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추억 (3)
“닥터 최. 군인들이 빨리 텐트로 오라는데요?”
“안 그래도 진료가 막 끝났습니다.”
진료하던 환자에게 당부를 남긴 최기석은 나레카와 더불어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땀에 절어 텐트에 도착하자 얼굴이 파랗게 질린 알디가 눈에 띄었다.
올 것이 왔구나.
최기석은 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최. 방금 전 선지자님께서 쓰러졌습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복통이 조금 있었을 뿐이야.”
“제 눈에는 단순한 복통으로 안 보이는데요. 당신이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입니까?”
최기석의 지적에 알디가 착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지는 진료.
최기석은 알디의 이마에 손을 얹어 대략적인 온도를 체크했고 맥박을 확인했으며 알디를 눕혀서 그의 복부 사사분면을 차례대로 눌렀다.
“아아아악!”
우하복부를 누르자 알디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토해 냈다.
“나…… 날 죽일 셈인가?”
“죽일 생각은 없지만 이대로 있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 텐트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특히 나지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쉴 새 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알디는 충수돌기염을 앓고 있습니다. 촉진에 이만한 반응을 보인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염증 부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염증이 복막 전체로 퍼질 수 있어요. 복막염이 생긴다면 제아무리 큰 병원에 가도 살 수 없어요.”
“선지자께서 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가까운 병원에서 수술 받는 게 좋겠지만 저라면 여기서도 수술이 가능합니다.”
말을 마친 최기석이 충수돌기염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 알디가 코웃음을 쳤다.
“충수돌기염? 개수작을 떠는 군. 나를 불안하게 만들려고 병을 지어내는 거 다 알아.”
“명색이 선지자라는 사람이 속고만 살았습니까?”
“뭐라고? 너 죽고 싶어?”
“정 나를 못 믿겠으면 당신 몸이라도 믿는 게 어때요? 스스로 판단을 해 보라고요. 하룻밤 자고 나면 아픈 게 사라질 것 같은가요?”
최기석의 말에 알디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 복통을 앓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그동안 복통은 점점 몸집을 불려 왔다.
솔직히 지금은 서 있는 것조차 힘겨운 수준이었다.
“수술을 꼭 받아야 하는 건가? 다른 방법은 없어?”
“없습니다. 수술도 당장 받아야 해요. 시간을 끌면 끌수록 당신에게 손해입니다.”
“꼭 너에게 수술을 받으라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군.”
“현재로써는 그게 가장 현명한 판단이에요. 얼마 전 추가한 도구들만 있으면 여기서도 충분히 수술을 할 수 있으니까요.”
“크크크큭.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
“넌 수술을 핑계로 날 죽일 거야. 내가 너라면 분명히 그럴 테니까. 봉사활동을 하던 중 납치를 당해서 목숨을 위협받았는데, 그 모든 일의 원흉인 나를 치료해서 살려 준다고? 그게 가당키나 해?”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할 뿐이에요. 다른 잣대는 없습니다.”
“끝까지 위선을 떠는군.”
“질질 끌지 말고 결론부터 내죠. 그러니까 당신은 내 수술을 안 받겠다는 겁니까?”
“당연하지. 우우우웁.”
복통에 괴로워하던 알디가 비틀거리며 구토를 할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증상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겁니다. 한시라도 빨리 가까운 병원을 찾아요.”
“병원? 치료가 끝나는 즉시 정부 놈들에게 잡힐 텐데 병원에 가라고?”
“그럼 이대로 죽을 겁니까?”
두 사람의 대화가 오고가는 가운데 텐트 안의 분위기가 시한폭탄처럼 변했다.
두 사람의 의견은 도무지 좁혀질 줄을 몰랐다.
서로 맞부딪쳐서 한 쪽이라도 꺾이면 좋으련만 그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쇳덩이와 쇳덩이가 부딪쳐서 나는 무의미한 공명음만 날 따름이었다.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당신, 선지자 맞아?”
“이젠 나를 의심하는 건가?”
“사이비인 줄은 진작 알았는데 바보인 줄은 몰랐거든.”
최기석의 말에 알디가 허리춤에 찬 총을 꺼냈다.
“총으로 위협하는 건 코흘리개 아이도 할 수 있어. 고작 그 정도로 선지자 흉내 낼 생각하지 마.”
타아아앙!
알디가 천장으로 한 발의 총을 쏘아 올렸다. 그러자 이에 놀란 병사들이 우르르 텐트에 몰려들었다.
“다 꺼져. 이건 내 일이다.”
그의 서슬 퍼런 눈빛을 받은 병사들이 꼬리를 물고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널 못 죽일 거라 생각해서 지껄인다는 거 다 안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야.”
“착각하고 있는 건 당신이야. 당신이 선지자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동안 한 짓이라고는 고작 약탈밖에 없잖아. 안 그래?”
“…….”
“거기다 몸은 아파 죽겠는데 납치한 의사한테 수술받기는 싫고 병원에 가자니 정부군에 잡힐 것 같고. 정말 선지자다운 모습이네. 다른 군인들이 이 사실을 알면 존경심이 몇 배는 더 커지겠어.”
“입 다물어.”
“너나 닥쳐!”
최기석의 패기에 알디가 몸을 움찔거렸다.
총을 겨누고 있는 건 자신이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어쩐지 정반대 같았다.
그는 마치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듯한 본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총 내려놓고 나한테 수술받아. 동생 얼굴, 더 보고 싶지 않은가 보지?”
“너…… 넌 날 죽일 거잖아. 내 부하들이 다 널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나만 죽으면 넌 자유의 몸이 돼서 풀려난다는 소리지. 수술은 열심히 했지만 살릴 수 없었다. 그딴 핑계만 대면 되는 거 아니야?”
“너 진짜 구제불능이구나.”
“선지자님. 닥터 최를 믿으세요. 그는 절대로 선지자님을 해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지르! 치료 한 번 받았다고 너도 저놈이랑 한통속이 된 거냐?”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잘 알지 않습니까? 제발 고집을 꺾으세요. 죽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나지르의 간절한 부탁에 알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후들후들 떨리던 몸을 가누지 못해 알디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툭!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던 총마저 손을 떠났다.
그 틈을 타 최기석이 알디를 힘으로 제압한 후 들것에 눕혔다.
“나레카, 군인들에게 말해서 수술 도구 챙겨 달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 속에 수술 준비가 뚝딱 끝났다.
최기석은 알디의 상의를 벗긴 후 수술용 장갑을 끼고 그의 복부를 소독했다.
“많이 아프겠지만 참아. 네 업보니까.”
차가운 한 마디와 함께 충수돌기 절제술의 막이 올랐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텐트 안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형제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알디에게 집도한 충수돌기 절제술은 오 분 만에 성공적으로 끝냈다.
노우드와 세이버, 호프 수술 등의 고난도 수술마저 자유자재로 펼치는 그였다.
조금 과정해서 충수돌기 절제술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닥터 최는 역시 대단하네요.”
“뭐가요?”
“만약 제가 닥터 최였으면 이 자식 죽였을 거예요. 꼴 보기 싫은 자식. 선지자 행세하면서 사람들 위협하고 다니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살려 줘요.”
“아무리 그래도 환자는…… 환자잖아요. 제 개인감정을 엮으면 안 되죠.”
“그래서 대단하다는 겁니다. 의사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는데…….”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알디가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눈을 떴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최기석과 나레카를 번갈아 응시했다.
“왜요? 예상이 빗나가서 아쉬워요?”
최기석의 농담 섞인 물음에 알디는 침묵을 지켰다.
그저 붕대가 감싸진 상처 부위를 매만지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왜…… 나를…… 살렸지? 날 죽이고 대충 둘러대기만 해도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전부터 누누이 말했잖아요.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지,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너 같은 괴짜 의사는 살다 살다 처음 보는군.”
알디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몸은 좀 어때요?”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관리만 잘하면 추가 감염이 생기지도 않을 거고요.”
말을 마친 최기석이 알디에게 다가갔고 위압감을 느낀 알디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최기석은 그저 몸을 굽혀 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복통이 아직 남았죠?”
“맞아.”
“전신마취를 한 게 아니어서 통증이 오래갈 겁니다. 그래도 형답게 잘 참아 봐요. 당신 동생은 당신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으니까.”
최기석을 지켜보던 알디는 왠지 모를 푸근함을 느꼈다.
너무나 오래 전에 맛본, 지금은 희미한 흔적만 남은 이 감정을 느껴 본 게 언제였더라.
한참 고민 끝에 이 푸근함을 이태식 신부에게 먼저 느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고열로 입원한 알디를 신부님은 성심성의껏 치료해 주었다.
심지어 밤을 새 가면서 말이다.
최기석을 계속 보고 있자니 그 위로 신부님의 얼굴이 겹쳐졌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 그냥.”
알디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나는 구호활동 하는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했어. 내가 재수가 없었는지는 몰라도 선민사상을 가진 사람이 많았거든. 말로는 구호활동을 한다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치료하는 사람을 얕잡아 보는 기색이 역력했어. ‘너희는 기댈 곳이 우리밖에 없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
“…….”
“내 짧은 경험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일반화시킨 모양이군. 너 같은 괴짜가 있는 걸 보면.”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습니다.”
“혹시 우리 촌락에 치료받을 사람이 더 있나?”
알디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지금은 없어요. 앞으로 더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의사는 더 필요 없다는 소리군. 이제 네 면상을 보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알디가 밖에서 대기 중인 군인을 불러서 귓속말을 건넸다.
이에 군인은 다짜고짜 최기석과 나레카를 끌고 지프차에 태웠다.
“꺼져. 다시는 오지 마.”
힘겹게 텐트 입구에 선 알디가 두 사람을 향해 휘휘 손을 내저었다.
* * *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진료 시간이 끝나가면서 벌 떼처럼 몰려들던 환자들의 숫자가 줄어 갔다.
‘드디어 내일이구나.’
정설화는 달력에 그려진 동그라미 표시를 노려보았다.
정부가 열심히 노력 중임에도 최기석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사이 협상일이 당장 내일로 다가왔고 말이다.
그녀는 책상 서랍 아래 넣어 둔 서류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가방에는 한국에서 공수해 온 석방금이 들어 있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제발 사랑하는 그 사람만 무사히 돌아왔으면…….
간절함이 커지면서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닥터 정. 마지막 환자 한 명만 더 받아 주세요.”
“네.”
간호사의 말과 함께 진료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상대를 파악한 순간 그녀의 몸은 돌처럼 굳었다. 누군가가 목을 틀어쥔 것처럼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란 말인가.
“그동안 걱정 많았지? 미안.”
“…….”
“우리 여보, 한번 안아 보자.”
최기석이 다가와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이 모든 게 꿈인가 싶어서 얼떨떨했지만 몸에 닿는 촉감에 현실감이 점점 짙어졌다.
“기석아.”
“나 무사히 돌아왔어.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귓가에 맴도는 최기석의 목소리에 그동안 참아 왔던 감정이 무너졌다.
“기석아. 나…… 나는 진짜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다 알아. 말 안 해도 돼.”
솜이불 같은 포근한 위로에 정설화는 그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