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80화 (379/407)

매듭 (2)

“하아아아암.”

최기석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밤이 물러나고 동이 트고 있었다.

자상 환자 수술을 끝낸 후 그는 밤새 환자를 keep(환자 곁을 지키는 일)했다. 환자에게 감시 장치를 달 수 없었기에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해서 환자를 지켜본 것이다.

그의 걱정과 달리 환자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으며 지금은 상태가 보통으로 올라왔다.

‘에크모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최기석은 환자를 내려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큰일이 발생할 때마다 최신 의료기기가 눈에 아른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스터 최. 밤샌 겁니까?”

에비앙이 병실로 들어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오늘 중요한 수술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밤새고 수술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무조건 해야죠.”

“허 참. 괜찮으면 커피라도 한잔하죠.”

“좋습니다.”

두 사람은 2층 휴게실로 이동했다.

오베이드 호스피탈의 휴게실은 다른 병원 휴게실에 비해 단출했는데, 소파 두 개와 커피머신, 작은 테이블 하나만 놓여 있어 황량한 분위기를 뽐냈다.

“앉아 있어요. 커피는 내가 준비할 테니까.”

“고마워요.”

“고마워해야 하는 건 접니다. 미스터 최가 아니었으면 환자는 죽었을 테니까요.”

얼마 뒤 에비앙이 그의 맞은편에 앉아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환자 상태는 어때요?”

“감염증이 있는 것 같아서 살짝 긴장했는데 지금은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래도 후송은 무리일 것 같으니 우리 병원에 계속 입원시키는 게 좋겠어요.”

최기석은 말을 마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쌉쌀한 커피 맛에 몽롱했던 의식이 차차 맑아졌다.

환자 바라기와 펫 하티의 도움을 받았지만 체력은 아직 4단계 수준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는 체력이 7단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지만 남수단에서는 충분한 체력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사실 미스터 최를 따로 불러낸 건 어제 일을 사과하기 위해서입니다.”

“사과요?”

“네. 수술을 돕기 위해 환자와 이곳을 찾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잖아요. 괜히 수술 도구나 떨어트리고 민폐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익숙한 수술 환경이었다면 에비앙도 보조를 잘했을 겁니다. 비좁은 앰뷸런스 안에서 우격다짐으로 수술을 하니 제 실력 발휘를 못할 수밖에요.”

“앰뷸런스에서 수술한 건 미스터 최도 처음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둘 사이에 실력 차이가 났을까요?”

에비앙의 지적에 최기석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고 에비앙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본인 입으로는 차마 이유를 말 못 하는군요. 그럼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쉽게 말해 미스터 최가 저보다 훌륭한 써전이기 때문입니다.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솜씨가 탄탄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

“뭐. 어쨌든 미스터 최를 지켜보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앞으로 의료봉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도 잡았고요. 더 이상 방관하는 의사는 되지 않을 겁니다.”

에비앙의 눈이 밝은 빛을 뿌렸다.

[환자를 부주의하게 보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소송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의료실력을 쌓을 수 있어요.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곳은 외과의에 솜씨를 향상 시킬 수 있는 수련의 장이 될 수도 있고, 집도 환경이 열악한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은 전부 에비앙의 몫이죠.]

어젯밤 최기석이 했던 조언이 가슴에 자리 잡았다.

의료봉사를 하는 동안 사라지지 않을 그 말은 분명 등대가 되어 주리라.

“에비앙이 얻은 게 있다면 다행이네요.”

“하하하. 저는 적십자에서 오전 진료가 있어서 그만 가 보겠습니다.”

“멀리 못 나가는 점 이해해 주세요.”

에비앙과 악수를 나누는 순간 띠링하는 알림음이 들렸다.

[신규 액티브 스킬 ZZUL이 형성되었습니다.]

[ZZUL Lv.1]

- 동료 스태프와의 상호작용으로 상대방의 능력을 향상 시킬 수 있습니다. 향상 시킬 수 있는 능력은 상태창으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스탯과 마음가짐을 포함합니다.

- 본인보다 스탯이 높은 상대에게는 ZZUL이 불가능합니다.

- 최대 5명의 스태프에게 성장의 표식을 남기며 이 표식을 가진 스태프의 스탯 능력치 상승폭이 3배로 증가합니다.

- 레벨이 상승할수록 능력치 상승폭이 증가합니다.

“미스터 최. 갑자기 왜 그래요?”

“아…… 아닙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에비앙을 보낸 최기석은 상태창을 살피며 턱을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생긴 액티브 스킬은 상당히 쓸 만했다.

의료란 혼자만 잘하면 만사형통인 영역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료들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스킬의 존재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스킬을 살피던 그는 곧 자리를 벗어나 보건부 장관 아부디가 있는 입원실로 이동했다.

“장관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뭐. 나쁘지는 않습니다. 잠도 잘 잤고요. 닥터 최야말로 좀 어떻습니까?”

“저도 나쁘지 않습니다.”

한마디씩 주고받은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제 수도병원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늘 정오 안으로 흉부외과 의사들을 보낸다고 하더군요.”

“마침 잘 됐네요. 오후에 바로 OPCAB에 들어가겠습니다. 금식 같은 수술 전 과정도 진행 중이었으니 문제될 게 없겠어요.”

“이거 참 영광이군요.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인 닥터 최에게 심장 수술을 받을 수 있다니.”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최기석이 운을 뗐다.

“장관님. 혹시 저번에 한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수면병 치료제에 관한 이야기였던가요?”

“맞습니다. 얼마 전 제 뉴튜브를 본 제약회사에서 연락을 해왔습니다. 수단 정부와 충분히 논의만 된다면 수면병 치료제를 재생산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제 대답은 그때와 똑같습니다. 수술만 무사히 끝내 주신다면 발 벗고 나서겠어요.”

“사실 그 말이 다시 듣고 싶었습니다.”

“수술에 자신이 있다는 거군요.”

“아니요. 사실 자신은 없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아부디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닥터 최. 이제 와서 무슨 소리입니까? 닥터 최가 시키는 대로 수술 도구까지 다 챙겨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면 저는…….”

“그러니까 제 말은…… 수술에 실패할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거 보기 좋게 한 방 먹었군요.”

아부디가 실소를 터뜨렸다.

“어쨌거나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오베이드 호스피탈을 찾은 게 결코 헛걸음이 아니라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최기석은 아부디와 대화를 마치고 진료실을 찾았다.

타 과 전공서적을 읽으며 시간을 때운 지 얼마 안 돼 환자들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예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대다수를 차지하는 산과 환자.

심한 설사와 피부병에 고통스러워하는 환자.

내전이라는 악몽으로 PTSD에 시달리는 환자 등등.

미국과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똑. 똑. 똑.

한숨 돌리고자 물통에 입을 댄 순간, 곧바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최기석은 물조차 편히 넘기지 못하고 환자를 받았다.

“왔구나.”

“안녕하세요. 선생님.”

진료의자에 앉은 어린 환자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특이하게도 환자의 어깨에는 커다란 짐 가방이 들려 있었다.

“부모님이 허락했나 보네?”

“네. 제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가서 동생 잘 보살피고 열심히 공부라고 하셨어요.”

“부모님 입장에서는 힘든 결정을 하셨구나. 그만큼 네가 더 잘해야 된다는 거 알지?”

“물론이죠!”

바두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이 메이죠에 미리 연락해 놨거든? 희귀질환 센터에 있는 스태프들이 내일 오전쯤 도착한다고 하더라. 그때까지 병원에서 푹 쉬고 있어.”

“동생 보러 가도 되죠?”

“물론.”

“헤헤. 입원실로 가 볼게요.”

진료실을 떠나는 바두를 보며 최기석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진료를 일찍 마치고 수도병원에서 온 흉부외과 의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베이드 호스피탈을 찾은 흉부외과의는 총 다섯 명으로 예상보다 숫자가 많았다.

“한 두 분 정도 오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이 오셨군요.”

“미스터 최의 집도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그냥 넘길 수 없죠. 과장님도 시간만 맞았다면 발 벗고 오셨을 겁니다.”

흉부외과 펠로우 보마니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관은 상관없는데 우리 병원에는 참관용 수술실이 없습니다. 설령 수술실에서 참관한다고 해도 가까이서 보기는 힘들 텐데요.”

“안 그래도 막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입니다.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오늘 보조 스태프는 우리 병원 스태프로만 구성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수술을 곁에서 도우면 멀찍이 떨어져 있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최기석이 흔쾌히 대답했다.

정설화에게 제1보조를 부탁하기는 했지만 진료 중인 그녀를 빼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수도병원 흉부외과 의사들이라면 충분히 믿음직스러운 사람들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는데 대부분 외과적 처치가 6~7단계에 육박하는 실력자들이었다.

“미스터 최. 초면에 이런 부탁하는 건 조금 그렇지만…… 사인 한 장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연예인도 아니고 스포츠 스타도 아닌데요?”

“대신 의료계의 스타죠. 저 사실 인턴 때 미스터 최가 호프 수술 라이브 시연하는 걸 봤습니다. 수술이 성공했을 때는 제가 집도한 것처럼 펑펑 울기도 했죠. 미스터 최는 저의 롤 모델입니다.”

“뭐. 정 원하신다면…….”

최기석은 멋쩍은 얼굴로 종이에 사인해서 보마니에게 건넸다. 이에 보마니는 보물을 얻은 듯 조심스럽게 사인을 의사 가운에 넣었다.

그 모습에서 격세지감을 느낀 최기석.

의진대에서 100일 당직을 서던 시절이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한데 그는 어느새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가 되었다.

“슬슬 이동하죠.”

최기석이 휴게실을 떠나자 나머지 흉부외과들이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이윽고 보건부 장관 아부디가 수술대에 누웠다.

환자 감시 장치 연결, 바이탈 체크, 수술 도구 준비, 전신마취 등의 과정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오직 흉부외과 의사들로만 이루어진 초호화 수술진의 위력이었다.

뚜두두둑.

최기석은 목을 꺾고 영혼의 눈물 초각성 효과를 발동했다.

[영혼의 눈물, 특수효과 초각성: 일시적으로 모든 처치 능력치 2단계 상승합니다. 지속시간은 반나절이며 초각성 효과가 끝나면 일시적으로 탈진에 빠집니다.]

초각성 효과를 사용하자 온몸에 청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정신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환자에게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고 수술하는 법은 뭐가 있을까.

어렵게 생각하면 머리 아플 수 있는 질문이지만 최기석은 수술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키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 수술 속도와 정확도는 반비례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이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킬 자신이 있었다.

“지금부터 관상동맥 협착증에 대한 OPCAB 수술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스태프가 수술 전 처치에 나섰다.

스으으으윽.

흉부와 복부 소독이 끝나자 환자의 몸에 방포가 씌워졌다.

“메스.”

최기석이 스태프가 건넨 메스를 손에 쥐었다.

수술등을 반사하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메스보다 그의 눈빛이 더 밝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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