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원 병원 (3)
“오랜만에 고기나 먹을까? 이 근처에 한의사 선생님 CPR 마치고 술 마셨던데 있잖아. 옛 추억에 빠져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가족들하고 저녁 약속이 잡혀서 오늘은 안 될 거 같아. 미안.”
“어쩔 수 없지. 뭐.”
최기석은 아쉬움을 삼키며 정설화를 바래다준 후 집으로 돌아왔다. 항상 야근을 하던 아버지가 오늘은 웬일인지 집에 있었다. 덕분에 부모님과 단란한 저녁식사를 가질 수 있었다.
저녁상에는 제육볶음에 콩자반, 콩나물 무침 같은 밑반찬이 곁들여졌고 돼지고기를 우려낸 고소한 미역국이 화룡점정을 선사했다.
오랜 만에 먹어 보는 가정식에 그는 밥을 세 공기나 비웠다.
“그렇게 맛있니?”
어머니가 그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인데?”
“하긴 미국 생활하고 바로 수단에 넘어갔으니까 한국음식 못 먹은 지 오래됐구나. 앞으로는 엄마가 신경 써 줄게.”
“고마워.”
최기석은 식사를 끝내고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 도중 부모님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는데 두 분 다 건강에 문제는 없었다. 직장 생활도 여전히 잘하고 계셨고 말이다.
“두 분 다 쉬셔도 되는데. 세계 여행이라도 한번 다녀오세요.”
“나는 노는 게 더 힘들다. 일하는 게 시간도 빨리 가고 좋아.”
“나도 네 아빠랑 같은 생각이야. 꼭 돈을 벌려고 일하는 건 아니잖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부모님은 그가 파워볼이 당첨된 이후에도 예전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저는 방에 들어가서 쉴 게요.”
대화를 마친 최기석이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부모님과 식사를 마치자 한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좀 더 실감났다.
앞으로는 영어를 할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지 사랑하는 가족들을 볼 수 있으며 옛 동료와도 편하게 만날 수 있었다.
고국이 주는 편안함에 온몸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멍. 멍. 멍.”
방으로 들어와 꼬리를 치는 장군이.
애니멀 러버 칭호 때문인지 몇 년 만에 봤음에도 다가와 아양을 떨었다. 장군이를 번쩍 안아서 침대에 올려놓자 장군이가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벼 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가 시작인데.’
그는 장군이의 사랑을 받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그가 한국에 돌아온 이유.
그것은 한국 흉부외과의 열약한 환경을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환자를 잘 치료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목표를 위해서는 흉부외과에 대한 이슈를 끊임없이 만들어야 했다.
한마디로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할까.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더욱 쉬워질 것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
최기석은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을 들고 조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지환은 의외로 금방 전화를 받았다.
“늦은 시간에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중요한 일이라서 미룰 수 없었습니다.”
[아니야. 마침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잘 됐군.]
조지환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외래진료도 없는데 화끈한 첫날을 보냈더군. 질소과자를 먹은 아이를 수술하고 MIDCAB까지 했다며?]
“벌써 거기까지 알고 계십니까?”
[자네에 관해서는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지.]
“병원장님께 스토커 기질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농담에 조지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마음대로 안 될 거야.]
“그 마음 계속 간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하고 싶은 말은 뭐지?]
“가능하다면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습니다. 점심 마당이나 내 가족 주치의 같은 프로그램 있지 않습니까?”
[의외군. TV프로그램 출연 같은 건 겉치레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예전이라면 그랬겠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인지도를 높여야 하니까요.”
최기석이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라고는 하나 대다수가 아직 그를 몰랐다. 흉부외과 환자를 곁에 둔 가족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아무개와 다를 바 없었다.
고심 끝에 그가 생각한 첫 번째 목표.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흉부외과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스타 의사가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흉부외과에 대한 관심이 쏠릴 테니까 말이다.
솔직히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좋아. 최대한 빨리 잡아 보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말해 봐.]
“교수급 흉부외과의 두 명을 세원 병원으로 영입하고 싶습니다.”
[혹시 의진대 스태프인가?]
“그건 아닙니다. 이미 자기 자리를 잡은 옛 식구를 빼오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허…… 의진대 스태프가 아니라니……. 자네가 데려올 스태프가 누가 있다는 건지 궁금하군.]
“실력은 확실하니 봉급을 잘 챙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이력서에 하자가 없다면 받아들이겠어.]
“분명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최기석은 조지환과 대화를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직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 * *
“이번 정류장은 소사, 소사역입니다.”
버스 안내멘트에 최경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통 카드를 태그하고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다.
원무과 직원으로 일한 지 어언 세 달째.
일이 적성에 안 맞는지 출근일은 언제나 지옥 같았다.
[세계 유일의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 최기석 과장님. 흉부외과 진료 시작.]
병원 입구에 걸린 현수막을 확인한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저런 현수막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원무과 직원인 그조차 트리플 보드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뒤늦게 알았다.
그 말인 즉 최기석 과장이 얼마나 대단한지 일반 환자들이 알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뭐. 대단하다고 해 봤자 거기서 거기겠지만.’
최경환은 최기석이 세원 병원을 일으켜 세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세원 병원이 심장전문병원이라고는 해도 대부분의 환자는 대학병원 흉부외과를 선호한다.
대학병원이야말로 진짜 병원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환자들이 넘쳐 나기 때문이다.
단순한 감기나 눈 다래끼에 걸렸음에도 동네 의원을 두고 몇 시간씩 기다려 대학병원 진료를 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 아닌가.
최기석이 있다고 한들 환자들은 어차피 대학병원을 찾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진료한다고 그랬나?”
최경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병원 로비를 지나 원무과로 들어갔다.
출근이 빨랐기에 원무과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는 깨끗이 빤 걸레로 상사들의 책상과 주변을 닦고서 자리에 앉았다.
타다다다닥.
키보드 위에서 두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원무과장이 이번 달 내로 EMR 처리 과정을 매뉴얼로 만들라는 숙제를 냈다.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서는 피똥 싸는 노력이 필요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한 남성과 나이 든 할머니가 원무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 환자분이 진료비 상세 내역서를 출력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가능한가요?”
“지금 업무 시간이 아닌…….”
최경환은 남자의 목에 걸린 명찰을 확인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세원 병원 화제의 중심에 있는 남자.
최기석이 아침부터 원무과를 찾은 것이다.
‘의외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최기석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40대 초반은 될 줄 알았던 최기석은 의외로 20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린 외모 때문인지 그의 실력에 살짝 의문이 들었다.
“업무 시간은 아니지만 특별히 출력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직원분이 된다고 하니까 여기서 서류 받은 다음 보험회사에 보내세요. 출력비는 안 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죠?”
“네. 맞습니다.”
“아이고, 고마워요 선생님.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헤매고 있었는데 덕분에 빨리 왔네요.”
“하하하. 병원이 워낙 넓으니까 그렇죠.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최기석이 떠난 후 최경환은 환자에게 진료비 상세 내역서를 뽑아 주었다. 작업을 끝내자 원무과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최 선생. 오늘은 접수 창구 좀 도와줘야겠는데?”
양주형 주임이 자리에 앉으며 그를 응시했다.
“접수요? 누가 휴가라도 갔나요?”
“그건 아니고 오늘부터 흉부외과 최 과장님이 진료를 시작했잖아. 엄청 바쁠 것 같아서.”
“그분 하나 때문에 갑자기 병원이 바빠질까요?”
최경환이 의문을 제기하자 양주형이 검지로 바깥을 가리켰다.
“하…….”
창문으로 접수창구를 확인한 그의 입이 악어처럼 벌어졌다.
접수시간이 한참 남았건만 대기석은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설마 저게 다 최 과장님 환자입니까?”
“혹시나 해서 몇 사람들한테 물어봤는데 맞아. 다 최 과장님을 보러 왔다고 하더라.”
“최 과장님이 그렇게 대단한 분이에요?”
“몰랐어?”
양주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흉부외과의사를 아이돌로 비교한다면 방탕소년단쯤 될걸?”
* * *
흉부외과 외래진료실.
최기석은 간호사 윤세정과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걸?’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결과 윤세정은 환자를 접대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환희의 미소라는 패시브는 환자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으며 기타 처치적인 스탯에서도 병동 간호사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간호부에서 에이스를 붙여 줬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장님. 저 잠깐 진료 스케줄 확인해 보고 올게요.”
“그래요.”
이윽고 외래 창구에서 복귀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벌써 진료시간이 다 잡혔는데요?”
“접수 이제 막 시작한 거 아니었어요?”
“네. 맞는데 환자들이 엄청나게 몰렸나 봐요. 원무과에서도 전화 왔는데 시간이 꽉 차서 진료 못 보고 돌아간 환자도 많데요.”
“야단났네. 선택진료가 아니라서 그런가? 환자들을 다른 교수님 앞으로 돌릴 순 없어요?”
“그게 최 과장님을 보러 온 거라 다른 교수님 진료는 안 받겠다고 하네요.”
“어쩔 수 없죠. 우리 둘이 힘내 봅시다.”
“네.”
각오를 다지는 사이 윤세정이 첫 번째 환자를 진료실로 들여보냈다.
환자의 이름은 박점례로 60세.
아들로 보이는 남성이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최 선생님을 보려고 부산에서 올라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죠?”
“어머니는 부산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대동맥판막 협착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입원해서 수술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병원 흉부외과에서 의료사고가 났습니다.”
“…….”
“의료사고가 터지니까 도무지 거기서 수술 받을 마음이 안 들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께 수술을 받고 싶어서 올라왔습니다.”
“잠시만요. 몇 가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최기석은 박점례를 청진하고 미리 등록한 심초음파 및 도플러 검사, 심혈관 조영술 결과를 살폈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침묵을 참지 못한 보호자가 입을 열었다.
“당장 입원하셔야겠습니다. 가능하면 수술도 이번 주 안으로 진행하는 게 좋겠군요.”
“그런데 어머님 나이도 있으신데 수술을 받아도 괜찮을까요?”
“일반적인 수술이라면 부담이 심하겠죠. 그래서 저는 조금 변칙적인 방법을 써 보려 합니다.”
“변칙적인 방법이요?”
“네. 무봉합 대동맥판막 치환술입니다.”
최기석의 설명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