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3)
“다들 고생했습니다.”
최기석은 손에서 메스를 놓고 아부디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결과 경과가 양호로 떠올랐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증거였다.
집도 중간 CPR을 진행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지만 이를 넘긴 후의 과정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수도병원에서 온 보조 스태프들도 한 몫 단단히 했다.
지이이잉.
수술실 문이 열리고 스태프들이 쏟아졌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보마니는 앞서 가는 최기석을 지켜보며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OPCAB이 어떤 수술인가.
인공심폐기를 작동시키지 않아 거칠게 뛰는 심장.
그 속에서 새로운 우회로를 만드는 수술이 아닌가.
수술 과정이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처치에 정교함이 필요했다. 그래서 흉부외과 써전의 순수한 피지컬을 시험하는 수술이 OPCAB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OPCAB를 최기석은 90분 만에 끝냈다.
수도병원 흉부외과 과장조차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가까이 걸리는 수술 시간을 세 배 가까이 단축시켰다.
더욱 놀라운 건 수술 시간을 단축했음에도 정확도가 흠 잡을 데 없다는 점이었다.
“…….”
“…….”
문득 후배와 눈이 마주쳤는데 후배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느낀 감정을 후배 또한 느끼는 듯했다.
“선배. 사실 저도 트리플 보드가 목표였는데 안 될 것 같아요. 저렇게 하려면 열 번은 죽었다가 깨어나야 할 것 같은데요?”
“글쎄. 그래도 안 될걸?”
보마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 * *
아부디의 OPCAB이 끝난 지 이 주가 지났다.
그는 경이로운 속도로 회복하여 닷새부터 걷을 수 있게 되었다. 수술 결과에 대만족한 그는 최기석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수면병 치료제에 관심을 보였다.
그 결과 클레드 제약회사와 아부디의 미팅이 오베이드 호스피탈에서 진행되었다.
치료제 가격을 두고 잡음이 일어났지만 최기석의 중재로 큰 불화 없이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아부디는 만족스러운 치료제 가격을 설정할 수 있었고, 클레드 제약회사는 본인들이 개발한 수면병 치료제를 수단 정부의 공식 치료제로 인정받았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한 최기석.
그는 진료와 더불어 동영상을 꾸준히 촬영해 뉴튜브에 올렸다.
사람들의 감정을 억지로 자극하지 않는, 현실적인 동영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계정을 찾았다.
일주일에 두 번 올리는 동영상은 올릴 때마다 조회수 100만을 돌파했으며 후원 문의가 쇄도했다.
그렇게 최기석은 의사로는 최초로 뉴튜브 골드 버튼을 얻는 쾌거를 얻었다.
그사이 클레드 제약회사는 수면병 치료제 재생산에 들어갔으며 수단 정부는 이를 수단 내 모든 병원에 공급했다.
악명 높은 멜라소프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 덕에 아브나는 부작용 없는 신약으로 순조롭게 수면병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열약한 환경 속에서 계속되는 의료 활동.
최기석은 주변을 탓하지 않고 자신과 동료들에게 의지하며 시련을 이겨 나갔다.
묻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
그들이 마주한 다급한 생존의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넓어졌다.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절대로 얻지 못할 깨달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개월의 단기 미션 마지막 저녁이 찾아왔다.
최기석은 진료실을 정리하고 후임자에게 병원을 소개시켜 주었다.
“여기서 3개월을 버티셨다고요?”
소개가 끝나자 일본인 의사 타이세이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그의 반응이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자신의 반응과 똑같았기에 최기석은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입원실은 환자랑 보호자로 득실거리는 데다가 수술실은 한 군데밖에 없잖아요. 더군다나 환자랑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니고요.”
“일본과 비교하면 여기서 못 지내요. 많은 걸 내려놔야 할 겁니다.”
“정말 각오 단단히 해야겠군요.”
“그래야죠. 다만 잘 버틸 수 있다면 얻어 가는 게 많을 거예요. 그거 하나만큼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타이세이와 대화를 마친 최기석은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복도를 걷던 중 우연치 않게 근무 준비 중인 아브나를 마주쳤다.
“아브나. 일주일은 더 쉬라고 했던 것 같은데…….”
“몸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침대에 3개월 넘게 누워 있는 것도 고통이라고요.”
“왜 모르겠어요.”
그는 아브나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진단명에 수면병은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수면병을 물리치고 건강을 되찾았다.
수면병 치료제를 개발할 때까지 악착같이 버텨 준 그녀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이 근무 마지막 날이죠?”
“네. 아쉽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요? 닥터 최는 MHC에서 근무하는 거 아니었나요?”
“한국에서 할 일이 있거든요.”
미국과 달리 한국의 흉부외과의 환경을 열약하기 그지없다.
우선 힘들고 고된 수술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한 악순환이 고질적으로 반복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미국에서 수련하는 동안 흉부외과의 처치는 손톱만큼도 나아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대학병원에서조차 흉부외과 전공이 미달인 상황이다.
여전히 어둡기만 한국 흉부외과의 미래.
이것을 밝히는 게 그의 마지막 목표였다.
“닥터 최라면 어딜 가서든 잘하겠죠. 여기에서도 엄청난 일을 해냈잖아요.”
“칭찬을 들으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요?”
“또, 또 겸손해하신다.”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눈빛에 따뜻함이 깃들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수면병도 무사히 나았고…… 저는 앞으로 영영 닥터 최를 잊지 못할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띠링 하는 알림이 들렸다.
[레전드 아이템 아름다운 선물 상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상자를 개봉하면 대량의 P.P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저…… 저는 당직 교대 때문에 진료실로 가 봐야 될 것 같아요. 내일 봬요.”
아브나가 촉촉이 젖은 눈가를 훔치며 자리를 피했고 최기석은 그녀를 지켜보다가 상태창을 열었다.
휘이이잉.
아름다운 선물 상자를 개봉하자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500,000 P.P를 획득하셨습니다.]
순식간에 올라간 P.P를 확인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수련하며 모은 P.P가 오십만인데 아이템을 통해 이를 단번에 얻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게 당연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또 다른 아이템에게 옮겨졌다.
자살 시도했던 라빈을 도우면서 얻은 레전드 아이템 또 다른 삶이다. 또 다른 삶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P.P가 백만인데 이를 전부 모았다.
[레전드 아이템, 또 다른 삶.]
[백만 P.P를 소모하여 아이템 해방이 가능합니다. 해방 전까지 아이템의 효과는 알 수 없습니다.]
‘흐음…… 이걸 어쩐다?’
최기석은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막상 아이템을 사용할 기회가 오자 두려움이 앞섰다.
또 다른 삶이란 대체 무슨 뜻일까?
말 그래도 다른 사람이 되어 한 번 더 살아가는 걸까?
본래 정해진이었던 자신이 최기석이 되어 살게 된 것처럼?
그것도 아니면 죽지 않고 남들보다 더 오래 살게 되는 걸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호기심에 아이템을 개방하려하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또 다른 삶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지금 가진 능력치를 유지한 채 아이템 효과가 발동됩니다. 사용하지 않을 경우 사망 직전에 자동으로 아이템을 사용합니다.]
‘사망 직전에 아이템을 사용한다라…….’
최기석은 문구를 되뇌다가 상태창을 꺼 버렸다.
사망 직전에 아이템이 자동으로 발생한다면 굳이 지금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아이템을 쓸 용기가 없다는 게 정확하겠지만.
또 다른 삶을 사용하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보. 뭐해?”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정설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미션 마지막 날이 되니까 싱숭생숭하지?”
“어? 어.”
“우리 잠깐 걷자.”
먼저 팔짱을 낀 정설화와 병원을 나섰다.
노을 진 하늘은 아름다웠다.
우기가 지나가면서 후덥지근했던 바람에 선선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걷기 딱 좋은 날씨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병원 주변을 맴돌았다.
먼저 운을 뗀 건 최기석이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내일 떠난다는 게. 한 일주일 전쯤 병원에 온 것 같거든.”
“나도. 여기서 3개월이나 버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 시간이란 게 참 무섭네.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 버리잖아.”
“와우. 방금 한 말 조금 멋졌어. 시인 느낌이랄까?”
“칫! 놀리지 마.”
정설화가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꼬집었고 최기석은 호들갑을 떨며 아픈 척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네. 차가 고장 났을 때 암사자를 만나지 않았나, 미국에서는 본 적도 없는 환자들을 진료했고, 뉴튜브 동영상 촬영에 제약회사랑 정부를 이어주지를 않았나…….”
“바보. 납치당한 걸 빼놓으면 안 되지.”
최기석의 말에 정설화가 한 마디 덧붙였다.
“아. 참. 그게 있었구나.”
“있었구나가 아니잖아. 난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속이 새까매져.”
“미안.”
“솔직히 여보가 미안할 일은 아니야. 나쁜 건 너를 납치했던 그 사람들이지.”
당시 생각에 분했는지 팔짱을 낀 그녀의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 납치했던 사람들 어떻게 됐는지 알아?”
“들은 건 없지만 대충 알 것 같아.”
최기석이 말을 이었다.
최기석을 풀어 준 후 알디 패거리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인근에서 의료단체를 납치하는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알디가 선지자 행세를 관두고 조직을 해산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었다.
“뉴튜브는 어때?”
정설화가 화제를 돌렸다.
“오늘 마지막으로 동영상 올렸어. 구독자들이 많이 아쉬워하더라.”
“그동안 의료현장을 생생하게 촬영한 동영상은 없었으니까. 우리 여보 그동안 고생 많았어. 진료하기도 벅찰 텐데 동영상 촬영하고.”
그녀가 활짝 웃으며 최기석의 품에 안겼고 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한국에서의 계획은 정해 놨어?”
“아직. 오라는 데가 워낙 많아서 말이지. 빅 파이브 병원에서 서로 흉부외과 과장 자리를 주겠다고 난리야.”
“우리 여보가 어떤 사람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가?”
최기석은 정설화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석양을 응시했다.
석양이 짙어지는 가운데 그의 마지막 목표가 가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과 정설화는 짐을 싸느라 바빴다.
차를 타고 개인 공항으로 이동하는 시간, 거기서 다시 수도 공항으로 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서둘러야 했다.
빵빵해진 캐리어를 내려다보며 최기석은 생각에 잠겼다.
비록 3개월의 짧은 의료 활동이었지만 이곳에 정이 많이 들었다.
한국으로 떠난다는 사실이 마냥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준비 다 됐어?”
“응. 내려가자.”
두 사람은 기숙사를 떠나 1층 회의실로 이동했다.
회의실에는 병원장 네이마르를 비롯해 병원 스태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제 저녁 조촐한 송별식을 갖은데 이어 두 번째 모임이었다.
“최근 몇 달은 순식간에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아마 미스터 최와 미스 정이 병원에서 많은 일을 해 줬기 때문이겠죠.”
“…….”
“다른 스태프들도 저와 똑같은 생각일 겁니다.”
네이마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손을 감싸 쥐었다.
“병원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병원장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는 건 큰 영광이었어요.”
“하하하. 내가 할 소리를.”
네이마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미스터 최가 뉴튜브로 홍보해 준 덕분에 남수단 지부 후원금이 몇 십 배로 뛰었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수면병 치료제를 바꾼 건 다시없을 획기적인 사건이었죠. 솔직히 붙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억지로 참습니다.”
“…….”
“당신이 활동하기에 이곳은 너무 좁아요. 나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당부를 하고 싶은 말은…….”
뜸을 들이는 네이마르의 눈동자가 최기석과 정설화를 오갔다.
앞으로 건강하기를 바란다, 축복이 늘 함께하기를 기도하겠다 등등의 흔한 멘트가 따라올 줄 알았지만 약간의 반전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군요.”
“하하하하.”
“결혼해! 결혼해!”
네이마르의 말에 일부 스태프들은 깔깔 웃었고 또 일부는 박수나 휘파람을 불었다.
동료들의 장난에 정설화의 볼이 살구처럼 물들었다.
반면 최기석은 당당하게 정설화의 손을 잡았다.
“당연히 해야죠.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미스터 최, 이제 보니까 터프가이인데요?”
회의실에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고 두 사람은 번갈아서 스태프들에게 작별 인사를 전했다.
“두 사람 다 잘 가요.”
“한국에 가도 연락할게요.”
동료들은 병원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이 차에 올라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부우우우웅.
마침내 지프차가 병원을 빠져나갔다.
최기석과 정설화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려 작아지는 병원을 응시했다.
“기분이 묘하네. 떠날 때가 되면 뒤도 안 돌아볼 줄 알았는데.”
최기석이 말끝을 흐리는 정설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나도 그래. 한국에 돌아가도 여기 생각날 것 같아.”
“닥터 최. 한국으로 돌아간 후의 계획은 세워 둔 겁니까?”
잠자코 있던 나레카가 대화에 껴들었다.
“아직 확실한 건 없어요.”
“닥터 최 정도 되는 의사라면 오라는 데가 많을 것 같은데.”
“많기는 하지만 확 끌리는 곳은 없네요. 거취는 차근차근 생각해야죠.”
“그렇군요.”
나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잠시 끊긴 사이 옷에 넣어둔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번호를 확인한 최기석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최 선생. 오랜만이에요. 오늘이 의료봉사 끝나는 날 맞죠?]
“네. 안 그래도 차를 타고 개인 공항으로 이동하는 길입니다. 교수님은 별일 없으시죠?”
[MHC는 평화 그 자체죠. 최 선생이 대주주로 있는데 누가 감히 공작을 벌이겠어요.]
“야사다 치프나 권일수 교수님도 잘 지내시나요?”
[물론이죠. 걱정할 게 없어서 그런지 요즘 들어 부쩍 살이 쪘어요. 다이어트를 한다나 뭐라나.]
스승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MHC의 대주주가 된 후 MHC는 진정한 환자 중심의 병원으로 돌아갔다.
최근에 있었던 미국 흉부외과 평가에서도 압도적인 1등을 차지했다고 들었다.
[그나저나 최 선생. 얼마 전 조지환 병원장이 나한테 연락을 했어요.]
조지환.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
머릿속에 앨범이 있다면 분명 그 사진의 색은 바랬으리라.
그는 최기석이 인턴시절 의진대 조교수를 맡았으며 나중에는 스승을 쫓아내고 흉부외과 과장이 되었다.
지금은 의진대 병원장으로 재직 중이고 말이다.
[그 사람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압니까?]
“아마 예전 일을 사과하지 않았을까요?”
[그…… 그걸 어떻게 알았죠? 나 말고 조 병원장이랑 먼저 통화했어요?]
“그럴 리가요. 저는 조 병원장의 번호도 모릅니다.”
조지환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고 최기석은 예전부터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
조지환의 행보를 예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놀랐어요. 그 사람이 나한테 사과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오죽하면 통화 도중에 해가 서쪽에 떴나 확인까지 했겠어요.]
“제가 교수님 입장이어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최 선생이 조금 싱겁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때 통화로 지난 앙금은 다 풀었습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건 좋지 않아요. 자기 몸에 불을 붙이는 꼴이거든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라면 그렇게 못했을 겁니다. 조 병원장의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최 선생 연락처를 달라고 하더군요. 최 선생이 허락하면 알려 줄 생각입니다.]
“알려 주셔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또 의외네요. 난 최 선생이 조 병원장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맞습니다. 앞으로도 그 사람을 좋아할 일은 없겠죠. 하지만 상황이 조금 달라졌어요. 조 병원장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니까요.”
[적이 아니다라…… 의미심장한 말이군요.]
“미팅 후 다시 한 번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최 선생이 편한 대로 해요.]
최기석은 송명진과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통화를 끊었다.
“저기 좀 보세요!”
비포장 도로를 천천히 달리던 중 나레카가 검지로 한 곳을 가리켰다.
한 무리의 사자 떼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쟤, 그때 걔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정설화가 가리킨 사자를 보며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 무리 속에 유독 눈에 띄는 사자가 있었다.
뒷다리에 붕대를 감은 사자, 과거 최기석에게 치료를 받았던 암사자다.
“나레카 잠깐만 차를 세워 줄래요?”
“설마 사자를 보고 가자는 건가요?”
“맞는데요.”
최기석의 말에 나레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건 좀…… 그 녀석이 예전처럼 호의적이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일단 차만 세워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나레카가 차를 세우자 몇몇 사자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차를 향해 다가왔다.
물론 그중에는 예전에 치료했던 암사자도 포함되었다.
그르르르릉.
차에 밀착한 암사자가 몸을 세워서 앞발로 차를 긁어 댔는데 그 모습이 꼭 고양이가 앙탈을 부리는 것 같았다.
최기석은 정설화와 나레카를 한참 설득한 후 혼자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자 암사자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발밑에 머리를 비볐다.
“귀여운 녀석. 영락없는 고양이네.”
암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흙먼지로 뒤덮인 붕대를 걷어 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 흉물스럽던 상처 위로 분홍색 속살이 차올랐다.
다행히 감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암사자의 애교를 받아주는 사이, 이번에는 조금 멀리서 그를 지켜보던 수사자가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상체를 일으켜 최기석을 덮쳤다.
자칫 위험천만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애교를 위한 전초전이었다.
수사자는 몸을 세운 채 최기석의 얼굴을 혀로 핥았다.
“야. 그만해! 그만하라고.”
최기석이 수사자의 얼굴을 슬쩍 밀었지만 수사자는 꿋꿋하게 얼굴을 내밀어 혀를 핥으려 했다.
이를 신호로 주변에 있던 사자들까지 우르르 몰려와 최기석에게 교태를 부렸다.
“닥터 정.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닥터 최가 의사를 하기 전에 사육사도 했나요?”
“그럴 리가요. 의대 나오고 바로 병원에 취업하는데.”
“근데 왜 저 무서운 사자들이 닥터 최를 보면 사족을 못 쓰죠?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정설화는 사자들과 놀아 주는 최기석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전생에 사자가 아니었을까요?”
* * *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최기석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한 가지는 준비를 통해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었지만 남은 한 가지가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흉부외과의 열약한 처우를 개선하는 일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계획의 첫 단추는 바로 근무할 병원을 찾는 것인데 이게 그리 쉽지가 않았다.
가장 무난한 건 대학 병원 흉부외과 과장으로 들어가는 일이지만 썩 끌리지는 않았다.
대학병원에는 이미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존재했다.
비록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라는 타이틀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환자를 살피는 것과 병원 내 권력관계를 주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기에.
두 가지가 같은 종류의 일이었다면 스승 송명진이 의진대를 떠날 이유도 없었다.
‘만만치 않네.’
최기석이 턱을 쓸어내렸다.
사실 MHC의 지분을 일부 빼서 병원을 지어 볼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병원을 짓는데 걸리는 시간을 무시할 수 없으며 진료뿐 아니라 병원 경영에도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환자와 흉부외과 처우 개선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생각에 빠진 사이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곤히 잠들었던 정설화의 어깨를 흔들었다.
“여보. 다 왔어.”
“흐으으음. 벌써?”
정설화가 졸린 눈을 비비며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바보. 사람들 보잖아.”
“뭐 어때? 어차피 넌 내 건데.”
모처럼 날린 닭살 멘트에 정설화가 부끄러운 듯 몸을 꼬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비행기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로비로 나왔다. 한국 사람과 한국어로 적힌 간판을 보고 있자니 한국으로 복귀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또 새로운 시작이구나.”
“걱정 돼?”
“아니. 너무 설레서.”
최기석은 캐리어를 끌고 정설화와 공항 로비를 벗어났다.
2년 만에 돌아온 한국.
그의 마지막 꿈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