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추억 (4)
그날 저녁.
최기석과 정설화는 네이마르의 집무실에서 네이마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기석은 납치를 당한 후 겪었던 일을 담담하게 전했다.
촌락의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마음을 얻은 일.
납치단체 수장의 동생이 총상을 입어 치료한 일.
수장의 충수돌기염을 직접 집도한 일 등등.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사연을 듣던 네이마르는 내내 최기석의 이야기에 감탄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세상에 그 어떤 의사가 납치를 당한 후에도 그처럼 의료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더욱 경이로운 것은 그가 납치당한 곳에서 제 발로 탈출했다는 점이었다.
“미스터 최.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고요.”
“이해합니다. 오베이드 호스피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럼 지금부터는 이쪽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겠어요.”
최기석은 이어지는 네이마르의 설명을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납치당했을 때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전개 방향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의외였던 점.
그것은 정설화가 석방금을 마련해서 납치단체와 직접 협상하려고 했다는 점뿐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위하고 있었는지 최기석은 새삼 피부로 느꼈다.
“아무래도 납치당한 저보다 여기 계신 분들이 더 고생이 많았던 것 같군요. 특히 설화 네가.”
최기석은 곁에 앉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당연하지. 네가 납치당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미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그였다.
비록 납치당한 게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힘들었던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첫날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잘 먹고 잘 잤습니다.”
“칫. 미워.”
“아야!”
정설화가 옆구리를 꼬집자 화끈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건 그렇고 그 납치단체의 위치,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번 기회에 싹을 뽑았으면 좋겠는데.”
“오는 길에 안대를 씌워서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습니다.”
“흐음…… 아쉽군요.”
네이마르가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하여간 무사히 돌아와 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덕분에 한시름 덜었어요.”
“병원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이마르와 대화를 끝낸 최기석은 정설화와 병원장실을 나왔다.
두 사람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바로 아브나의 병실이었다.
수면병의 영향인지 그녀는 아기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브나는 어때?”
“요즘 부쩍 힘들어해. 어제는 멜라소프로로 치료 받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어.”
“그랬구나.”
아브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납치를 당하지 않았다면 계획이 조금 더 빨리 진행될 수 있었거늘…….
안타깝지만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두 사람은 아브나를 지켜보다가 기숙사로 발길을 돌렸다.
쏴아아아아.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자 정설화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곁에 앉았다.
“납치당해서 있었던 일 자세히 말해 줘.”
“당연히 그래야지.”
그는 숙제검사를 받는 것처럼 그동안 겪었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털어놓았다. 이에 정설화는 마치 그 일을 자신이 겪은 것처럼 울고 웃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역시 우리 여보다운 스펙터클한 경험이었네. 영화로 찍어도 되겠다.”
“…….”
“만약 내가 잡혀갔으면 여보처럼 돌아오지는 못했을 것 같아. 그 열약한 상황에서 총상 환자와 충수돌기염 환자를 수술했잖아.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세계를 뒤져도 몇 없을 거야.”
정설화는 말을 마치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하여간 너무 좋아. 여보가 돌아와서.”
“나도 그래.”
최기석은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납치당해서 겪은 시련들이 싹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설화야. 오자마자 이런 이야기해서 미안한데, 부탁 한 가지만 해도 될까?”
“뭔데?”
“조만간 수단의 보건부 장관이 우리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을 거야. OPCAB(무심폐기 관상동맥 우회술)을 할 건데 네가 퍼스트를 서 줬으면 좋겠어.”
“우리 병원에서 OPCAB을?”
“응. CABG는 인공심폐기가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그걸 다른 병원에서 가지고 오는 것도 좀 그렇고. 그 밖에 여러 가지를 감안해도 OPCAB이 나을 것 같아.”
“좋아. 까짓 거 해 보지 뭐.”
정설화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사실 나도 우리 여보랑 같이 수술해 보고 싶었거든.”
“고마워.”
최기석은 정설화에게 OPCAB의 세부 수술 과정을 알려 주었고 정설화는 이를 메모하며 진지하게 들었다.
“나 잠깐만 쉴게.”
대화가 끝난 후 샤워를 마친 정설화가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는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꿈나라에 빠졌다.
미동조차 없이 잠에 빠진 모습에서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만약 납치를 당한 게 자신이 아니라 정설화였다면 마냥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을까.
아마 그녀를 걱정하느라 계속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는 정설화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훑어 주고서 책상에 앉았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앰뷸런스에서 챙겨 온 카메라를 노트북에 옮기는 일이었다.
자료를 옮기고 나서는 퓨디카이가 알려 준 편집자에게 동영상을 보내고 퓨디카이에게도 메일을 보냈다.
밤이 깊어 가는 가운데 수면병 신약을 구하기 위한 첫걸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납치를 당했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정상진료를 시작했다.
임신과 관련된 다양한 질환을 앓고 있는 산모들.
각종 설사병과 풍토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니 시간이 도둑맞은 것처럼 훌쩍 지나 버렸다.
그렇게 어느새 다가온 점심시간.
모처럼 생긴 여유시간에 최기석은 빵으로 허기를 때우며 노트북으로 자신의 뉴튜브 계정을 확인했다.
그의 계정에는 두 개의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하나는 오베이드 호스피탈의 열약한 입원 환경을 찍은 영상이고 다른 하나는 적십자 병원까지 가서 촬영한 수면병 환자들의 아픔을 담은 영상이었다.
‘역시 전문가한테 맡겨야 해.’
업로드한 동영상을 보며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카메라 앵글이 다소 엉성하고 산만하기는 했지만 편집자는 환상적인 기술로 동영상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간결하면서 눈에 확 들어오는 자막과 적재적소에 들어간 BGM.
그 밖에 자잘한 연출까지 더해지자 동영상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퓨디카이의 홍보가 더해지면서 구독자 수는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10만을 돌파했으며 동영상 조회수는 7만에 다다랐다.
댓글도 워낙 많았던 터라 최기석은 일일이 답변조차 할 수 없었다.
‘참 나.’
계정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던 그는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영상 조회수와 구독자 수에 집착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아마 뉴튜브를 생업으로 삼은 이들은 그보다 더 조회수와 구독자 수에 민감하리라.
‘제발 낚여 줘야 할 텐데…….’
최기석은 동영상에 덧붙인 자신의 댓글을 보며 애를 태웠다.
그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뉴튜브 계정을 만든 일은 반쪽짜리가 되고 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똑.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중년 남성과 수행원들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그 주인공은 수단의 보건부 장관 아부디였다.
“닥터 최.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방금 병원장을 만나고 오는 길인데 납치당했다가 풀려나왔다면서요?”
“아. 네. 운이 좋았죠.”
“허허.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이런 경우는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있는 일인데 말입니다.”
아부디는 진료의자에 앉아 최기석이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그의 말이 최기석에게 큰 울림을 주지는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부디는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이 기쁜 게 아니라 다시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로 기쁠 테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물론입니다. 수술 도구는 준비하셨죠?”
“심외막 고정기를 비롯해서 닥터 최가 적어 준 목록에 있는 물품을 전부 챙겨 왔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당장 입원하셔도 되겠군요. 몇 가지 검사 결과만 확인하고 최대한 빨리 수술 들어가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입니다. 아 참. 그런데 수도병원 쪽에서 이번 수술을 걱정하더군요.”
“어떤 점을 말입니까?”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닥터 최의 실력은 믿지만 당신을 받쳐 줄 스태프들에게 실력이 있는지 말입니다. 아무래도 오베이드 호스피탈에서 흉부외과의는 닥터 최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부디가 그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스태프 몇 명을 이쪽으로 보내고 싶다는데 어때요?”
“좋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죠.”
“하하하. 답변이 통쾌해서 좋군요.”
대화가 잠시 끊긴 사이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장관님. 이번 수술과는 별개지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수면병 치료약에 대해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금 남수단의 공식적인 수면병 치료제는 멜라소프로죠?”
“네. 값이 싸니까요.”
“혹시 치료제를 바꿀 생각은 없습니까?”
최기석의 제안에 아부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최기석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를 물끄러미 응시할 따름이었다.
“글쎄요. 지금으로써는 멜라소프로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약의 독성이 강해서 치료 도중 사망하는 환자가 있다는 건 알고 계실 텐데요.”
“그건 압니다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예전에 있던 치료제는 너무 비쌌어요. 더군다나 지금은 제약회사에서 그 약을 생산 중지했습니다.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어요.”
아부디가 딱 잘라 말했다.
“만약 제약회사가 수면병 치료제를 다시 생산한다면, 그리고 예전보다 가격을 조금 더 낮춘다면 공식 치료제로 사용하는 걸 고려해 볼 수 있습니까?”
“으음……. 그게 가능할까요? 돈이 안 돼서 철수한 시장에 제약회사가 다시 접근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드리는 말입니다. 제가 말한 대로 진행이 된다면 공식적인 수면병 치료제를 바꿀 의향은 있는 거죠?”
“닥터 최가 수술이 무사히 끝내 주기만 한다면 힘을 써 보겠어요.”
“장관님만 믿겠습니다.”
아부디와 대화를 마친 최기석은 그를 입원시키고 계속해서 환자를 받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진료가 이어졌다.
PTSD를 앓고 있는 환자를 처음으로 진찰하기도 했으며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 세 명을 치료급식센터에 보내기도 했다.
흉부외과 환자만 보는 게 아니라 진료를 버벅거릴 때도 있었지만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
띠리리리링.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환자가 빠지면서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전화가 울렸다.
“오베이드 호스피탈 기석 최입니다.”
[안녕하세요. 클레드 제약회사의 신약개발팀에 근무 중인 폰이라고 합니다. 뉴튜브 계정에 올린 글을 보고 연락 드렸는데요. 혹시 통화 가능하십니까?]
“물론입니다.”
대답하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드디어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