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73화 (372/407)

소중한 추억 (1)

“이 자식이 나를 뭘로 보고…….”

“동생을 살려 내고 싶으면 필요한 도구나 빨리 구해.”

“…….”

“못 들었어? 협박하고 자존심 내세울 시간에 수술 준비나 도우라고!”

최기석의 호통에 알디가 몸을 움찔거렸다.

최기석이 뿜어내는 박력에 한 번 놀랐고 번역해 준 말을 듣고 한 번 더 놀랐다.

의사라고는 하지만 최기석은 엄연한 인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상황이 역전되어 알디는 그의 패기에 눌려버렸다.

“수술에 필요한 도구를 챙겨 와. 빨리!”

알디의 지시에 군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사이 최기석은 출혈 부위를 감싸고 있던 천 조각을 제거하고 상처를 살폈다.

총알이 각각 복부와 흉부를 관통했다.

체력: 3/10

주 증상: 복통 / 흉통 / 출혈 / 의식소실

아픈 부위: 췌장 / 횡격막

진단명: 복부 총상 / 흉부 총상 / 췌장파열 / 횡격막 파열 / 심인성 쇼크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가족력: 없음

주의 요소: 없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최기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총탄이 체내에 박혀 있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이곳의 치료환경이 너무 열약했다. 오베이드 호스피탈에만 갈 수 있어도 사정은 훨씬 좋아지련만…….

“닥치는 대로 다 챙겨 왔습니다. 예전에 납치했던 봉사단체 사람들이 가진 물건이란 물건은 다 챙겨왔어요.”

군인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처치 물품을 쏟아 냈다.

생리식염수와 수액 세트, 쌈지와 거즈, 소독약 등등.

병원에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잘하면 비벼 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걸로 무조건 환자를 살려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수단에 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닌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본인의 힘으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도수가 강한 술하고 손수건도 하나 챙겨 주세요.”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최기석은 환자에게 페인킬러를 사용하고 말을 걸었다.

“병원이 아니라 전신마취를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이번 수술 내내 저와 함께 싸우는 겁니다.”

“……네.”

“이겨 낼 수 있죠?”

최기석의 질문에 환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체념의 기운이 깊게 묻어났다.

“나 혼자서 수술을 끝내는 건 불가능해요. 당신이 도와야 합니다.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세요. 수술하는 내내.”

“말씀하신 물건 가져왔습니다.”

“고마워요.”

최기석은 환자에게 브랜디를 먹이고 입에 수건을 물렸다.

페인킬러의 힘만으로 환자가 통증을 견딜 수는 없었기에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방법이었다.

뚝. 뚝. 뚝.

생리식염수에 수액 세트를 연결하고 혈관을 잡자 생리식염수가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이것으로 수술 준비 완료.

“나레카는 옆에서 제가 말하는 도구를 건네주세요.”

“알겠습니다.”

“우선 옷부터 완전히 벗기죠.”

최기석은 나레카와 함께 환자의 상의를 완전히 벗겼다. 그리고 생리식염수를 이용해 피부에 묻은 흙먼지를 깨끗하게 씻겨 냈다.

스으으으윽.

포비돈으로 소독을 끝낸 그가 메스를 손에 쥐었다.

스으으윽.

복부 총상에 절개창을 내자 총알이 스쳐간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탄은 췌장을 관통해서 빠져나갔는데 다행히 혈관을 많이 건드리지는 않았다.

피해 범위도 췌장에 국한되었다.

“나레카, 주사기에 생리식염수를 채워서 나한테 주세요.”

“네.”

용의 눈 줌 인 모드를 사용한 그는 상처 범위를 살피다가 다시 메스를 들었다. 메스로 췌장 주변의 고름집을 갈라내자 누런 액체가 흘러내렸다.

주사기로 고름을 빨아들이자 주사기 몸통은 금방 끈적한 액체로 가득 찼다.

치이이이익!

나레카가 건넨 주사기에서 쏘아지는 생리식염수.

“아아아아악!”

세척과 이차 소독이 진행되는 가운데 환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너 이 새끼. 치료 똑바로 안 해?”

“똑바로 하고 있는 겁니다. 마취를 못하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나은 처치법은 없어요. 정 나를 못 믿겠다면 근처 병원으로 갈까요?”

최기석의 팩트 폭행에 알디가 입을 다물었다.

테러 단체인 그들이 구호단체에서 치료를 받았다간 당장 정부군에게 끌려간다.

최기석이 그 점을 파고들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알디는 초조하게 다리를 떨다가 최기석의 반대편에 자리 잡고 나지르의 손을 감싸 쥐었다.

“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내 축복이 함께할 거야.”

그의 말에 나지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최기석은 췌장 전절제술에 나섰다.

총탄에 직격이 된 췌장을 살릴 수 없는 방법은 현재로써는 없었다.

췌장이 여러 장기와 연결이 되어 있기에 위의 일부, 소장의 일부, 공장의 일부, 림프절들을 함께 절제해 나갔다.

절제술을 펼치는 동안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으로 들어가 잠시 수술을 중단하기도 했다.

비록 텐트 안에 있다고는 하나 이렇게 더운 날씨에 야외에서 수술할 줄 누가 알았던가.

평소와 다른 상황에 집중력이 자꾸만 흩어졌다.

외과적 처치 13레벨까지 달성했음에도 좀처럼 집도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빌어먹을!’

최기석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이를 앙 다물었다.

총상을 입고서 삼십 분간 처치 없이 방치된 환자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의 손을 떠나 하늘나라로 갈 게 분명했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췌장 전절제술에 박차를 가했다.

메스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정확하면서 절도가 있었으며 아름다운 음악처럼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조각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변했어. 닥터 최가.’

나레카는 최기석의 처치를 치켜보며 탄복했다.

수술에 대해서는 까막눈이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최기석이 머리에 수건을 두른 후부터 처치가 눈부실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사람이 감쪽같이 바뀐 것처럼.

“나레카. 봉합사 주세요.”

“보…… 봉합사가 뭐예요?”

“상처를 꿰매는 실이요. 작은 종이봉투 같은 거 안에 있을 거예요.”

“가만 보자…… 없는데요? 그런 거 안 보여요.”

“여기 있잖아요.”

최기석이 쌈지 주머니에 있는 봉합사를 가리키자 나레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렇게 생긴 거였구나. 미안해요. 근데 이거 못 쓰겠는데요?”

“…….”

“유통기한이 지났는데요? 살짝 녹도 슬었고요.”

포장을 벗기고 봉합사들을 살피던 나레카가 얼굴을 구겼다.

‘하필 이런 때에…….’

최기석은 뒤늦게 봉합사들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용 날짜가 이 년이나 지난 봉합사들은 상태가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전에 누군가가 한 번 개봉했다가 쓰지 않고 다시 넣어 둔 모양이다.

“이게 없으면 수술을 못하나요?”

“네. 못해요. 상처를 꿰매지 못하면 출혈을 막을 수 없어요.”

“으음…….”

나레카는 가만히 봉합사를 응시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닥터 최! 우리 이거 봤잖아요!”

“봉합사를 봤다고요? 여기서?”

“그 아이들이 실뜨기하면서 가지고 놀던 게 이거 아니에요?”

“맞아요!”

“이걸 가지고 놀던 여자아이들을 봤거든요. 그 아이들을 찾아서 이 물건을 가져오세요. 최대한 빨리!”

나레카의 말에 군인들이 우르르 텐트를 벗어났다.

“잘했어요, 나레카.”

“이번에는 저도 도움이 됐죠?”

“말해 뭐합니까?”

최기석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농부들이 가뭄에 내리는 단비를 맞을 때 아마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나레카의 지적이 없었다면 수술은 이어갈 수 없었다.

제아무리 최기석이라도 봉합사 없는 수술은 상상조차 힘들었다.

얼마 후 군인들은 봉합사 두 개를 챙겨서 돌아왔다.

“이거밖에 없습니까?”

“네. 남은 건 다 가지고 놀았고 남은 건 이것뿐이라네요.”

“알았습니다. 일단 주세요.”

끼기기기긱.

최기석은 니들홀더로 봉합사 침을 조인 후 봉합 준비를 했다.

봉합사가 부족했다.

수술 부위가 췌장에 국한됐다면 모를까, 흉부 횡격막까지 복원해야하지 않는가.

봉합사 두 개로 손상 부위를 커버하는 것은 택도 없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운다.’

각오를 다진 그는 번개 같은 솜씨로 전 췌장 문합술에 나섰다. 본래라면 각 절제 부위를 단순 단속 봉합(상처 부위에 한 땀 한 땀 매듭을 짓는 봉합법)으로 꿰매야 하지만 특별히 연속 봉합을 사용했다.

봉합사를 아끼기 위함이다.

단순 단속 봉합을 하면 매번 매듭을 짓고 이를 가위로 잘라야 하는데 지금은 그 남은 부위마저 소중했다.

최기석 나름대로 묘책을 강구한 셈이다.

“췌장 절제술 끝났습니다.”

“상처 부위는 그냥 열어 두는 건가요?”

“원래는 배액관이라는 걸 넣고 절개창을 닫아 줘야 하는데 지금은 배액관이 없잖아요. 절제 부위가 아물 때까지 주사기로 일일이 고름이나 농을 빼 줘야죠.”

설명을 마친 그는 곧바로 가슴 부위를 살폈다.

현재 흉부에 가장 큰 문제는 탄이 횡격막을 관통해서 이 부위에 감염과 개방성 상처가 생겼다는 점이다.

열린 틈으로 다른 장기가 비집고 들어오는 것도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최기석은 상처 부위에 세척과 변연절제술을 펼치고 횡격막 복원에 나섰다.

‘제발. 제발.’

횡격막을 재건하면서 짧아지는 봉합사를 보며 그는 가슴속 심지가 타들어 가는 긴장감을 맛보았다.

봉합사가 사라지는 순간 수술도 끝이기에.

찰칵!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나레카가 가위로 봉합사를 잘라 냈다.

남은 봉합사의 길이는 말 그대로 손톱 길이였다.

“수술 끝났습니다. 지금부터는 경과를 지켜보죠.”

힘이 풀린 최기석은 그 자리에서 뻗어 버렸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알디의 텐트에서 나지르를 살피고 있었다.

수술이 끝난 지 세 시간이 지났지만 환자의 상태는 여전히 보통 수준을 유지했다. 열약한 환경에서 급하게 처치한 것치고는 훌륭한 결과였다.

“동생은 괜찮겠나?”

텐트로 돌아온 알디가 조심스레 물었다.

“추가 감염만 조심하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고맙군. 동생을 살려 줘서.”

“내 일을 한 것뿐입니다.”

담담하게 나지르를 내려다보는 최기석, 그를 향한 알디의 눈빛에는 묘한 기색이 감돌았다.

수술 전 총구를 쳐냈던 패기.

보통 의사라고는 믿기 힘든 수술 실력.

그가 보여 주었던 모습들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확실히 최기석은 그동안 납치한 의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방금 막 다른 구호단체 사람들을 납치하고 오는 길이다. 동생을 치료하는데 유용한 물건이 많을 거야.”

“……당신은 대체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겁니까?”

“죽기 전까지.”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거죠? 궁금하군요.”

“다 살기 위해서야.”

“나만 잘살면 됩니까? 다른 사람들은요?”

“내 알 바 아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붙었다.

긴장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알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생을 구해 준 건 고맙지만 이번 일로 널 풀어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일주일 안에 협상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넌 죽어.”

“알아서 하시죠.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요새 오른쪽 아랫배가 심하게 아프지 않나요?”

최기석의 지적에 알디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