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5)
“병원장님 오셨습니까?”
장혁필을 선두로 자리에 앉았던 세 사람이 일어나서 우르르 조지환 쪽으로 몰려갔다.
조지환은 손은 들어 인사에 답하고 최기석을 응시했다.
“…….”
“…….”
이어지는 무거운 침묵.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한 것은 거의 6년 만의 일이었다.
그것도 최기석이 한국에 왔을 때 주차장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었다.
이렇게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생겼다.
“얼굴을 보아하니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군.”
“힘든 일은 많았지만 잘 이겨냈습니다.”
“뭐. 그랬겠지. 언제나처럼.”
조지환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지고 말을 계속했다.
“잘 성장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설마 트리플 보드까지 딸 줄은 몰랐어. 미국에서 송 교수가 잘해 주던가?”
“송 교수님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저를 한결같이 지켜봐 주셨습니다. 미국이라고 다를 건 없죠.”
“그렇군. 자세한 이야기는 한잔하면서 하지.”
조지환과 장혁필이 나란히 앉았고 그 맞은편에 최기석과 김태식이, 이영호는 옆쪽에 자리를 따로 만들어서 앉았다.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최기석이 술병을 들자 조지환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조금 의외군. 우리가 이런 사이었나?”
“병원장님께 술을 따라 드린다고 제 손목이 부러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농담에 조지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최기석이 인턴 시절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맑은 웃음이었다.
쪼르륵.
소주잔을 채우면서 그는 슬쩍 조지환의 얼굴을 살폈다.
확실히 조지환은 예전의 조지환이 아니었다.
이마와 눈가의 주름은 더욱 깊어졌으며 얼굴 곳곳에 검버섯이 피어올랐다. 짙었던 흑발 사이로 희끗희끗한 새치가 보이기도 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이 얼굴이 고스란히 남은 느낌이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라면 표정이랄까, 분위기 같은 것이었다.
예전의 조지환은 독사처럼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곁에 있으면 그의 독니에 물릴 듯한 위압감을 뽐냈는데 지금은 그런 사나운 기운이 많이 사라졌다.
마치 독니가 빠진 살모사처럼.
“펠로우 수련이 끝난 후 수단에 다녀왔다면서?”
“네,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의료 환경과 복지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의사로써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한 반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나도 젊었을 적에는 NFC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 한 적이 있었지.”
조지환이 잔을 비우고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여기까지 왔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젊었을 때 다 해 보는 게 좋은 것 같더군. 나이를 먹으면 새로운 도전이 힘들어.”
“대신 병원장님은 탁월한 성취를 이루지 않으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병원장님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성공한 인생이십니다.”
장혁필이 조지환을 띄워 주며 술잔을 채웠다.
과연 정치력이 높은 장혁필다운 화술이었다.
반면 김태식과 이영호는 자리가 어색한지 아까부터 한 마디도 껴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와 송 교수가 함께 개발한 수술 이름이 호프 수술이라고 했나?”
“맞습니다.”
“큰일을 했어. 덕분에 심장이식 수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았으니까. 장 부원장, 우리 병원에서도 호프 수술 진행하고 있나?”
조지환이 장혁필을 바라봤다.
“한 달에 세 건 정도 꾸준히 집도하고 있습니다. 수술 경과도 좋은 편입니다.”
“잘된 일이야.”
조지환이 주도하는 대화가 계속됐다.
그가 질문을 던지면 다른 사람들이 대답하는 방식이었는데 장혁필이 적당한 추임새를 넣으며 화제를 유연하게 돌렸던 덕분에 이야기는 끊기지 않았다.
그렇게 조지환이 합석하고 한 시간이 지난 시점.
김태식과 이영호가 응급 콜을 받고 병원으로 돌아가면서 회식 인원이 세 명으로 줄었다.
“근황 이야기는 이쯤이면 될 것 같군.”
“따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내 성격 모르나? 영양가 없는 이야기는 질색이야. 용건이 없었다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조지환의 말에 최기석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 자리는 조지환이 자신을 끌어내기 위해 장혁필을 이용해 만든 자리였을 테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의진대 부속병원에 흉부외과 과장으로 가 줬으면 좋겠군.”
“부속병원이요?”
“부천에 있는 세원 병원이라고 들어봤나?”
“딱히 들은 건 없습니다.”
“세원 병원에 대한 건 내가 말해 줄게.”
장혁필의 설명이 이어졌다.
세원 병원.
의진대의 브랜치 병원 중 하나로 반독립 상태의 200 병상을 소유한 병원이다.
의진대에서 유일한 흉부외과 전문병원이며 심장에 관한 다양한 클리닉을 보유하고 있고 보건복지부가 정한 심장전문병원으로 인정받았다.
“지금의 자네라면 의진대보다는 세원병원이 더 어울릴 것 같군. 행동반경이 넓어질 테니까.”
“구체적인 조건을 듣고 싶습니다.”
“직책은 흉부외과 과장인데 사실상 병원장 바로 밑이라고 보면 돼. 봉급이 MHC만큼 크지는 않겠지만 국내에서는 최고 대우를 해 주겠네.”
조지환의 제안에 최기석이 턱을 쓸어내렸다.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의진대에서 기득권 의사들과 치고 박고 싸우느니 새로운 장소에서 새 출발을 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했다.
“살짝 끌리는군요.”
“허, 단번에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나를 여러 번 놀라게 만드는군.”
조지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을 비웠다.
그와 최기석의 관계는 물과 기름과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스승 송명진을 내쫓은 사람이, 그의 수련시절을 힘들 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자신이 아닌가.
그런데 최기석은 그런 자신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원수의 제안에 솔깃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간 속에 과거의 앙금을 묻어 버린 건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건지 조지환은 최기석의 속내를 도통 알 수 없었다.
“만약 제가 세원 병원에 간다면 인사권은 전부 제게 맡겨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
“제가 원하는 대로 그곳의 시스템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신 거죠?”
“마음대로 해. 세원 병원은 나랑 상관없어.”
“좋습니다. 그럼 저는 세원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다만 약속이 지키지 않을 경우 언제라도 다른 병원을 찾아볼 겁니다. 약속불이행에 대한 부분도 계약서에 명시했으면 좋겠습니다.”
“안 될 이유가 없지.”
최기석이 세원 병원 흉부외과 과장 자리를 수락하면서 이야기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조지환마저 자리를 떠나면서 최기석과 장혁필이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
“너 진심이야? 진짜 세원 병원에 가겠다고?”
장혁필의 언성이 올라갔다.
“조건이 좋으면 가는 거죠. 뭐.”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저 능구렁이가 네게 좋은 제안을 할 리가 없잖아.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꿍꿍이야 있겠죠.”
“그게 뭔데?”
“흉부외과가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요.”
“저 탐욕스러운 인간이 그런 생각을 가졌다고? 야.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병원장이 되기 전까지 저 인간이 한 짓을 생각해 봐.”
“…….”
“환자들 가려 받는 건 예사였고 VIP 우대에, 과장 자리를 놓고 나와 권일수 교수님을 경쟁시킨 것도 다 저 인간이야.”
“교수님 말씀 다 맞아요. 그런데 병원장이 된 후에는 뭔가 다른 점 못 느끼셨어요?
최기석의 질문에 장혁필이 미간을 찌푸렸다.
“병원장이 된 후라…….”
“…….”
“그러고 보니 병원장이 된 후부터는 성격이 많이 유순해지긴 했지. 환자를 생각하는 시스템도 몇 가지 만들었고. 하지만 그게 병원장을 믿을 이유는 안 돼.”
“제 생각은 교수님과 조금 달라요.”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의료인을 보면 성향이라는 스탯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향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각각 환자 중심, 성공 중심, 중립 성향이다.
놀라운 것은 조지환의 성향이 환자 중심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지금껏 보여준 행동과는 정반대의 결과의 결과인 셈이다.
그래서 최기석은 생각했다.
조지환은 위악자라고.
그는 환자를 위한 마음을 품었음에도 일부러 성공 중심의 의사처럼 행동해 왔을 게 분명했다.
그에 대한 근거는 과거 장혁필이 밝힌 조지환의 과거에 있었다.
[부병원장님이 레지던트 3년 차일 때 큰 사건이 하나 있었대. 당시 의진대 병원 응급실로 한 남자가 실려 왔는데 남자는 교통사고로 심각한 흉부 외상을 입었어.]
[부병원장님은 남자를 진료 후 수술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치프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당시 흉부외과 과장에게 연락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싸늘했지.]
[수술하지 말고 다른 병원으로 돌려.]
[네? 과장님! 이 환자는 당장 수술이 필요합니다! 이송 도중에 죽고 말 겁니다.]
[조지환. 내 말이 우습게 들려?]
[네가 노티한 대로라면 수술해도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쓸데없이 환자 사망률 높이지 말고 당장 이송 보내. 보호자에게는 응급수술이 밀렸다고 대충 둘러대고.]
[과장님. 그래도 환자가······.]
[의사 생활하기 싫어?]
[······.]
[정 답답하면 네가 직접 수술하든가. 왜? 그건 또 자신이 없나? 더 이상 입 아프게 하지 말고 끊어.]
[이후 부병원장님은 인근 대학병원에 연락하고 환자와 보호자와 함께 응급실을 찾았지. 그런데 미리 연락했음에도 그쪽 대학병원 역시 수술을 거부했어.
[그리고 두 번의 퇴짜를 맞고 찾아간 세 번째 병원 응급실에서 환자는 죽었대.]
이 사건이 조지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을 건 불 보듯 뻔했다.
보통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력이 높으며 성공 중심인 경우가 많은데 이를 간파한 조지환은 스스로를 구정물에 빠트린 후 그곳에서 뒹굴었을 확률이 높았다.
더불어 병원장이 된 이후 표독스런 모습이 사라진 것 또한 다른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병원장이 원래는 착한 사람이었다는 거?”
“믿기 힘들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 혼란스럽네.”
장혁필이 얼굴을 구기며 잔을 비웠다.
“네 말에 백 퍼센트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닌 것 같다.”
“세원 병원에 가도 상관없다는 뜻이죠?”
“어차피 말려도 안 들을 거면서.”
“그건 그렇지만 교수님이 허락하면 마음이 편해지잖아요. 책임을 피할 구석도 생기고.”
“미꾸라지 같은 자식.”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너야 어디에 있든 잘할 테니까 걱정은 안 된다. 하지만…….”
“…….”
“영호나 태식이 빼 갈 생각은 하지 마. 혼난다.”
“후후후. 글쎄요.”
최기석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최기석은 이른 아침부터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멈춘 곳은 영등포역 횡단보도.
횡단보도 옆에는 단정한 복장의 정설화가 서 있었다.
“여보야!”
최기석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정설화가 허겁지겁 달려와 조수석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 다 듣잖아.”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데?”
그는 정설화의 안전벨트를 메어 주고 다시 차를 몰았다.
“첫 출근인데 기분은 어때?”
“아주 조금 긴장 돼. 나는 계속 의진대에서만 일했잖아. 다른 병원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니까.”
“우리 여보는 수단에서도 알아줬는데 한국에 있는 병원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그의 농담에 정설화의 굳었던 표정이 다소 풀렸다.
며칠 전 두 사람은 조지환을 찾아가 세원 병원 근무 계약서를 작성했다.
최기석은 약속한 조건을 계약서에 명시한 후 흉부외과 과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정설화는 그보다 조금 조건이 떨어졌지만 심장내과 조교수를 맡았다.
두 사람 모두 나이와 경력에 비해 높은 직책을 얻은 셈이었다.
“다 왔다.”
“벌써?”
“저기야 저기.”
최기석은 세원 병원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세계 유일의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 최기석 과장님. 흉부외과 진료 시작.]
낯 뜨거운 현수막이 가장 먼저 두 사람을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