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89화 (388/407)

세원 병원 (4)

무봉합 대동맥판막 치환술.

기존의 판막술이 절개를 통해 수술적으로 판막을 교체하는 반면 이 수술은 내시경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수술은 현재 심장내과와 흉부외과의 경계에 걸쳐 있는데 세원 병원에서는 흉부외과가 이 수술을 맡고 있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어머님의 부담이 확실히 줄겠군요.”

“네. 그래서 환자분께 무봉합 대동맥판막 치환술을 추천 드리는 겁니다.”

“역시 최 과장님이십니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어요.”

“저라서 이런 판단을 하는 건 아닙니다. 질환에 접근하는 방식은 써전에 따라 다르니까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전에 입원했던 병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안 해 줬으니까요.”

“입원 오더를 내릴 테니 병실로 올라가 보세요.”

“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첫 번째 환자와 보호자가 진료실을 떠난 후 대기 중이었던 환자들이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환자의 종류는 가지각색.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었으며 사소한 흉통부터 암에 걸린 환자까지, 그 스펙트럼이 무척 넓었다.

의외였다.

진료 첫날에 환자가 이렇게 붐빌 줄은 꿈에도 몰랐거늘…….

눈코 뜰 새 없이 몰아닥치는 환자들로 인해 최기석과 외래간호사는 점심시간마저 반납하고 진료에 나섰다.

지방에서 온 환자들이 허탕 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어.’

최기석은 진료를 마치고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대기 중인 환자들이 대기석을 가득 메웠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 뒤로 사람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진료실로 복귀한 그는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우선 검사를 최대한 줄였다.

진단명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에게 사실 검사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검사를 실행하는 이유.

그것은 다른 교수나 펠로우, 레지던트가 환자를 살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최기석은 꼭 필요한 검사만 하고 검사에 대한 본인의 구체적인 코멘트와 임상경험을 적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두 번째 개선점은 환자 접대였다.

환자의 대화를 충분히 들으며 공감대를 형성하되 하소연의 장이 되지 않도록 대화의 템포를 조절하고 처치방법을 간략하게 전달했다.

“환자분 들어가세요.”

“아, 네.”

윤세정은 새로운 환자를 진료실로 보내고 진료실을 떠나는 환자의 얼굴을 살폈다.

진료실을 떠나는 환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최기석의 진료에 상당히 만족한 모습이었다.

‘희한하네.’

점심시간을 기점으로 최기석의 진료시간은 두 배 가까이 줄었다. 기존 진료시간이 환자 한 명당 평균 6분이었다면 지금은 4분에서 3분 사이를 오갔다.

환자 입장에서는 불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짧은 진료를 받았음에도 환자들의 얼굴에는 만족한 기색이 또렷했다.

외래간호사 생활을 십 년 넘게 해 온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진료의 질조차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몇몇 차트를 살폈는데 증상과 검사에 대한 소견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또한 의사들의 경우 R/O(Rule out, 의심되는 증상)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최기석의 차트에서는 R/O를 찾을 수 없었다.

진단명을 확진하는데 일말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흉부외과 외래환자들이 어디 갔나 싶었는데? 여기 있었구만.”

“안녕하세요, 교수님.”

윤세정이 부교수 김한철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김한철은 대답 없이 대기실에 앉은 환자를 훑었다.

“최 과장은 어때? 첫 진료라서 허둥지둥하진 않나?”

“처음에는 환자가 지나치게 몰려서 걱정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최 과장님은 진료가 빠르고 정확하세요.”

“웃기는군. 진료가 빠르고 정확한지 간호사인 자네가 어떻게 알 수 있지?”

“물론 교수님께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도 흉부외과 외래에서 보낸 시간이…….”

“그래 봤자 간호사는 간호사고 의사는 의사야.”

그가 윤세정의 말을 잘라먹은 순간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한철의 말이 사실이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 아닌가.

간호사라고 해서 환자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김한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흠흠. 최 과장하고 나를 비교하면 어때?”

그의 얄팍한 질문에 윤세정은 속으로 조소를 머금었다.

결국 이걸 묻고 싶어서 외래에 행차한 모양이었다.

“저는 최 과장님이 조금 더 나은 것 같습니다.”

“하…… 나랑 2년 넘게 일을 해놓고 오늘 첫 진료를 시작한 최 과장 편을 드는 건가?”

“제가 느낀 바를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어차피 간호사인 제 의견이 교수님께 큰 의미는 없겠지만요.”

“윤 간호사. 지금 한 말…… 기억해 두겠어.”

멀어지는 김한철을 보며 윤세정은 혀를 길게 내밀었다.

시간이 흘러 외래진료 종료시간이 찾아왔다. 그 많았던 환자들의 행렬은 이미 사라졌고 대기석마저 텅 비었다.

최기석은 윤세정과 진료실에서 피자로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

“고생 많았어요, 윤 선생. 나 때문에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괜찮습니다. 어차피 다이어트 중이었는걸요.”

“그렇게 말해 주니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참.”

탄산음료를 마신 그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고생은 제가 아니라 과장님이 다 하셨죠. 저야 환자만 진료실로 들여보내면 되는데 과장님은 환자랑 대화도 하고 진단도 하셔야 하잖아요.”

“그래도 윤 선생이 있어서 잘 돌아갔어요. 바깥에서 난리치는 환자도 없었고 환자 스케줄이 꼬이지도 않았잖아요.”

최기석은 등받이에 기댄 채 하루를 돌이켜보았다.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환자들을 상대로 나름 선방했다.

진료하는 내내 환자를 다 보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았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는 환자가 없도록 만들었다.

거기에는 오후부터 진료 스타일을 바꾼 게 큰 몫을 했다.

“혹시 다른 교수님 외래진료는 어땠어요?”

“아까 전화해 봤는데 부교수님하고 조교수님 환자가 30퍼센트 정도 줄어들었대요. 두 분의 초진 환자가 최 과장님께 넘어온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과장님은 참 신기한 분인 것 같아요.”

윤세정이 화제를 돌렸다.

“어떤 점에서요?”

“뭐랄까. 과장님인데도 과장님 같지가 않아요. 권위의식이 전혀 안 보인다고 할까요? 이런 말씀 드리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레지던트 선생님처럼 푸근하세요.”

“윤 선생님이 일을 잘하고 착해서 그렇죠. 성향이 안 좋은 사람들한테는 가차 없답니다.”

최기석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아요. 환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죠. 개인적으로 위치의 고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멋져요. 과장님.”

띠링!

[윤세정과 라포 2단계 믿음을 형성하셨습니다. 윤세정에게 능력 중 특수효과가 부여됩니다.]

대화를 마치자 알림이 들렸다.

최기석은 윤세정을 퇴근시키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병원 로비를 찾았다.

오늘은 특별히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직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 게 과장이 되자 환자를 보는 것 외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오셨습니까? 병원장님.”

“최 과장. 오늘 엄청 바빴다면서?”

병원장 나상철이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맞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수단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법도 하지. 낮에 지나가다 대기석을 봤는데 환자들이 말도 못하게 붐비더군. 뭐. 세계 유일의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가 특진비도 안 받고 진료를 했으니까 말이야. 내가 환자라도 자네 진료를 봤겠지.”

“…….”

“환자가 늘면 늘지 줄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앞으로 자신 있나?”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자네답지 않은 약한 소리를 하는군.”

나상철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래진료만 본다면 환자가 많아도 소화하겠지만 수술 스케줄이 잡히면 감당 못할 것 같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오늘 병원장님을 뵙자고 했고요.”

“그래. 세세한 부분은 앞으로 잡아 나가면 될 거야.”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병원 근처 일식집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일식집 앞에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외국인이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대주주님.”

“오랜만입니다.”

외국인이 최기석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나상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던 것이다.

“최 과장. 이분들은 누구야?”

“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오늘 약속이 잡힐 줄 몰라서요. 이쪽은 메이죠 클리닉의 병원장 글록이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진료부원장 칼입니다. 글록, 칼. 이쪽은 세원 병원에 병원장님인 상철 나예요.”

최기석의 소개에 양쪽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윽고 일행들은 일식집에 자리 잡은 후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이 자리 불편한데? 최 과장, 난 뭘 해야지?”

머쓱한 표정으로 술잔만 비우던 나상철이 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메이죠 스태프들을 만나면서 최기석이 아랫사람이라 생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떠오른 사실.

그것은 세원 병원에서는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최기석이지만 그가 사실은 세계적인 병원 메이죠 클리닉의 대주주라는 사실 말이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이게 다 세원 병원에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서니까요.”

“프로젝트?”

“물론이죠. 글록, 서류는 챙겨왔죠?”

최기석의 말에 글록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읽어 보시죠.”

“이…… 이건?”

나상철을 서류를 살펴보다가 몸을 들썩거렸다.

서류의 주된 내용은 메이죠와 세원 병원이 협력병원 관계를 맺는다는 이야기였다.

미국 최고의 병원 중 하나인 메이죠는 아직까지 해외 병원과 협력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즉, 계약만 성사된다면 세원 병원이 세계 최초로 메이죠 클리닉과 협력 관계를 맺은 병원이 된다는 소리다.

그 홍보 효과는 분명 엄청난 파급력을 지니리라.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계약이군.”

“정확히 보셨습니다. 정식 계약 체결은 내일 한 뒤, 기사를 빵빵 터트리면 병원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환자 보기도 바빴을 텐데 언제 이런 생각까지 했지?”

“틈틈이 했죠.”

최기석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놀라기엔 아직 이릅니다. 제 목표는 세원 병원, 나아가서는 홀대받는 대한민국 흉부외과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니까요.”

“허허. 포부가 남다르군.”

“목표는 크면 클수록 좋은 법이죠. 협력병원 체결 이외에 한 가지 더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해 봐.”

나성철의 눈매가 빛났다.

그는 어느새 최기석에게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병원 흉부외과 환자들은 앞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평판은 떨어지겠죠.”

“…….”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고급 인력을 늘리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탁!

최기석이 테이블에 이력서를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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