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무엇도 (6)
새 아침이 밝았다.
정설화는 충혈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옆자리를 응시했다.
최기석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제 저녁에 도착해야 할 사람이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를 걱정하느라 밤새 한순간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세면을 마친 그녀는 곧바로 병원장실을 찾았다.
네이마르는 책상에 앉아서 서류 업무를 보고 있었다.
“병원장님. 기석이가 지금까지 복귀를 안했어요.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요.”
“안 그래도 미스 정을 부르려던 참입니다.”
“뭔가 알고 계시는 거죠?”
고개를 끄덕인 네이마르는 침울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고 그의 맞은편에 정설화가 자리 잡았다.
“아……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병원장님. 그냥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이대로 있다간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정설화의 말에 네이마르는 가운에서 한 장의 편지와 사진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편지와 사진을 훑는 그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갔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 미치광이 단체에서 최기석과 나레카를 인질로 잡았는데 두 사람을 구하고 싶다면 오십만 달러(한화로 5억 원)를 내놓으라는 협박이었다.
툭. 툭. 툭.
동봉된 사진을 확인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하늘이 무너지면 이런 기분일까.
무거운 침묵 속에 네이마르는 정설화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NSF 지부에 연락했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봅시다. 그게…… 납치범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의 원칙이지만 닥터 최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어요.”
“……네.”
대화를 마친 정설화는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슬픔이 다소 가라앉았다.
거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도 좀 전과 달라졌다.
애탄에 젖었던 두 눈이 지금은 뜨겁게 타올랐다.
최기석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이를 타파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만약 NSF가 지원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그녀는 화장실을 뛰쳐나와 기숙사로 올라갔다.
* * *
최기석과 나레카가 납치를 당한 지 나흘이 지났다.
NSF는 아프리카 지부의 간부들은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이번 사건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토론 시작부터 서로 다른 의견으로 팽팽한 충돌이 있었다.
합의금을 줄 수 없다는 간부 측은 이런 주장을 했다.
[납치범과 합의할 수 없다는 건 우리의 대원칙입니다. 이 원칙이 무너지면 앞으로의 구호활동에 큰 차질이 빚어져요. 당연히 닥터 최도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맞는 이야기에요. 합의금을 주기 시작하면 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NSF 직원을 납치해서 돈을 달라고 할 겁니다. 안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없어요.]
합의금을 줘야하다는 측은 이런 주장을 했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이 예외가 필요한 상황이죠. 납치 당한 사람이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현재 유일한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 기석 최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는 법이다.]
[저도 합의금을 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미치광이 단체는 입만 산 곳이 아닙니다. 얼마 전 적십자 의사를 납치해서 그냥 죽여 버렸다고요. NSF에서 납치당한 사람들을 방관하면 우리 이미지가 뭐가 되겠습니까? 대체 누가 봉사를 하러 이 땅에 올까요?]
[동감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닥터 최가 죽으면 우리의 손해가 막심합니다.]
찬성 측과 반대 측의 의견은 저울처럼 팽팽했으며 어느 쪽도 먼저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크고 작은 언성이 오가며 몸싸움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갔다.
그렇게 NSF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사이, 종교 단체에서 먼저 데드라인을 그어 버렸다.
편지를 보낸 시점으로 일주일.
그 안에 합의금을 보내지 않으면 최기석과 나레카를 살해하는 장면을 라이브로 송출하겠다는 뜻을 보내왔다.
그로 인해 NSF 지부는 다시 한 번 뒤집어졌다.
* * *
“하아아암.”
최기석은 하품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귀를 후비적거리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두고 사람들의 말이 많은 듯했다.
최근 며칠 사이 귀가 간지러워서 참을 수 없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주일이라…… 내 발로 나가는 게 더 빠를지 모르겠군.’
최기석은 알디의 최후통첩을 떠올리고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나레카. 산책 좀 할래요?”
“산책할 기분 아닙니다. 그 미친놈이 우리를 일주일 안에 우리를 죽인다잖아요. 잠도 안 오고 입맛도 없어요.”
“상황이 점점 나아지고 있잖아요. 혹시 몰라요? 녀석들이 머리가 확 돌아서 우리를 풀어 줄지?”
“그럴 거면 진작 풀어 줬겠죠.”
“에이. 그러지 말고. 밥부터 먹고 같이 바람 좀 쐐요.”
최기석이 애교를 부리며 나레카에게 식판을 내밀자 나레카가 봐준다는 표정으로 식판을 깔끔하게 비웠다.
“갈까요?”
창살문을 제 손으로 연 최기석이 동굴을 빠져 나왔고 그 뒤를 나레카가 따랐다.
바깥으로 나오자 밝은 빛이 눈알을 콕콕 찔렀다.
“일어나셨습니까?”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군인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돌아다녀도 괜찮은 가요?”
“네. 선지자님과 간부님들은 멀리 나가셨어요. 복귀할 때쯤 다시 알려 드릴 테니 편하게 계세요.”
“고마워요.”
최기석이 군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미소를 보냈고 군인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나흘 전부터 최기석과 나레카에 대한 대접은 180도 달라졌다.
우선 끔찍하게 맛없는 스프와 빵으로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됐다.
감옥에는 간이침대가 들어와 편히 누울 수 있었으며 상황에 따라서 바깥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이유.
그것은 알디의 명령 때문이 아닌 최기석의 진료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감옥으로 불러 모아 성심성의껏 살폈다.
의료 사각지대에 있던 이곳 사람들은 모두 의료에 목이 말랐기에 그의 진료를 두 손 들고 환영했다.
진료를 받고 호전되는 사람이 많았기에 군인들은 그를 대접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중요 간부가 없을 때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최기석과 나레카가 바깥을 돌아다녔지만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게 인사 또는 말을 건네곤 했다.
“하여간 닥터 최의 진료는 신의 한 수였네요. 사람들이 이렇게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나쁜 건 아닐 겁니다. 총으로 위협하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거라는 말이죠. 그런 사람들까지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잖아요.”
“그 부분에서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나레카가 뜸을 들이다가 화제를 돌렸다.
“제가 그동안 생각해 봤는데 최대한 빨리 탈출을 시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우리를 믿어 주고 있는 지금이 최고의 타이밍이에요.”
“어떻게 탈출하게요?”
“야간에 나가죠. 치료 받으러 온 군인을 제압한 후 몰래 나가면 돼요. 여기 지리는 대충 파악했어요.”
“전 반대입니다.”
최기석의 말에 나레카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그럼 여기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죽자고요? 우리가 죽는 걸 라이브로 방송하겠다는데?”
“탈출하다 들키면 돌이킬 수 없어요. 여기 군인들 차 타고 다니잖아요. 설령 운 좋게 빠져나간다고 해도 금방 잡힐 거예요.”
“그래도 모험은 해 봐야죠.”
“내게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조만간 녀석들은 우리를 풀어 주게 될 겁니다.”
“닥터 최. 의사가 아니라 점쟁이에요?”
“가끔 두 가지를 겸업하죠.”
최기석은 농담으로 그의 말을 받아쳤다.
촌락 근처를 한가롭게 돌아다니던 중 실놀이를 하고 있는 여자아이들이 보였다.
그도 어렸을 때는 실뜨기를 하며 놀았던 적이 있었기에 그들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봉합사로 노는 건가?’
최기석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실이 일반실이 아니라 봉합사라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아마도 바늘 부분만 잘라서 놀잇감으로 쓰는 듯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다.
타타다다다닥.
총을 어깨에 걸친 병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선지자님과 간부님이 돌아오신다고 합니다. 감옥으로 돌아가셔야 해요.”
* * *
두두두두두.
에디 마을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수없이 많은 탄알이 허공을 수놓았으며 매캐한 화약 냄새가 주변을 뒤덮었다.
알디는 몇몇 수하들과 함께 허름한 가옥에 대피한 상태였다.
나머지 수하들은 정부군의 함정에 맞서서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젠장. 함정이었을 줄이야.”
알디는 착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마을을 약탈하려고 왔건만 이게 웬일인가.
정부군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에게 총탄을 퍼부었다. 기습 공격으로 당한 수하들만 벌써 스무 명이 넘었는데 그 피해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막심했다.
“선지자님. 자리를 빨리 벗어나셔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알디는 주요 간부들만 데리고 지프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탈출을 막아 주던 수비진이 뚫리면서 정부군이 물밀듯이 달려들었다.
타아아앙! 타아아앙!
두 발의 총성이 맑게 울렸다.
동시에 알디가 가장 아끼는 나지르가 풀썩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알디는 나지르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상태를 살폈다.
두 발의 총탄이 각각 나지르의 복부와 가슴을 관통했다.
“서…… 선지자님. 빨리 도망치세요.”
“널 두고 갈 수는 없다.”
알디는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나지르를 질질 끌고 지프차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쏜살같이 현장을 벗어났다.
죽어 가는 나지르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나지르는 그의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단체를 지금의 수준으로 키우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동생을 잃는 것은 양 날개가 잘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선지자님. 쿨럭 쿨럭.”
나지르가 피를 토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어차피 죽은…… 목숨입니다. 왜 저를.”
“닥치고 힘이나 아껴 둬. 살 수 있어. 그 흉부외과 의사 놈이라면 널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디는 상의를 찢어 총상 부위를 단단하게 감았다.
상처가 깊었던지 옷이 금방 붉은 피로 물들었다.
일 년과 같은 삼십 분이 지나고 지프차가 알디의 수하가 있는 촌락에 들어섰다.
“나지르를 들것에 실어서 텐트로 보내고 그 의사 놈 당장 데려와!”
“아…… 알겠습니다.”
알디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번개처럼 작업에 나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알디는 자신의 텐트에 서서 죽어 가는 남동생을 내려다보며 발을 굴렀고 때마침 최기석과 나레카가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어?”
“이야기를 듣고 최대한 빨리 왔습니다.”
“쫑알쫑알거리지 말고 빨리 치료나 해.”
알디는 소지하고 있는 권총을 천장에 쏘았다.
타아아앙!
폭음이 터지면서 텐트 안의 분위기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내 동생. 무조건 살려내. 안 그러면 넌 죽는다.”
알디가 최기석에게 총을 겨눴지만 최기석은 성난 얼굴로 그가 겨눈 총구를 휙 쳐 버렸다.
“사람을 치료하는데 협박은 필요 없어. 난 의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