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77화 (376/407)

소중한 추억 (5)

“네. 말씀하시죠.”

[제가 퓨디카이 영상을 즐겨 보는 편인데 그분께서 닥터 최 채널을 홍보해 주시더군요. 그래서 호기심에 들어가 봤는데 수면병 환자 동영상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찍은 영상입니다. 의료봉사를 하다 보니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말이죠.”

최기석의 말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선진국에서는 가볍게 치료할 질병이 많지만 이곳에서는 그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갑니다.”

[제 생각에도 참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동영상 말미에 수면병 치료를 위해 제약회사와 연락이 닿았으면 한다는 내용이 있던데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어 보고 싶습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그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DFMO를 재생산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싶어서요.”

[DFMO요?]

폰의 언성이 올라갔다.

단순히 되물어 보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지금 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었다.

[DFMO는 수익성이 없어서 생산 중단된 지 오래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요.]

“정말 그럴까요? 만약 재출시한 DFMO가 수단 정부의 공식 치료제로 지정된다고 해도 그럴까요?”

[흐음…….]

침음성을 흘리는 폰.

수화기 너머로 그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뭐. 공식 치료제로 지정된다면 충분히 고려해 볼 가치는 있군요. 하지만 DFMO와 멜라소프롤의 가격 차이는 2배 이상입니다. 정부에서 순순히 치료제를 바꿀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래서 말인데요. DFMO를 재생산하되 가격은 기존에 비해 절반가량 낮추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야 치료제를 바꾸는 명분이 생길 테니까요.”

[절반이라.]

“박리다매라고 볼 수 있죠. 수익성이 선진국만큼 좋지는 않겠지만 이것도 나름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점에서 말이죠?]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군요. 폰이 생각하는 제약회사의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폰이 피식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보통 돈에 환장한 회사로 생각하고 있죠.]

“제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겁니다. 클레드 제약회사에서 DFMO의 가격을 낮춰서 남수단에 공급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소비자를 생각하는 제약회사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 그 뿐만일까요?”

[…….]

“DFMO가 남수단에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면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DFMO를 공식치료제로 지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허허. 이것 참. 이거 오히려 제가 영업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원래 이렇게 말을 잘하십니까?]

“그렇게 접근하지 마세요. 저는 꿀 발린 말로 담당자님을 꾀어내는 게 아닙니다. 제약회사와 환자가 상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고자 할 뿐입니다.”

최기석의 열변에 폰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제약회사에 연락을 바란다는 동영상을 봤던 당시 그는 최기석을 그렇게 생각했다.

너도 별수 없구나.

메이죠의 대주주이자 현재 유일한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라 할지라도 결국 돈의 노예일 뿐이라고.

폰은 최기석이 신약을 유통하여 커미션을 챙기려 한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방금 전 그가 했던 말로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최기석이 커미션을 챙기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순수하게 수단의 복지를 걱정하고 있음을 느꼈다.

“말이 없는 걸 보니 제 제안이 탐탁지 않았나 보죠?”

[그럴 리가요? 제가 예상하고 있던 전개가 아니라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어쨌든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클레드 제약회사의 판단에 달린 셈이죠. 다만…….”

[다만?]

“저와 연락을 취한 회사가 벌써 세 군데나 더 있다는 걸 알아 두세요. 좋은 대화 나눴습니다. 그럼 이만.”

최기석은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다른 제약회사의 연락이 왔다는 건 물론 뻥이다. 하지만 이래야만 클레드 제약회사가 조급함을 느끼고 하루라도 빨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리라.

똑. 똑. 똑.

진료실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닥터 최. 바쁩니까?”

나레카가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요. 진료 끝나고 잠깐 쉬는 중이었어요.”

“괜찮으면 커피라도 한잔하실래요?”

“물론이죠.”

최기석은 진료실을 나와 나레카와 휴게실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휴게실 탁자에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이 이미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었다.

“사실 이거 숨겨놓고 저만 먹는 건데요. 특별히 닥터 최에게 대접하는 겁니다.”

“영광입니다. 잘 마실 게요.”

최기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눈썹을 치켜떴다.

과연 나레카의 말대로 숨겨 놓고 마실 만한 커피였다.

맛이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향이 환상적이었다. 커피에서는 달콤한 꽃향기가 났는데 커피를 마시기 전과 입에 머금었을 때의 향으로 온몸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어떻습니까?”

“말이 필요 없는데요?”

최기석이 엄지를 치켜세우자 나레카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납니다. 그 미친놈들 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게. 이상하게 거기서 겪었던 일이 현실 같고 병원에 복귀한 게 꿈같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으니까요.”

“다음에 또 그 녀석들을 마주치면 어쩌죠? 다시 살려 줄 것 같지는 않은데.”

“나레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걱정을 해서 걱정이 해결되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으음……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어법이네요.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가 되면 말도 그런 식으로 하나요?”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고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총으로 무장한 군인이 있는 곳이 아닌 오베이드 호스피탈이었다.

대화에 한결 여유가 묻어났다.

“일이 밀려서 바쁘지 않나요?”

“안 그래도 오전부터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생고생을 했습니다. 내일까지는 철야 근무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닥터 최는 어때요?”

“저야 일이 밀리지는 않죠.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대신 고생했을 뿐이죠.”

“그건 그렇고 뉴튜브 영상은 잘 봤습니다.”

나레카가 화제를 돌렸다.

“구독하기도 눌렀고 광고영상도 스킵하지 않고 끝까지 다 봤다니까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밖에 없는데.”

최기석은 나레카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기숙사로 올라갔다.

그리고 간단하게 세면을 마친 후 트레이닝 룸에 접속했다.

환경부 장관 아브디의 OPCAB 수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흉부외과 수술에 한동안 손을 놓았던 만큼 묵은 실력을 벗길 필요가 있었다.

[트레이닝 동영상으로 OPCAB을 선택하셨습니다. 수술 스태프의 난이도를 최하로 설정하셨습니다. 수술을 시작합니다.]

휘이이이잉.

광채와 함께 어느새 수술대 앞에 선 최기석.

그는 오랜 만에 OPCAB 수련에 나섰다.

OPCAB 집도는 생각보다 어려웠는데 그 이유는 그가 보조 스태프의 난이도를 하로 설정했던 탓이다.

가상의 스태프들의 한 박자 느린 처치와 어설픈 어시스트는 매번 그의 발목을 잡았다.

심외막 고정기로 지나치게 심장을 압박해 CPR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거나 혈관을 터뜨려서 응급출혈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쯤 되면 수술 스태프가 아니라 암살자가 아닌지 의심이 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최기석은 묵묵하게 집도를 이어 갔다.

외과적 처치가 일반 써전의 한계를 초월한 후에는 이런 식의 페널티를 만들어서 수술을 하곤 했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 현실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페널티 수련은 그에게 다가올 시련에 대항할 수 있게 하는 예방주사 역할을 했다.

얼마 뒤 수술을 끝낸 최기석이 손에 메스를 놓았다.

[OPCAB 수술이 완료되었습니다. 수술 완료시간 6시간, 최종 수술 랭크는 B입니다.]

익숙한 음성이 끝나고 시야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후아…….”

최기석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상의 스태프들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이들이 진짜 사람이었다면 의사소통이라도 했겠지만 그게 불가능했기에 먼 길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휴식을 취하던 그는 곧 1층 복도 끝에 위치한 진료실을 찾았다.

오늘은 정설화가 당직을 서는 날이다.

납치를 당해서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이 많았던 만큼 밤새 그녀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여보. 뭐해?”

“공부.”

책상에 앉아 있던 정설화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내가 방해가 됐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집중이 안 돼. 방금 적십자 병원에서 연락이 왔거든.”

“환자 후송 보낸대?”

“응. 마을 사람들끼리 싸우다가 칼부림이 벌어졌나 봐. 환자 흉부 외상이 심한데 그쪽에서 치료를 못하니까 부탁한다고 하더라.”

“내가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정설화의 곁에 앉았다. 그러자 정설화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을 품에 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환자 내가 볼 건데?”

“당직의가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 그리고 내과 환자가 아니라 외과 환자잖아.”

“안 돼. 우리 여보는 푹 쉬어. 납치당해서 고생도 많았는데.”

“됐거든요? 그 시간에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최기석은 정설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 온 지도 벌써 이 주가 다 되어가네?”

“그러게. 사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런 환경에서 계속 진료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

“의약품이나 소모품은 항상 부족하잖아. 심장내과 환자만 보는 것도 아니고 모든 과 진료를 보는 것도 부담스럽고.”

“…….”

“그래도 하다 보니까 익숙해지는 것 같아. 역시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인가 봐.”

“설화야.”

최기석이 정설화를 보며 운을 뗐다.

“날 사랑해 주는 것만으로도 너는 이미 보살이야.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고.”

“멍청이! 진지한 이야기 하는데 갑자기 뭐라는 거야!”

성난 듯한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입가에는 장난스런 미소가 걸려 있었다.

“흠흠. 이참에 우리만의 시간을 가져 볼까? 같이 못 잔 지도 꽤 오래됐잖아.”

“여…… 여기서?”

“안 될 게 뭐가 있어.”

최기석은 정설화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스킨십이 진해지면서 두 사람의 호흡이 가빠왔다.

정설화의 가운은 스르르 바닥에 떨어졌으며 옷자락은 점점 느슨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다.

노크 소리가 불청객처럼 두 사람을 찾았다.

“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두 사람은 허겁지겁 복장을 재정비하고 진료실로 찾아온 환자를 맞이했다. 적십자 병원에서 후송 보낸 환자가 아닐까 했지만 환자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예전 순회 진료에서 만난 바두가 어린 동생을 업고 병원까지 찾아왔다.

먼 길을 걸어와서 그런지 바두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선생님. 동생이 너무 아파요.”

“일단 거기 앉아.”

최기석은 바두와 그의 동생을 앉히고 물부터 먹였다. 그리고 환자인 동생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진단명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점점 경악에 물들었다.

코넬리아 디란지 증후군?

이건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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