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67화 (366/407)

그 어느 무엇도 (1)

“…….”

“…….”

자리에 앉은 에르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최기석 역시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시한폭탄처럼 팽팽해지는 진료실의 분위기.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르반이었다.

“선생님. 저 에이즈 치료 받으면서 아이도 출산할게요.”

“그게 환자분의 뜻입니까?”

“네.”

에르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환자분의 뜻이라면 존중하겠습니다.”

“가…… 감사해요.”

갑자기 흐느껴 우는 에르반.

그녀는 에이즈 확진을 받은 후 달라진 삶에 대해서 쉼 없이 털어놓았다. 가족들조차 그녀를 멀리했을뿐더러 남편은 대놓고 그녀에게 낙태를 권했다고 했다.

“저도 낙태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결혼 생활 오 년 만에 간신히 얻은 아이인 걸요. 이 아이를 포기하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몰라요.”

“…….”

“그런데 선생님. 제가 에이즈 환자면 아이도 에이즈에 걸린 채 태어나는 건가요?”

“그럴 확률은 낮습니다.”

산모가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지 않고 출산했을 때 출생아가 에이즈에 걸릴 확률은 3할.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고 출산할 경우 출생아가 에이즈에 걸릴 확률은 100분의 2.

에이즈 산모와 아이 간 수직 감염의 위험성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그리 크지 않았다.

물론 그 확률조차 꺼림칙하게 여겨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오. 신이시여.”

최기석의 설명에 에르반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아이를 출산하면 아이도 에이즈에 걸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늘 밤잠을 설쳤기에.

“그럼 치료는 어떻게…….”

“아브나. 우리 병원에서 에이즈 입원 치료 가능한가요?”

“아시다시피 제대로 된 격리실이 없어서…… 불가능해요.”

“그럼 적십자 병원으로 후송 보내야겠네요.”

최기석은 에르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진료실 바깥에서 대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직접 적십자 병원에 연락해서 환자를 보내도 좋다는 확답을 받았다.

“혹시 저한테 병이 옮거나 그런 건 아니죠?”

후송을 맡은 나레카가 불안한 표정으로 환자를 힐끔거렸다.

“걱정하는 건 이해하는데 감염이 그렇게 쉽게 되는 건 아니에요.”

HIV에 감염되려면 감염자의 혈액이나 타액이 접촉자의 혈액과 직접적인 접촉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포옹을 하거나 악수를 한다고 감염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감염자와 키스를 한다고 해서 HIV에 반드시 걸리는 것 또한 아니다.

타액은 HIV 바이러스의 농도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입안에 상처가 있는 게 아니라면 키스를 한다고 해도 감염이 될 확률은 적었다.

접촉을 통해 감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의외로 HIV 환자를 통해 HIV를 얻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닥터 최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렇겠지만…….”

나레카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에이즈 환자라고 하면 꺼려지지 않나요?”

“솔직히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최기석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에이즈 환자들의 진료를 거부하는 의사들은 꽤 많았다. 일반적인 수술은 두말할 것도 없고 치과에서는 스케일링조차 해 주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에이즈 환자의 인권 문제가 대두되는 상황이기도 하고 말이다.

“뭐, 적십자에서 환자를 맡기로 했으니 잘하겠죠.”

“네. 지금은 그쪽을 믿어야죠.”

“저는 슬슬 가 보겠습니다.”

나레카와 에르반을 실은 후송차량이 병원을 떠난 후 최기석은 진료실로 돌아왔다.

잿빛 하늘은 여전한 비를 뿌렸고 환자들 얼굴 구경조차 하기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띠리리리링.

별안간 울리는 전화기 소리가 정적을 깨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오베이드 호스피탈 기석 최입니다.”

[…….]

“네. 네.”

[…….]

“삼십 분 안으로 도착한다는 말이죠.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환자를 기다렸다. 잠시 후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성과 한 명의 수행인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닥터 최.”

“안녕하세요. 우선 앉으시죠.”

중년 남자와 악수를 나눈 후 의자를 가리켰다.

중년 남성의 이름은 아부디로 수단의 보건부 장관을 맡고 있었다.

보건부 장관이 대체 무슨 일로 이곳까지 찾아왔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제 방문이 의외라는 표정이군요.”

아부디가 최기석의 표정을 살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밖에요. 제 머리로는 수단의 보건부 장관님과 오베이드 호스피탈의 연결고리를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하하하. 사실 저는 오베이드 호스피탈을 찾은 게 아니라 닥터 최를 보러 왔습니다.”

말을 마친 아부디가 한 장의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 든 각종 검사 자료를 살피는 최기석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관상동맥 협착증이 있군요.”

“네. 맞습니다. 가슴이 아픈 게 심상치 않길래 수도에 있는 알라브 병원을 찾았는데 방금 말씀하신 병을 진단받았습니다. 이쯤 되면 닥터 최를 찾은 이유를 충분히 알겠죠?”

아부디의 말에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재 세계에서 유일한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로 흉부외과 환자라면 누구나 그의 집도를 원하고 있었다.

수단의 장관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수술은 불가능합니다.”

“왜…… 왜입니까?”

그의 거절에 아부디가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병원 시설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곳은 심장 수술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됩니다.”

“정말 미안한 부탁이지만 닥터 최가 수도병원에 와서 집도만 맡아줄 수는 없습니까?”

“제가 자리를 비우면 남아 있는 의사들이 고생하는데…….”

최기석이 곤란하다는 듯 턱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수도에 있는 병원에서 CABG를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쪽 병원에서 집도를 받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만도 않더군요. 닥터 최가 수단에 없었다면 모를까 수단에 있는 이상 꼭 당신에게 수술을 받고 싶어요.”

아부디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강렬한 눈빛을 쏘았다.

“장관님의 입장은 백번 이해하지만 제게도 사정이 있습니다.”

“…….”

“다만 제 조건을 만족시켜 주신다면 직접 수술하도록 하죠.”

“그 조건이 뭡니까?”

“관상동맥 우회술에 필요한 수술 도구를 챙겨 주셨으면 좋겠군요. 만약 수술을 한다면 반드시 우리 병원에서 해야 하니까요.”

“그건 좀…….”

“간단한 도구들은 수도병원에서 빌릴 수 있겠지만 인공심폐기 같은 건 운반도 힘들뿐더러 운반 도중 고장 날 우려가 있지 않습니까?”

아부디가 말끝을 흐리자 곁에 있던 수행원이 한마디 보탰다. 인공심폐기를 운운하는 걸 보면 의료지식이 제법 있는 인물 같았다.

“인공심폐기는 필요 없습니다.”

“네?”

“만약 장관님 수술을 맡게 된다면 OPCAB(무심폐기 관상동맥 우회술)으로 진행할 테니까요.”

최기석은 OPCAB을 설명하면서 메모지에 수술에 필요한 도구들을 적었다.

심외막 고정기를 비롯해서 심장 수술에 필요한 봉합사와 약물 등등을 말이다.

“장관님. 이 정도라면 수도병원에서 빌릴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메모를 살핀 수행원의 말에 아부디가 쾌재를 불렀다.

“좋았어. 그럼 닥터 최. 이 도구들만 챙겨서 병원을 다시 찾으면 당신에게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처치를 준비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죠.”

아부디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전공 수술을 하겠어.’

기분 좋게 떠나는 아부디를 지켜보며 최기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수술 보조를 맡은 동료의사 할렌트, 아브나와 함께 수술실을 찾았다. 전자간증을 앓고 있는 아이샤에게 제왕절개를 집도하기 위함이다.

지이이이잉.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자 수술대에 누워 있는 아이샤가 보였다.

“긴장되죠?”

“아. 네.”

그의 말에 아이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지금이라도 전신마취 할까요?”

“마취 선택은 아이샤의 자유입니다. 다만 전신마취보다 하반신마취를 하는 쪽이 회복은 더 빠를 겁니다.”

“그럼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짧은 대화가 끝나고 하반신마취 및 수술 준비가 이어졌다.

처음 해 보는 산과 수술이지만 최기석은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어제 새벽, 성공적으로 손목접합 수술을 끝마쳤으며 제왕절개 수술 공부도 열심히 했기에.

“지금부터 전자간증 산모에 대한 제왕절개술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할렌트가 수술 부위를 소독하고 방포를 덮었다.

“메스.”

최기석은 건네받은 메스로 아이샤의 하복부를 가로로 절개했다.

절개창을 포셉으로 잡아당기며 넓히자 모습을 드러내는 자궁.

그는 거침없이 자궁하부에도 가로의 절개창을 냈다. 그리고 자궁의 절개창에 두 손을 넣어 태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 상태에서 적절한 힘을 가하며 아이의 머리를 절개창으로 끌어올렸다.

그런데 손쉽게 빠진 머리와 달리 어깨 부위가 절개창에 걸려서 아이를 완전히 빼내는데 애를 먹었다.

‘괜찮아. 차분하게.’

심호흡을 마친 최기석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완전히 자궁에서 꺼내는데 성공했다.

도중에 두 손에 들린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치기도 했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그가 아이를 잡는 동안 아브나가 흡입기로 아이의 코와 입에 묻어 있는 이물질을 제거해 주었고, 최기석은 울지 않는 아이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으아아아앙!”

수술실에 퍼지는 쩌렁쩌렁한 울음소리에 스태프들과 아이샤는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찰칵!

탯줄을 자르고 추가적인 처치에 들어갔다.

최기석은 자궁에 손을 넣어 태반을 제거하고 자궁 안에 남은 이물질이 있는지 살폈다.

태막과 태지 및 핏덩어리 일부가 있었기에 손으로 훑어 곡반으로 옮겼다.

“아브나. 자궁수축제 인젝션 해 주세요. 저는 마사지 하고 있을 게요.”

지시를 내린 그는 장갑을 갈아 끼고 자궁체부를 주물렀다.

출혈 및 자궁무력증을 예방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런데 마사지를 하는 도중 자궁내부에서 출혈이 발생했다. 출혈이야 수술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 양이 불안할 정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닥터 최. 이거…….”

할렌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산후출혈인 것 같아요.”

“할렌트, 일단 수액로에 정질액 투입해 주세요. 산모 호흡이 떨어지고 있으니 산소호흡기도 달아 주고요. 기압은 8 liters/min입니다.”

오더를 내린 최기석은 침착히 환자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과연 할렌트의 예상대로 아이샤는 산후출혈을 겪고 있었다.

하필 처음 해 보는 산과 수술에 변수가 생기다니…….

취이이이익.

자궁에 차오르는 피를 흡입하던 중 그는 흡입통에 차오르는 팩을 응시했다.

출혈량이 벌써 700ml를 넘었다.

제대로 된 처치를 하지 못하면 산모가 위험하다.

‘생각해. 생각해 내는 거야.’

최기석은 미간을 구기며 그동안 공부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하지만 발을 동동 구르던 할렌트는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는 듯 재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닥터 최. 병원장님 모시고 올게요. 우리 중에서 분만 수술을 제일 많이 한 게 병원장님이에요. 지금이라도 병원장님의 도움을…….”

“잠깐만요!”

최기석이 한 손을 뻗어 수술실을 나가려는 할렌트를 막았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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