

‘좋은 그림은 아니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이다니엘은 두 사람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직책을 생각했을 때 호칭과 말꼬투리 잡는 문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모습은 볼썽사나웠다. 다 큰 어른이 서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겠다며 싸우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사회생활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이런 갈등은 피하기 힘들었다.

코딱지만큼 사소한 사건들로 기 싸움을 벌이고 갈등을 빚는 게 사회생활이니까.

다만 이다니엘이 놀란 것은 최기석이 적극적으로 부 교수를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평소 한없이 다정다감했던 그의 모습에서 지금의 모습은 상상하기란 불가능했다.

‘역시 보통 분이 아니셔.’

이다니엘의 시선이 다시 최기석에게 향했다.

“부교수. 내 말을 따라해 봐요. 최. 과. 장. 님. 따라서 할 수 있겠죠?”

“…….”

“너무 어렵습니까? 천천히 할까요? 최. 과. 장. 님.”

“에이. 씨발!”

쿵!

김한철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더니 최기석을 한참 노려보고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최기석이 기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

“…….”

김한철이 떠나면서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스태프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여러분 중에는 분명 지금 제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최기석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대우를 받았을 때는 그에 합당한 반발을 해야 한다고요. 만약 제가 여러분들에게 경솔하게 굴거나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다면 여러분들도 지금 제가 했던 것처럼 행동하세요. 저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휴. 사족이 길었군요.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최기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낯선 두 사람이 그의 옆에 자리 잡았다.

두 사람은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스태프들이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이름은 찰스와 제레미. MHC 흉부외과에서 교수로 있었고 찰스는 심장 파트, 제레미는 폐식도외과 파트가 전공이에요.”

“반갑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하는 찰스와 제레미를 보며 최기석은 웃음을 터뜨렸다. MHC 전우들을 한국에서 보는 것도, 그들이 한국말을 하는 것도 마냥 재미있었다.

“찰스부터 좀 더 소개해 봐.”

최기석의 말에 찰스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김치, 강남 스타일, 박지선, 한국 좋아요. 한국말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즈알 부탁드립니다.”

짝. 짝. 짝. 짝.

찰스와 제레미의 소개가 끝나자 스태프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세계 흉부외과의 중심인 MHC의 교수 두 명이 세원 병원에 일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있다가 하자. 저기 앉아.”

“알았어.”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후 최기석이 운을 뗐다.

“회진 돌기 전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어요. 앞으로 일주일 후 교육 채널에서 우리 병원을 방문합니다.”

“…….”

“흉부외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했는데, 우리의 자연스러운 일상을 보여주면 됩니다. 알았죠?”

“네!”

“이상 끝! 회진 돕시다.”

최기석이 먼저 회의실을 나가고 스태프들이 그 뒤를 따랐다.

* * *

그날 오전.

최기석은 집무실 소파에 앉아 맞은편에 있는 제레미와 찰스를 응시했다. MHC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두 사람과의 거리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한국에 온 소감은 어때?”

“아직 잘 모르겠다. 괜히 온 것 같기도 하고.”

“벌써부터 왜 그래? 언어 문제랑 근무 환경만 빼면 여기도 괜찮을걸?”

“사실 그거 두 개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야?”

찰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전 회의 때 무슨 문제 있었어? 고성이 오고 갔잖아. 중년 남자 한 명은 씩씩거리면서 회의실을 나갔고.”

“뭐. 흔한 기 싸움이지. 여기 부교수가 나랑 띠동갑이거든. 전부터 틱틱거리길래 오늘 힘차게 들이받아 줬지.”

“나이 차이가 무슨 상관이래? 실력이 중요한 거 아닌가?”

“그게…… 미국하고는 좀 달라.”

그의 입가에 쓴 웃음이 걸렸다.

“하여간 와 줘서 고맙다. 너희 둘이 곁에 있으니까 아주 든든한데?”

“그동안 도움 받은 게 있는데 이 정도야 뭐. 하지만 계약 시간 이상으로는 일 못해 주니까 그건 네가 이해해 주고.”

제레미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최기석이 제안한 한국에서의 근무기간은 2년이었다. 그 후 제레미와 찰스는 MHC로 복귀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이지. 그리고 그때쯤이면 내가 이미 너희만 한 실력자를 키워 놓은 후일걸?”

“그게 2년 만에 가능하겠어?”

“못할 것도 없지.”

최기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두 사람과 대화를 이었다.

메이죠와 MHC에 관련된 사건사고와 사업계획은 메일을 통해 접했지만 동료들에게 직접 들으니 느낌이 또 달랐다.

“잠깐만.”

최기석은 휴대폰에 떠오르는 낯선 번호를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최기석입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NBC 슈퍼 리틀 텔레비전 제작진인데요.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슈, 슈퍼 리틀 텔레비전이요?”

최기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슈퍼 리틀 텔레비전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TV 프로그램으로 출연자들이 개인방송 컨셉으로 방송을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조지환 병원장님이 방송출연 부탁한 걸로 아는데. 연락 못 받으셨어요?]

“아…….”

조지환 이름 석 자가 망치처럼 머리를 두드렸다.

점심 마당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할 줄 알았건만 설마 슈퍼 리틀 텔레비전을 섭외한 건가.

갑자기 머리가 아픈 최기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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