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추억 (2)
“의사의 감입니다. 아랫배에 손을 대고 있는 걸 보니 배가 아픈 것 같군요. 아닙니까?”
“…….”
“이 기회에 진료 받겠어요?”
“진료 따위 필요 없어. 단순한 복통일 뿐이야.”
“단순 복통인데 땀을 뻘뻘 흘리고 있군요.”
“더워서 그래. 불만 있나?”
알디가 얼굴을 구기며 신경질적인 말투로 말했다.
“증상을 숨기면 안 됩니다. 원래 작은 병이 큰 병을 만드는 법이에요.”
“의사 놈들은 아픈 걸 풍선처럼 부풀리는 경우도 많지. 안 그래?”
“알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죠. 하지만 조만간 그 복통으로 큰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해요.”
“크크크. 희망사항을 말하는 건가?”
차갑게 웃은 그는 나지르를 부탁하고 텐트를 떠났다.
“휴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나레카는 통역을 마치고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쳤다.
알디를 마주할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사람을 맨손으로 때려죽일 것 같은 험상궂은 외모.
거기에 열 손가락에 낀 반지와 총알 목걸이가 더해진 알디는 저승사자 같았다.
“닥터 최는 목숨이 열 개라도 되나 봐요? 어떻게 저런 인간한테 할 말을 다해요?”
“상대가 누구든 숙이고 들어갈 필요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물론 다른 사람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고요.”
“그래도 우린 인질이잖아요. 저놈 심사가 뒤틀려서 빵 하고 한 발 쏘면 죽을 수도 있는 건데…….”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죠.”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가 되는 군요. 저라면 환생을 몇 번 해도 불가능하겠어요.”
나레카의 농담에 최기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닥터 최가 말한 탈출 방법이 바로 그건가 보네요. 알디를 치료해 주는 거.”
“맞습니다. 이틀 내로 알디에게 수술이 필요할 시기가 올 거예요. 그걸 잘 이용한다면 외부의 구조 없이 우리 발로 이곳을 떠날 수 있습니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는데.”
짧은 대화가 끝나고 두 사람의 시선이 나지르에게 머물렀다.
전신마취 없이 위험한 수술을 끝낸 그는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외견상으로는 총에 맞았던 환자라고는 생각 못 할 모습이었다.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최기석은 나지르의 바이탈을 체크한 후 텐트 바깥으로 나갔다.
노을이 지며 하늘과 구름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오후 내내 잡아먹을 것 같이 달려들던 뜨거운 바람들도 이제는 많이 진정한 듯 선선한 기운을 띠었다.
문득 아름다운 풍경 위로 떠오르는 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정설화였다.
“설화가 걱정이 많을 텐데…….”
최기석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곤 탄식을 뱉었다.
* * *
오베이드 호스피탈 진료실.
정설화는 오후 막바지 진료를 보고 있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를 치료급식센터로 보내자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남자는 진료실이 어색한지 내부를 두리번거리다가 자기 손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도무지 잠을 못 자겠습니다. 거의 일 년 정도 될까요? 계속 뜬눈으로 잠들었어요.”
“잠들면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요?”
“……네.”
남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남자는 정부 군인으로 반군을 제압하기 위한 전투에 수차례 나섰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의 생사의 고비를 넘겼으며 때로는 눈앞에서 동료가 죽는 것도 봤다고 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동료의 비명이 들려요. 반군 녀석들에게 잡혀가 고문을 당할 때인데 살려 달라는 말을 얼마나 간절하게 하던지…….”
“…….”
“그 친구 다음이 저였기에 두려움은 더욱 컸죠. 제 차례가 닥치기 전 우리 군의 습격이 있어서 기적적으로 구출을 받았지만…… 아직도 그때 일을 잊지 못해요.”
남자가 눈을 굴리며 다리를 떠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정설화는 그의 불안한 마음을 더 끄집어내며 계속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었다.
“환자 분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사건이 트라우마, 쉽게 말해서 마음속 깊은 상처로 남은 거죠. 술도 자주 드시죠?”
“네. 술을 못 먹으면 조각 잠도 못 잡니다.”
남자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환자분이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떠올리지 않도록 환경을 바꿔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병원에 와서 저랑 자주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요.”
“…….”
“그동안 주변 사람과 군대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한 적은 없죠?”
“당연히 못하죠. 그러면 다들 제 걱정만 하는데.”
“저하고 상담을 하면서 그때의 안 좋은 기억을 조금씩 지워 봐요. 우선 오늘은 밤에 잠잘 수 있는 약물과 PTSD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약물을 처방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환자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진료실을 떠났다.
이것으로 오늘 진료는 끝, 정설화는 벽시계를 힐끔하고서 노트북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메일함에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한 통의 메일이 있었다.
보낸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였으며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짤막한 메모가 적혔다.
감사 메일을 보낸 그녀는 곧바로 입원실을 찾았다.
“아브나. 몸은 좀 어때요?”
“그럭저럭 견딜 만해요. 시도 때도 없이 졸린 것만 빼면요.”
아브나가 힘겹게 미소를 띠었다.
수면병에 걸린 그녀는 이제 간호사가 아니라 환자로 병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현재는 수액 치료만 진행 중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악화되는 중이다.
“그런데 제 주치의는 닥터 최 아니었나요? 아. 닥터 정이 싫다는 건 아니고 그냥, 요 며칠 계속 안 보이니까 이상해서요.”
“일이 생겨서 계속 자리를 비우고 있네요.”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아브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닥터 정.”
“네. 아브나.”
“저 그냥 멜라소프로로 치료하면 안 될까요? 병은 깊어지는데 계속 손 놓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아브나의 말에 정설화는 쉽게 답변할 수가 없었다.
최기석은 그녀에게 독성과 부작용이 없는 수면병 신약을 투여하고 싶어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계획도 마련해 놓았고 말이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었기에 선뜻 그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일단 멜라소프로를 투여하면 신약 치료는 물 건너가기에.
“아브나. 이런 말 야속하게 들릴 거라는 거 알지만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
“기석이가 아브나를 위해 노력하는 게 있어요. 그것만 잘 풀리면 멜라소프로 따위 쓰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럼 믿어 볼게요. 닥터 최를.”
아브나가 정설화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정설화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신뢰가 가득 차 있었다.
“푹 쉬고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호출해요. 알았죠?”
“네.”
입원실을 떠난 정설화는 때마침 복도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네이마르와 마주쳤다.
네이마르는 할 말이 있다며 함께 병원장실에 가자고 제안했고 정설화는 그에 순순히 따랐다.
“…….”
“…….”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았다.
입에 자물쇠라도 채운 것처럼 둘 다 한참 말이 없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를 먼저 듣고 싶어요?”
“나쁜 소식부터 들을게요.”
“NSF에서 미스터 최를 어떻게 구조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 중이라고 말했던 거 기억할 겁니다. 방금 전 전화가 왔는데…… 그게…… 납치단체에게 돈을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네이마르가 정설화의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협상금을 주는 대신 납치단체를 규탄하면서 그들을 압박할 예정이라는군요.”
“그 단체 사람들, 협상금을 안 주면 무조건 사람을 죽이는 걸로 유명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었죠.”
“사실상 기석이를 포기했다는 소리네요.”
정설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최악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기에 네이마르가 전한 소식이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이제 좋은 소식을 전할 차례군요.”
“…….”
“수단 정부에서 이번 일에 나서기로 했다는 겁니다. 관상동맥 우회술로 미스터 최를 찾았던 보건부 장관이 군부 쪽에 영향력을 행사했나 봐요.”
“아…….”
“정부쪽에서 그 단체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고 하는군요. 미스 정이 힘들다는 건 알지만 조금만 더 견뎌 줬으면 좋겠어요. 분명 희소식이 들릴 겁니다.”
“그런데 협상일은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잖아요. 그 안에 정부에서 그 단체를 못 찾으면 기석이는…….”
정설화의 지적에 네이마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길어지는 침묵 속에 정설화가 운을 뗐다.
“사실 저도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저 한국에서 모아 둔 돈하고 대출 받은 돈으로 협상금을 만들었어요. 만약에 정부에서 기석이를 못 찾는다고 하면 제가 그 사람들하고 협상할게요.”
“진심입니까?”
“네.”
정설화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타지에서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부탁해 최기석을 살릴 목돈을 만들었다.
최기석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 수 있는 그녀였다.
“미스 정이 협상금을 마련했다면 일이 더 잘 풀릴 수도 있겠군요.”
네이마르와 정설화가 대화를 이어갔다.
납치단체가 정한 데드라인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시점의 일이었다.
* * *
“선지자님.”
의식을 차린 나지르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알디를 불렀다. 비록 형제지간이지만 이곳에서는 엄격하게 서열을 지켜야 했다.
“이제 깨어났구나. 몸은 좀 어때?”
“상처 부위가 쑤시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다행이야.”
알디가 나지르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무정해 보이던 그의 눈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잖아. 넌 분명 살 수 있을 거라고.”
“감사합니다. 선지자님의 혜안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죽는 건 용서 못 한다. 알았어?”
“명심하겠습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나지르가 알디의 눈치를 보다가 운을 뗐다.
“선지자님.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아주 큰 실례라는 건 알지만…… NSF에서 납치한 닥터 최와 엔지니어를 풀어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제 와서 왜?”
“닥터 최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억류되어 있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나지르의 설명이 이어졌다.
최기석의 행보는 지금까지 납치를 당한 다른 의사들과는 180도 달랐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촌락의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죽임을 당할까 봐 전전긍긍해도 모자랄 판국에 원수와 같은 사람을 치료한 것이다.
“내가 전혀 몰랐던 일이군.”
알디의 눈썹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이제야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님을 속일 의도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
“닥터 최를 보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비록 단 한 사람이라도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요. 더 이상 그를 이곳에 붙잡아 두면 안 됩니다. 그는 다른 의료봉사자와는 다릅니다.”
나지르의 말에 알디는 대답 없이 턱을 쓸어내렸다.
확실히 최기석은 보통 의사가 아니었다.
자신의 총구를 쳐내던 패기와 환자를 향한 진실된 마음은 그조차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를 계속 보고 있자면 과거 존경했던 이태식 신부의 모습이 겹치기도 했다.
“선지자님, 아니 형님. 이제 우리 그만…….”
나지르는 말을 잇지 못했다.
털썩!
알디가 배를 움켜쥔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