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6)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최기석은 정설화와 병원 1층 로비를 둘러보았다. 메이죠나 의진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세원 병원의 인테리어 역시 훌륭한 편이었다.
안내 데스크와 수납창고, 각종 시설 등이 정갈하고 편안한 느낌을 풍겼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 보건복지부지정 심장전문병원을 강조하는 현수막이 내부에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동감.”
두 사람은 심장혈관 클리닉을 확인하고 각각 심장내과와 흉부외과로 헤어졌다.
“어머! 안녕하세요. 과장님.”
병동에 도착하자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최기석 과장님, 맞으시죠?”
“아, 네. 맞습니다.”
최기석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과장이라는 감투가 아직 낯설기만 했다.
MHC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직책은 교수였다.
위로는 송명진과 야사다와 같은 명의와 선배가 있었고 말이다. 이제 스스로 흉부외과를 꾸려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엄청 일찍 오셨네요. 레지던트보다도 빨리 오신 것 같은데.”
“예전부터 습관이 돼서요. 집무실은 어디에 있죠?”
“병동 끝에 가면 있는데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인턴 선생님 불러올게요.”
“괜찮습니다.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제 발로 가면 되죠.”
최기석은 씽긋 웃으며 병동 복도를 질러갔다.
동시에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병실 환자를 살폈다.
심부전증 환자, 관상동맥 협착증 환자, 심장판막 질환 환자, 폐암 환자 등등.
흉부외과 환자들이 치료 대기 중이었다.
수단에서 접하지 못했던 환자들, 드디어 전공으로 실력을 뽐낼 때가 왔다.
드르르륵.
복도를 반쯤 지나쳤을 때 한 간호사가 병실에서 나왔다.
익숙한 얼굴을 마주친 순간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강 쌤?”
“와우. 초 레지, 아니 초 과장님?”
강하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그녀는 의진대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간호사로 수련 시절 그를 초 인턴, 초 레지던트로 불렀던 발랄한 괴짜 간호사였다.
나중에는 숨겨 놓았던 뛰어난 수술 보조 실력으로 소독간호사로 활약, 세이버 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게 몇 년 만이죠?”
“한 오 년은 된 것 같아요. 이렇게 보니까 세월이 참 무상하네요. 코찔찔이 인턴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트리플 보드에 흉부외과 과장으로 복귀하다니.”
“…….”
“암행어사로 돌아온 이몽룡을 다시 만난 춘향이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요?”
강하나의 익살맞은 화법에 최기석은 그저 웃고 말았다.
못 본 동안 제법 그녀를 그리워했다.
주변에 그녀 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잘못 봤겠죠. 코를 찔찔 흘리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춘향이는 이미 임자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의 시선이 강하나의 왼쪽 약지에 고정되었다.
금빛 반지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후후후. 사실 이게 춘향전의 현실 버전이랍니다. 원래 여자를 외롭게 하면 벌 받는다고요. 요즘 어떤 여자가 남자 뒷바라지에 목매고 자기 인생을 포기하겠어요.”
“아무튼 반가워요, 강 쌤.”
최기석이 손을 내밀자 강하나가 그의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역시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흉부외과 과장이 되었다고 해서 그를 대하는 태도는 손톱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세이버 팀을 나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세원 병원에 온 줄은 몰랐어요.”
“이제 좀 편하게 살아보려고요. 세이버 팀이 하도 잘나가서 하루에 수술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제가 복귀했는데 다시 수술간호사로 올라올 거죠?”
“네?”
“모른 척하지 말고요. 제가 미국에서 있어 봤는데 강 쌤만 한 소독간호사는 없었던 말이에요.”
최기석이 그녀를 치켜세우자 그녀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의 말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 말인 즉 제가 미국에서도 먹힐 만한 인물이었다는 군요.”
“암요. 그렇고 말고요.”
“그럼 미국에 진출할래요!”
강하나의 폭탄선언에 최기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에요?”
“당연히 뻥이죠. 거기 가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요. 하여간 최 쌤, 아니 과장님 이야기는 생각해 볼게요. 저는 이만.”
멀어지는 강하나를 지켜보던 최기석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 없을 때는 최 쌤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그게 더 편하니까.”
“네.”
뒤돌아서 대답하는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대화를 마친 최기석이 집무실을 찾았다.
[흉부외과 과장 최기석]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책상에 있는 명패였다.
“흉부외과 과장이라…….”
그는 명패를 한 번 쓰다듬고서 가운을 걸쳤다.
의사 인생의 2막이 올랐다.
* * *
그날 오전.
진료시간보다 조금 앞서서 월례회의가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병원장의 한 말씀에 이어서 새로운 직원소개 순서가 왔다.
최기석은 단상에 올라 흉부외과 과장으로 취임하게 된 소감을 전했다. 세원 병원을 국내 최고의 흉부외과 병원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말했을 때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소개가 끝난 후 심장내과 조교수가 된 정설화의 소개가 이어졌다.
그녀에 대한 반응 역시 최기석 못지않게 뜨거웠다.
월례회의 무사히 마친 그는 병원장의 부름을 받아 병원장실로 이동했다.
병원장의 이름은 나상철.
과거 흉부외과를 전공했지만 지금은 진료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옆집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미소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세원 병원에 온 걸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하네.”
“…….”
“트리플 보드를 얻고 국내에서 첫 진료를 보려니 부담스럽지?”
“아니라고 못하겠습니다. 아마 여기저기서 물어뜯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군요.”
“그럴 거야. 유명세라는 거, 어떻게 보면 양날의 검이거든.”
나상철이 헛헛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지환 병원장님이 최 과장을 잘 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들어주라고 했고 말이야.”
“……그랬군요.”
“힘든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나한테 말해.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지원은 아끼지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나상철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세원 병원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국내 유일의 심장전문병원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근데 말이야. 그 타이틀 조만간 없어질지도 몰라.”
나상철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다음 달이면 근처에 다른 심장전문병원이 생겨. 그뿐만이 아니야. 보건복지부에서 올해 안에 우리 병원의 간판인 심장전문병원이라는 명칭 승인을 거두겠다는 이야기도 했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환자 회복률이 낮아서. 물론 그 이유는 우리 병원에 있는 의사들의 실력과 직결되어 있고.”
나상철이 말을 계속했다.
“최 과장이 보통 흉부외과 의사라고 생각해 봐. 가뜩이나 고생하고 비전이 없는 과인데 대학병원에 지원하겠나? 아니면 여기 일반 병원에 오겠나?”
“굳이 따지자면 대학병원으로 가겠죠.”
“바로 그거일세. 심장전문병원이라는 타이틀을 야심차게 걸었지만 정작 이곳에 실력 있는 의사들은 별로 없어. 실력이 애매한 의사들, 흉부외과 의원을 차렸다가 망한 의사들, 그 밖에 다양한 군상들이 몰려 있지. 변화가 없다면 우리 병원은 조만간 침몰할지도…….”
“…….”
“조 병원장님이 최 과장을 부른 것도 그 때문일 거야.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는 심장전문병원이 탄생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기석의 대답은 담담했지만 그의 눈 속에 담긴 심지는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이 친구라면…….’
나상철은 최기석을 쳐다보며 한 줌의 희망을 품었다.
사람에게는 무릇 자기 그릇에 맞는 역할이 있다.
최기석의 그릇을 봤을 때 그는 세원 병원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만한 힘이 있었다. 한국에서 인턴을 할 때는 물론이요, 미국에서도 각종 사건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부디 그가 홀대 받는 흉부외과의 처지를 조금이마나 구원해 주기를…….
나상철은 속으로 의료의 신에게 빌었다.
“내가 할 이야기는 여기까지네. 노인네 잔소리 듣느라 고생이 많았어.”
“아닙니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병원장과 대화를 마치고 병동으로 복귀해 오전 회의에 참석했다.
세원 병원 스태프는 다음과 같았다.
가자미 눈을 한 부교수와 다소 흐리멍덩한 인상을 지닌 조교수가 있었고 펠로우 세 명에 펠로우 수련 중인 사람이 두 명 있었다.
레지던트는 총 여섯 명에 인턴이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제 있네.’
최기석은 새 식구들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MHC에서 근무하는 동안 눈이 높아졌던 것일까.
아니면 이들의 실력이 좋지 않은 걸까.
의사 중 외과적 수치가 제일 높은 인물이 조교수인데 그마저도 레벨이 6단계였다. 그러니 평균 실력은 두말해야 입이 아픈 수준이었다.
병원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써전들의 실력부터 늘려야할 듯싶었다.
“최 과장. 특별히 할 말 있어요?”
조교수 김한철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향했다.
김한철은 40대 초반의 인물로 당연히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회의 내내 찌푸린 얼굴을 보면 어린놈이 자기 윗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에 배알이 꼴린 것 같았다.
“네. 있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스태프들의 호기심을 드러냈다.
“우선 제 외래진료 건부터 말씀드리죠. 병원 적응 차원에서 다음 주부터 외래진료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는데, 저는 당장 내일부터 외래진료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빨리요? 좀 더 쉬어도 되는데.”
“아닙니다. 저는 단 하루라도 병원 밥을 축내고 싶지 않습니다. 근무는 당장 내일부터 시작할 거고, 선택진료의가 아닌 일반의로 들어가겠습니다.”
그의 결정에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다들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선택진료란 환자들이 특정한 의사를 지정해서 진료를 보는 것을 말하는데 선택진료의는 다른 의사들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불어 환자가 선택진료의를 고르면 진료비에 일정부분 가산금이 붙었다.
“나도 특진의사인데 최 과장이 일반의로 들어가겠다고요? 그건 말도 안 돼요.”
“나도 반대입니다. 최 과장이 선택진료를 안 하면 병원 수익 측면에서도 큰 부담이 갈지 몰라요.”
김한철과 조교수 신지훈이 길길이 날뛰었다.
“진료비가 부담스러워서 저를 못 보는 환자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편이 오히려 병원홍보 차원에서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제 진료고 제 결정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최기석이 강하게 나가자 김한철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표정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개인면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면담 대상은 인턴부터 옆에 계신 교수님까지 전부 포함입니다. 예외는 없어요.”
“하…….”
“회의는 여기서 끝내고 다들 활기차게 근무 시작합시다. 인턴하고 레지던트들은 남아서 나랑 이야기 좀 해요.”
그의 말에 인턴과 레지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