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4)
최기석과 정설화는 택시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오랜만에 복귀해서일까.
그의 눈동자는 서울의 야경을 쫓느라 분주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 거리를 걷는 가지각색의 사람들,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간판 등등.
수단에서 3개월 활동했을 뿐이지만 익숙했던 서울의 광경이 너무나 낯설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신기해?”
“아주 많이.”
말을 마친 그는 창 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나저나 우리 어디로 가?”
“배고프니까 저녁부터 먹자. 내가 아주 끝내주는 레스토랑 예약해 뒀거든.”
“벌써?”
“거기 셰프가 나랑 친해. 빈자리는 언제든지 만들 수 있어.”
“셰프랑도 인연이 있었구나.”
정설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잠시 후 택시에서 내려 향한 곳은 신도림에 위치한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장사가 잘 되는 곳인지 레스토랑 대기석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 뒤로도 줄이 이어졌다.
“오늘 오전에 예약한 최기석입니다.”
“안녕하세요. 수석 세프님이 의료봉사 하러 가셨다고 하던데, 이제 돌아 오셨나 봐요?”
“네. 공항에서 바로 왔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매니저 장태현이 먼저 예약석으로 이동했고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이후 메뉴를 주문하고 대화하는데 익숙한 얼굴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남자는 셰프 복장을 한 상태로 얼굴이 땀으로 흥건했는데 요리하다가 뛰쳐나온 듯했다.
“…….”
“…….”
남자와 최기석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입은 연 것은 셰프 쪽이었다.
“형. 왔구나.”
“그래. 잘 지냈지?”
“나야 별일 있겠어? 별일이 있다면 항상 형 쪽이겠지.”
최기석과 남자가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정설화는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야. 여기 준기 씨 일하는 레스토랑이었어?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놀라게 해주려고 말 안 했지.”
“반가워요, 준기 씨. 오랜만이에요.”
“오랜 만입니다, 형수님.”
최준기가 정설화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최준기는 최기석의 친동생으로 유명 셰프 밑에서 최근까지 수련하다가 독립했다.
최기석의 지원을 받아 레스토랑을 차린 그는 이곳의 경영자이자 수석 셰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정설화와 최준기는 과거 최기석의 주선으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형이 아직 프로포즈 안 했나요?”
“……아, 네.”
“형. 형수님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남자답게 팍팍 진도를 빼야지.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연애만 하려고. 현재 유일한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라면서 사람 마음은 왜 이렇게 몰라?”
동생의 대거리에 최기석은 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못 보던 사이 요리 실력이 아니라 입담이 늘어난 것 같았다.
“넌 가만히 있어. 형이 알아서 할게.”
“하여간 말로는 뭘 못 해. 하여간 형수님 그만 괴롭히고 빨리 결혼해. 엄마 아빠도 은근히 결혼을 바라는 눈치더라.”
“네, 네. 알겠습니다. 근데 잔소리는 그만하시고 음식 좀 내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가 지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거든요.”
“알았어. 형수님. 제일 비싼 요리로 준비해 드릴게요.”
“고마워요, 준기 씨.”
최준기가 사라지가 정설화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준기 씨 성격이 원래 저랬나? 전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아.”
“자기 가게를 가져서 그런가 봐.”
최기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그렇고 당분간은 강제로 휴식하겠네. 기석이 네가 병원을 정해야 내가 그쪽 심장내과로 들어갈 테니까.”
“…….”
“아직 병원 못 정했지?”
“응.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구해야지. 쉬는 건 성격에 안 맞으니까.”
“의진대에 돌아가는 건 어때? 제일 만만한 건 그쪽일 것 같긴 한데…….”
“의진대라…….”
물을 한 모금 마신 그가 턱을 쓸어내렸다.
MHC를 제외하면 가장 애착을 가진 병원이 의진대였다.
그는 의진대에서 인턴과 백일 당직을 마쳤으며 그동안 갖가지 게임 능력을 발전시켰다. 장혁필과 김태식 등의 실력 있고 믿음직한 동료들을 얻기도 했고 말이다.
“일단 의진대는 아웃이야.”
“왜?”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
“일하기는 편하지 않을까?”
“뭐. 편한 게 능사는 아니지. 한 가지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잘될지는 모르겠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요리가 나왔다.
두 사람은 최준기의 설명을 들으며 코스 요리를 맛보았다.
수단에서 간편한 식사를 하다가 간만에 제대로 된 요리를 먹으니 음식이 정신없이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알콩달콩 주고받던 이야기도 어느새 끊어졌다.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최준기와 따로 자리를 내서 잠시 대화를 나눈 후 근처 호텔로 향했다.
낭만적인 야경 속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된 최기석과 정설화.
두 사람은 밤새 뜨거운 사랑을 확인했다.
* * *
다음 날 오후.
최기석은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볼록한 배를 매만지며 하품했다.
방금 막 어머니와 점심식사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점심 메뉴는 추억의 중국음식.
심장이식 수술을 받고 퇴원 후 가장 먼저 먹었던 음식이었다. 식사는 어머니 직장 근처에서 이뤄졌으며 아버지는 지방출장을 나가서 함께하지 못했다.
“아. 죽겠네.”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 지루함이 잔뜩 묻어났다.
지금으로부터 딱 이틀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쉴 틈 없이 환자를 받고 지뢰를 밟은 사람의 발목 수술을 하기도 했다.
그 치열한 삶에서 아주 잠깐 물러났음에도 권태감이 무서운 기세로 덮쳐 왔다.
심지어 일상에 환자를 끌고 오던 환타 칭호마저 깜깜무소식이니 말 다했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최기석은 정설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의진대 동기들과 잠깐 쇼핑을 나왔으며 저녁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고 알려왔다.
‘나도 가만있으면 안 되겠다.’
나갈 채비를 하던 그는 베개 밑에 두었던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 통화를 연결했다.
“안녕하세요. 진료부원장님.”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 그랬잖아. 거리감 느껴지게 왜 그러니.]
장혁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의료봉사 끝나고 돌아왔다며? 근데 왜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 그새 날 잊었니?]
“그럴 리가요. 안 그래도 막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한 3초만 빨랐으면 제가 먼저 전화했을 걸요?”
[이 자식. 트리플 보드를 따더니 뻔뻔해졌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태식이랑 영호까지 불러서 오랜만에 한잔하자.]
“그래도 돼요? 그 둘이 빠지면 과가 힘들어질 것 같은데. 의진대 흉부외과는 최근 2년 동안 레지던트도 못 뽑았다면서요.”
[뭐. 지원자가 없었으니까.]
장혁필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의 직책이 진료부원장이라고는 해도 태생은 흉부외과의였다.
흉부외과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이랑 정재영(정신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인기는 죽을 줄 모르네.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
[네가 좀 어떻게 해 봐. 이러다 젊은 흉부외과 의사들 씨가 마르겠어]
“최대한 노력해야죠. 한국에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니까요.”
[말만으로도 고맙다. 하여간 저녁 때 시간은 되는 거지?]
“물론이죠.”
저녁 약속을 잡은 최기석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흉부외과에 대한 기사를 검색했다.
그가 미국에서 수련했던 근 6년 동안 한국 흉부외과의 사정은 조금도 나아진 게 없었다.
전공의 지원율은 비뇨기과와 더불어 최하를 찍었으며 여전히 저수가로 고통 받고 있었다.
지원자가 없었기에 기존 의사들의 근무환경 또한 바닥을 쳤다. 그사이 늘어난 건 그저 흉부외과의를 소재로 한 드라마뿐이었다.
그는 검색을 마친 후 침대에 누워 트레이닝 룸에 접속했다.
그리고 약속시간이 될 때까지 수련에 나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련을 마친 그는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약속장소는 의진대 병원 인근에 위치한 고깃집.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선배!”
“기석이 오랜만이다.”
“못 본 사이에 듬직해 졌는걸?”
이영호와 장혁필, 김태식이 한마디씩 했고 최기석은 세 사람에게 인사하며 이영호 옆에 앉았다.
“흉부외과 픽스턴을 고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네가 벌써 펠로우라니. 믿기질 않는다.”
“저도 그래요.”
이영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전 당했어요. 선배만 없었으면 흉부외과 전공 안 했을 텐데.”
“이제 와서 원망해도 늦었다. 넌 이미 흉부외과의 늪에 빠졌어.”
“농담이에요, 농담. 저 사실 흉부외과에 온 거 후회 안 해요. 생활은 힘들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는 걸요.”
“머리 컸다고 제법 멋있는 말도 할 줄 아네?”
최기석의 말에 터지는 웃음.
술이 들어가기도 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짜식.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머리가 큰 건 너도 마찬가지야. 세이버 팀에서 어시스트하던 네가 지금은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가 됐잖아.”
“…….”
“거기다 메이죠 클리닉 대주주라니. 오늘 술은 당연히 네가 사는 거지?”
“그럼요. 마음껏 드세요.”
장혁필의 말에 최기석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선배, 축하드려요. 얼마 전에 부교수 되셨다면서요?”
“아. 뭐, 그렇게 됐어.”
김태식이 쑥스러워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가 수련하는 동안 김태식은 꾸준히 실력을 키웠으며 얼마 전에는 의진대 흉부외과 부교수를 맡게 되었다.
“과장님이 날 잘 봐주셨던 것도 있고 장 교수님이 날 밀어주셨던 것도 있고. 다 잘 맞아 떨어졌지.”
“선배가 실력이 있어서 그렇죠. 아무나 부교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제 슬슬 음식 시키자. 나 배고프다.”
장혁필이 나서서 주문을 했다.
치이이이익.
고기가 맛있게 익어 갔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면서 대화 역시 무르익었다.
의진대에서 함께 추억을 쌓은 네 사람이었기에 하고 싶은 이야기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났다.
그 때문인지 두 시간 가까이 계속된 술자리에서 어색한 침묵이 감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운이 좋네. 하늘이 돕나 봐.”
“무슨 뜻이에요?”
“응급 콜이 없잖아. 한 세 달 전인가, 회식 중에 대동맥 박리 환자 콜이 와서 급하게 수술 들어간 적이 있거든.”
“휴우…… 우리는 언제쯤 맘 편안하게 회식을 할까요?”
김태식의 말에 이영호가 한 마디 덧붙였다.
“잠깐. 다들 주목!”
장혁필이 세 사람을 주의를 끌며 말을 이었다.
“방금 메시지가 왔는데 이 자리에 한 분이 더 올 것 같다.”
“한 분이라고 말씀하시니까 등골이 싸늘해지는데요? 혹시 불청객?”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우리 입장에서는 불청객이라고 봐야겠지. 그래도 그걸 거부할 힘이 내겐 없다.”
“…….”
“너무 취한 내색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장혁필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종 소리와 함께 한 남성이 고깃집으로 들어왔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최기석은 그저 웃고 말았다.
과거의 숙적.
현재 의진대 병원장을 맡고 있는 조지환.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