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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70화 (369/407)

그 어느 무엇도 (4)

부우우웅.

앰뷸런스 한 대가 오베이드 호스피탈을 막 떠났다.

조수석에 탄 최기석은 팔짱을 낀 채 자물쇠처럼 입을 닫았다.

제발 다리를 구해 달라고 하던 아리프의 간절한 눈빛.

수술 중 뼈를 톱질할 때 손에 전해진 감촉.

외출하기 직전 겪은 과정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가슴이 따끔거렸다.

만약 아리프가 한국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병원이 가까워서 조금이라도 일찍 병원에 왔으면 어땠을까.

약국에서 소독을 약을 사서 소독만 했더라도 다리를 절단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벌어지지 않아도 될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쉽지는 않겠지.’

그의 입가에 착잡한 미소가 어렸다.

남수단은 단순한 의료봉사를 뛰어넘는 의료복지 환경의 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여러 민족으로 나뉘어 분열과 갈등을 반복하는 이곳에서 그 원대한 목표는 신기루처럼 덧없어 보이기도 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출발하기 전에 있었죠.”

그가 다리를 절단한 환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나레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최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일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저는 지뢰를 밟아서 온몸이 산산조각 난 사람도 봤거든요.”

“……아직 놀랄 일이 남은 겁니까?”

“산처럼 쌓여 있죠.”

나레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브나가 수면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치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적십자에 가는 길이에요. 이번 기회에 문제를 뿌리째 뽑아 버려야죠.”

“적십자라고 해서 뾰족한 수는 없을 텐데…….”

“제 진짜 목표는 적십자가 아닙니다.”

“네? 그럼…….”

“제약회사를 노릴 거예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수면병 치료제를 생산하도록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닥터 최가 제약회사를 움직이게 만들겠다고요? 그게 가능한가요?”

“안 되면 되게 해야죠.”

최기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기치 못한 아브나의 수면병, 다이아몬드 버튼 뉴튜버 퓨디카이의 도움, 며칠 후 CABG를 받기 위해 찾아올 보건부 장관 아부디.

이 세 가지는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퍼즐조각이었다.

이를 잘 맞추면 분명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으리라.

“어? 오늘은 가는 길이 다르네요?”

최기석은 길이 낯선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새벽까지 비가 내렸잖아요. 기존에 가던 길은 침수됐을 거고 돌아가야죠.”

“그렇군요.”

“잠시 후 검문소에 들어갈 텐데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제가 다 처리할 겁니다.”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이윽고 저 멀리 검문소가 보였다. 검문소는 길옆에 조잡하게 자리 잡은 초소였으며 길 양 옆으로 총을 든 소년 두 명이 서 있었다.

“보초가 엄청 어려요.”

거기가 가까워지면서 보초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최기석이 보기에 두 사람은 십 대 초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어깨에 총을 걸고 근무를 선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림이었다.

“어리다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됩니다. 다들 실탄을 차고 있어요.”

“혹시 반군 세력입니까?”

“네. 이쪽 부근은 반군이 장악했어요.”

나레카가 대답하며 차를 검문소 앞에 세웠다.

NSF의 베테랑인 그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검문소에서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죽는 꼴들을 너무나 많이 봤기에.

나레카는 창을 반쯤 내리고 좌석에 놓아둔 빵을 꺼내서 우걱우걱 씹었다.

더불어 최기석에게는 너무 겁먹지 말라는 조언을 남겼다.

“NSF 소속이에요?”

키가 작은 소년이 운전석으로 다가왔다.

“맞습니다. 통행증 보여 드릴게요.”

그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소년병이 어리다고 무시했다가는 통행증을 소유해도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할 수 있었다.

“확인했어요. 어디로 가는 중이죠?”

“적십자 병원이요.”

“적십자 병원? 빠른 길이 있는데 왜 이쪽으로 왔어요?”

소년병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오늘 새벽까지 비가 쏟아졌잖아요. 다리가 잠겨서 그 길로는 못 갑니다.”

“으음…….”

소년병이 턱을 쓸어내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통행증이 오래 된 것 같은데 새로 발급받아야 되겠네요. 3달라만 주세요.”

“두 달 전에 받은 건데 벌써 갱신하라는 겁니까?”

“지나가기 싫으면 말고요.”

소년병의 태도에 나레카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통행증이 있으면 검문소는 당연히 통과해야하는 것이지만 소년병은 일부러 돈을 뜯기 위해 꼬투리를 잡는 중이다.

“나레카. 왜 그래요?”

현지 부족 언어로 대화중이라 상황파악 못한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닥터 최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안심하고 있어요.”

“아저씨. 3달러 안 줄 거예요?”

“잠깐 이야기 좀 하죠.”

나레카는 바지 주머니에 빵을 쑤셔 넣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또 다른 소년병은 초소 의자에 앉아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낮부터 마약을 빨아 재낀 모양이다.

상대할 사람이 하나뿐이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우리는 자원봉사자입니다. 돈 같은 건 가지고 다니지 않아요. 주머니를 한번 털어 볼래요?”

“시간도 많은데 그러죠. 뭐.”

소년병이 망설임 없이 나레카의 주머니를 뒤졌지만 소유한 현금은 찾지 못했다.

“돈이 없으면 콘돔이라도 줘요. 얼마 전에 온 구급단체 차량에서는 콘돔을 한 박스 주고 갔는데.”

“콘돔도 없습니다.”

“에이 씨. 대체 가진 게 뭐야!”

소년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나레카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소년병을 설득했다. 솔직히 현금도 차에 숨겨 두었고 콘돔도 소유하고 있었다. 소년병이 원하는 걸 주고 검문소를 편하게 통과할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검문소를 통과하는 대가로 무언가를 주다 보면 그게 규칙이 되어 버린다.

더군다나 여기서 안 좋은 선례를 남기면 다른 구호차량 역시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 주세요. 그건 그렇고 담배 핍니까?”

“네.”

“날씨도 더운데 그늘에서 담배나 한 대 피죠.”

나레카의 제안에 소년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소 밑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곧 뻐끔뻐끔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담배를 피는 동안 나레카는 친근한 태도로 소년병과 대화를 나누었다. 소년병의 일이 힘들겠다는 위로 섞인 말을 건네며 본인 일에 고충도 털어놓았다.

그렇게 공감대가 형성되자 소년병의 표정이 차차 풀렸다.

“그냥 가세요.”

“정말입니까?”

“통행증이 있으면 보내야죠.”

소년병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안전 바를 올리자 나레카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운전석에 올랐다.

부르르릉.

십여 분이 넘게 멈췄던 구급차가 다시 이동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저 친구들이 뭘 요구했나 보죠?”

“그런 셈이에요. 어쨌든 현명하게 잘 넘어갔으니 다행입니다.”

나레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운전에 집중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먼 길을 돌아 적십자 병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최기석은 곧바로 병원장실을 찾아 그에게 이번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병원장의 호쾌한 승인을 얻은 그는 입원실로 이동해, 마찬가지로 동의를 받아서 수면병 환자들의 동영상을 촬영하고 인터뷰를 따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면병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치료제가 존재하지만 기존의 치료제는 독성이 강해 오히려 환자들을 죽음으로 내몹니다. 치료를 받는 중에도 고통에 몸부림치고 비쩍 말라가는 환자들을 직접 보셨으니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 믿습니다. 여러분, 고통과 아픔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과 배려가 이들의 힘겨운 삶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클로징 멘트와 함께 동영상 촬영이 한 시간 만에 끝났다.

“할 일은 끝입니까?”

작업이 끝난 후 차에 올라탄 나레카가 놀란 토끼눈을 했다.

“네. 이제 돌아가면 돼요.”

“처치 도구를 빌리거나 환자 이송 때문에 온 줄 알았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군요.”

“김빠지죠?”

최기석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제가 병원에 온 건 수면병 환자들 동영상을 찍기 위해서였어요. 우리 병원보다 적십자에 수면병 환자들이 더 많으니까요.”

“아브나와 관련된 일이군요.”

“네. 첫걸음입니다.”

오베이드 호스피탈로 복귀하는 동안 최기석은 앞으로의 계획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아브나는 멜라소프로 치료를 받지 않은 채 수액요법으로만 수면병을 견디고 있었다.

그녀의 빠른 치료를 위해 실수는 없어야 한다.

그런데 검문소를 통과하여 병원으로 복귀하던 도중 한 무리의 군인이 길을 막고 섰다.

“저 사람들은 누구죠?”

“반군은 아닌 것 같은데…… 저도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네요. 일단 차를 세우겠습니다.”

나레카가 차를 세우자 군인들이 거친 말을 퍼부으며 두 사람을 차에서 내리게 만들었다.

퍽!

한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나레카의 머리를 내리쳤고 그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당신들 대체 뭐하는…….”

최기석 역시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 * *

머리가 무거웠다.

마치 누군가가 머릿속에 커다란 돌덩이를 넣어놓은 것만 같았다.

“아으으윽.”

최기석은 묵직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의식이 맑아지며 서서히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창살이 쳐진 감옥 같은 곳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흙냄새와 습기 가득한 냄새가 코를 찔렀으며, 내부로 빛 한 점이 들어오지 않아 암흑천지였다.

“나레카! 괜찮아요?”

허공에 메아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커졌다.

그는 나레카의 이름을 되뇌며 손으로 주변을 더듬거렸다.

한참 고생을 하다 보니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어두워서 누구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나레카일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휴우…….”

나레카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 적응하는 가운데 나레카가 몸을 일으켰다.

“크으윽. 머리야.”

“나레카, 일어났어요? 몸은 좀 어때요?”

“머리가 아픈 걸 빼면 괜찮아요. 닥터 최는요?”

“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죠?”

“납치당한 것 같군요. 일부 무력단체들이 구호단체 소속 인물들을 납치해서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하…….”

최기석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동안 수단에 오면 벌어질 일들을 여러 가지 그려 봤지만 그중에 납치는 없었다.

지금 상황이 마치 꿈만 같았다.

“만약 NSF에서 석방금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며칠 동안 이 끔찍한 곳에서 썩다가 죽겠죠. 여긴 누가 어떤 방식으로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니까요.”

“참 나.”

그는 동굴 벽에 기대 입술을 깨물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수없이 치료하며 생사고비를 넘긴 그지만 지금은 도무지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캄캄한 감옥은 마치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저벅. 저벅.

얼마 후 차가운 발소리와 함께 플래시를 든 인물이 감옥으로 접근했다.

“선지자께서 보자고 하신다.”

끼이이이익.

불친절한 목소리와 함께 창살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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