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무엇도 (2)
“우선 산모에게 혈액과 수액부터 투여해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최기석은 서둘러 절개창 안쪽의 자궁에 눈길을 주었다.
가뜩이나 혈액이 부족한 오베이드 호스피탈이 아닌가.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지 못하면 산모가 위험하다.
용의 눈 줌 인 모드를 사용한 그는 자궁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산후출혈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산도열상이고 두 번째는 자궁파열이다.
수술 도중 둘 중 한 가지를 놓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의 찾았다는 목소리가 청량하게 퍼졌다.
수술 시야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자궁 협부에 2도 열상이 존재했다.
출혈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미스터 최. 산모와 맞는 혈액은 이거 한 팩밖에 없다고 하는데요.”
“알겠습니다. 니들홀더, 3-0 prolene.”
“여기 있습니다.”
최기석은 소독간호사에게 처치 도구를 받아서 열상 부위를 꿰매기 시작했다.
번개처럼 진행되는 단순 단속 봉합.
찰칵!
완성한 매듭을 자를 때마다 그의 시선이 혈액팩에서 머물렀다. 혈액 한 방울 한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온몸의 피가 바짝 말랐다.
“옥시토닌 추가로 투여해 주세요. 할렌트는 열상 상단 부위 압박해 주시고요.”
“알았어요.”
신속한 후속 처치 속에 열상 부위 봉합이 끝났다.
출혈이 멎은 것을 확인한 스태프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술대에 걸린 혈액이 바닥을 드러낸 상황, 출혈을 잡지 못했다면 환자의 생명이 위태로웠다.
더불어 자궁절제술을 펼쳤다면 환자는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위험한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셈이다.
“닥터 최. 흉부외과 의사 맞아요? 응급처치가 번개 같던데요?”
“안 그래도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어제부터 공부했거든요. 다행히 위험한 순간에 해결책이 떠올랐어요.”
최기석은 미소를 지으며 산모 아이샤의 바이탈을 체크했다.
출혈이 멎으면서 호흡, 혈압, 체온, 맥박이 정상수치로 돌아왔다. 소리를 지른다거나 몸을 바들바들 떠는, 다소 공황에 빠졌던 듯한 모습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 닥터 최. 저…… 이제 괜찮은 건가요?”
최기석이 산소호흡기를 떼자마자 아이샤가 입을 열었다.
“자궁출혈이 있었지만 지금은 해결됐습니다.”
“오. 다행이네요. 우리 아기 좀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세레나.”
그의 말에 소독간호사 세레나가 수건에 쌓인 아이를 아이샤에게 건넸고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두 사람을 동시에 살폈다.
‘이건 또 뭐야?’
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 * *
일과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진료실에 있던 최기석은 눈에 불을 켠 채 산부인과 서적을 살피고 있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냈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아이샤가 출산한 아이가 선천성 갑상선 기능항진증을 앓았던 탓이다.
이를 적절하게 하지 않으면 신생아의 지능이 떨어지고 성장장애가 오기에 추가적인 처방이 필요했다.
“L-thyroxine를 써야 된단 말이지?”
타다다닥.
처방을 입력하던 그의 손이 문득 추진력을 잃었다.
치료에 필요한 약물이 지금 오베이드 호스피탈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NSF 약제 관리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연락해 해당 약물을 빨리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기석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베이드 호스피탈은 혈액은 물론이요, 모든 치료 물품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미국이나 한국이라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들도 환자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오늘 수술만 해도 혈액이 부족해서 갑작스레 응급상황이 오지 않았던가.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과연 일리가 있었다.
꾸준히 비가 쏟아지면서 병원은 모처럼 달콤한 평화에 빠졌다. 환자는 드문드문 진료실을 찾았으며 입원실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는 일도 없었다.
그 속에서 최기석은 각종 과의 전공서적을 보며 지식을 쌓았다.
이곳에서 필요로 하는 의사는 흉부외과 의사가 아니라 모든 진료가 가능한 만능 의사기에.
드르르륵.
화장실을 가려고 진료실을 나오는데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브나가 보였다. 오늘 자정까지 응급수술을 하고 다시 근무에 나섰으니 많이 피곤하리라.
최기석은 그녀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지켜보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닥터 최. 마침 잘 됐네요.”
화장실 문 앞에서 마주친 나레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미안한데 배수로 작업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비가 내일 새벽까지 내린다는데 배수로를 좀 더 깊게 파야 될 것 같습니다.”
“안 될 이유가 없죠.”
“병원 문 앞에 계세요. 다른 사람들 모아 올게요.”
최기석이 대기하는 동안 나레카가 여섯 명의 스태프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중에는 정설화와 안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대체 왜 의사가 이런 허드렛일까지 해야 되는 겁니까?”
안톤이 팔짱을 낀 채 불만을 토로했다.
안톤은 얼마 전 아브나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켜서 최기석과 실랑이를 벌였던 인물이었다.
“인원이 부족해서 그런 겁니다. 이해해 주세요.”
“아니. 내가 배수로나 파려고 의사가 된 줄 알아요? 내 일은 환자를 돌보는 겁니다.”
“…….”
“안톤,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아무 말도 못하는 나레카를 대신해 정설화가 나섰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이곳은 당신이 근무했던 병원이 아니잖아요. 지금 당신의 말은 병원 환경이 열악한 걸 뻔히 알면서 모른 척하겠다는 소리로밖에 안 들려요.”
“아니. 그러니까 미스 정은 배수로를 파려고 의사가 됐냐고요? 아니잖아요.”
“맞아요. 배수로를 파려고 의사가 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의사가 배수로를 파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정설화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안톤은 마치 의사가 신이 내려 준 직업인 것처럼 말을 하네요. 착각하지 말아요. 우리는 의사 이전에 사람이에요.”
“…….”
“그리고 배수로 작업으로 침수를 막을 수 있으면 그것도 입원환자나 외래환자를 돕는 것 아닌가요? 밴댕이 같은 마음은 그만 버리세요.”
“참 나. 헛소리가 풍년이네.”
“뭐라고요? 방금 헛소리라고 했어요?”
정설화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녀의 사나운 태도에 깨갱했는지 안톤은 정설화의 시선을 피한 채 걷기 시작했다.
“쳇! 하면 되잖아, 하면.”
그는 우비를 걸치고 삽을 한 손에 쥔 채 병원을 나섰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다음에 걸리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고마워요, 닥터 정.”
상황을 지켜보던 나레카가 운을 뗐다.
“닥터 정이 나서 준 덕에 제 속이 다 시원하네요.”
“고마울 것까지는 없어요. 사실 당연한 일인데. 앞으로 저 인간이 꼴 보기 싫은 짓 하면 제게 말해 주세요. 혼꾸멍내 줄 테니까.”
“말만 들어도 든든합니다.”
“그럼 슬슬 작업하러 갈까요?”
최기석은 화제를 돌리며 정설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얌체 같은 인간에게는 한 줌의 자비도 없는 그녀는 역시 그의 여자다.
쏴아아아아.
그치지 않는 빗줄기 속에서 배수로 작업이 시작되었다.
최기석은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병원을 빙 두르고 있는 배수로를 더 깊게 팠다.
늘 병원에서 환자만 보다가 야외에서 육체노동을 하니 기분이 남달랐다.
작업이 아니라 놀이를 하는 느낌이랄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던 그의 입가에 이윽고 미소가 걸렸다.
정설화는 의도적으로 안톤 옆에 붙어서 삽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삽질은 웬만한 남자들과 버금갈 정도로 빠르고 깊었는데 삽질을 하는 내내 안톤이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남자가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안톤, 의사는 맞는데 남자는 아닌 거 같아요. 삽질이 나만도 못하네요.”
정설화가 연신 갈구자 안톤의 작업 속도가 올라갔다.
그녀의 말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지만 실은 상당히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정설화가 안톤을 채찍질(?)하면서 모든 스태프들이 열과 성을 다해 배수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작업하자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만들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최기석과 정설화는 남아서 나레카의 뒷정리를 도왔다.
“이건 제 일인데…….”
“같이 작업했는데 뒷정리도 같이 해야죠.”
정설화의 말에 나레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닥터 정은 정말 멋진 여성이군요. 닥터 최 부럽습니다. 이런 분과 가약을 맺다니.”
“그 생각은 항상 하고 있어요.”
“정말? 역시 우리 여보네.”
깨가 쏟아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레카는 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부러우면 지는 거란 생각을 하며.
뒷정리와 함께 일과가 끝났기에 두 사람은 곧바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복귀한 최기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노트북으로 메일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왔다!”
“응? 뭐가?”
“뉴튜버한테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왔어.”
최기석은 호들갑을 떨며 검지로 메일 답장을 가리켰다.
과거 MHC에서 수련하던 도중 응급실에서 코드 블랙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최기석이 진두지휘에 나서면서 상황이 마무리되었는데 이를 우연치 않게 다이아 버튼을 받은 뉴튜버가 동영상으로 촬영했었다.
최기석이 연락한 뉴튜버가 바로 그 뉴튜버였다.
뉴튜버의 이름은 퓨디카이.
게임 전문 방송을 진행하지만 가끔 자신의 일상생활을 동영상으로 올리곤 했다.
[반갑습니다. 닥터 최. 우선 닥터 최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냐는 질문에 답하자면 당연히 예스입니다. 응급실에서 당신이 보여 준 모습은 꼭 전장을 통솔하는 장군 같았거든요. 당신에 대한 기사도 때때로 확인했습니다. 늦었지만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뉴튜브로 남수단의 열악한 환경을 드러내겠다는 의도는 훌륭해 보입니다. 저 역시 이를 응원하며 닥터 최에게 가능한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메일을 보니 동영상 편집으로 골머리를 앓는 것 같던데, 그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편집을 직접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연출하기도 힘들죠.]
...[제 동영상 편집을 맡고 있는 에디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이 친구라면 분명 밋밋한 동영상이라도 환상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동영상을 찍어서 이 친구에게 연락해 주세요. 편집 비용이 만만치는 않겠지만 MHC의 대주주인 당신이라면 아무 문제없겠죠.]
...[채널을 시작하는 대로 제게 연락 주세요. 제 채널의 구독자들이 닥터 최의 채널을 볼 수 있도록 링크를 달겠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최소한 골드 버튼까지는 무난히 찍을 수 있을 겁니다. 닥터 최의 마음이 부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라는 퓨디카이가.]
“우와. 대박이다. 이런 사람이 홍보를 해 주면…….”
퓨디카이를 검색해 본 정설화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네. 영상 컨셉만 잘 잡아서 찍으면 되겠어.”
“나도 열심히 할게.”
두 사람이 의욕을 활활 태우는 가운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최기석이 문을 열자 낯빛이 창백한 아브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닥터 최. 혹시 시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