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이드 호스피탈 (5)
“하아아암.”
하품을 하던 최기석은 창가에 서서 동이 터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적십자 병원에서 수술을 마친 후 다시 당직 근무를 섰다.
환타 칭호의 악랄함을 생각하며 환자들이 더 몰려 올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환타 칭호도 양심은 있는 듯했다.
최기석은 일출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베이드 호스피탈에서 진료 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는 없을까.
좀 더 이곳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방법은 없을까.
이태식 신부가 밴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파한 것처럼.
날이 밝아질수록 그의 고뇌는 오히려 깊어 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는 목이 말라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실 옆에 붙은 쪽방 같은 공간에서 아브나가 닭처럼 졸고 있었다.
총상 환자를 처치하는데 거의 7시간을 소모했다.
오베이드 호스피탈에서 최초 대응을 하는데 2시간, 적십자 병원에 왕복하는데 2시간, 적십자 병원에서 접합 수술을 하는데 3시간이 걸렸다.
혹독한 스케줄을 감안하면 충분히 진이 빠질 만했다.
‘고마워요, 아브나.’
최기석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3층 기숙사로 이동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정설화 역시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설화야. 일어나.”
“…….”
“잠꾸러기 아가씨. 일어나세요.”
“흐응. 진료 시간 아직 멀었잖아.”
정설화가 일어나기 싫다는 듯 배배 몸을 꼬았다.
“오늘 오전 회의 있잖아. 한 시간 일찍 일어나야 돼.”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난 정설화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서 그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뽀뽀는 좋은데…… 그래도 피곤하다.”
“당연히 피곤하지. 접합 수술이 어디 보통 수술인가?”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근데 여보는 당직까지 섰는데 쌩쌩해 보이네?”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는 아니고 내가 원래 체력이 좋잖아.”
“체력이 좋은 걸로는 설명이 안 돼. 자기는 심장이식 수술까지 받았잖아. 혹시…….”
정설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뭔가 날카로운 질문이 나올 것 같아서 긴장했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맥이 탁 풀렸다.
“혹시…… 나 몰래 좋은 거 먹는 건 아니지?”
“먹는 게 있기는 한데. 그건…… 바로 우리 여보의 사랑?”
두 사람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킥킥 거리기에 바빴다.
환자에 치이고 열악한 환경에 들볶였지만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혼자라면 극한의 상황에 내몰려 뒤로 넘어질지 모르지만 둘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설령 두 사람이 넘어지려 해도 맞닿은 서로의 등이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줄 테니까.
얼마 후 최기석은 출근 준비를 마친 정설화와 1층 회의실로 향했다.
“설화야. 먼저 들어가 있을래?”
“왜?”
“나레카랑 할 말이 있어서.”
방역 도구 정리하는 나레카를 발견한 그는 정설화를 먼저 회의실로 보내고 그에게 접근했다.
“나레카, 좋은 아침.”
“반가워요, 닥터 최. 피곤하지 않습니까? 어제 수술하고 당직까지 섰는데.”
“제가 살던 한국에서는 레지던트가 되면 100일 당직이라는 근무를 섭니다. 이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죠.”
그의 말에 나레카가 뭔가 이상하다는 뜻 그를 빤히 쳐다봤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요. 닥터 최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떤 점에서요?”
“닥터 최는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잖아요. 그런데 그동안 제가 지켜본 모습은, 그러니까 실력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레지던트랑 다를 바 없는 것 같아요. 항상 환자를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니까요.”
“그야 당연하죠.”
최기석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전 단순히 명성을 얻기 위해 트리플 보드를 딴 게 아니에요. 더 많은 환자를 살피기 위해 이 자리까지 왔죠.”
“…….”
“지금은 전보다 실력이 더 좋아졌으니 환자를 위해 할 일이 더 많아졌겠죠? 노동 강도만 놓고 보면 솔직히 레지던트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어요.”
“아쉽네요. 닥터 최 같은 분이 3개월 단기 미션만 하고 돌아간다는 게.”
“그건 그렇고 나레카가 물류 관리도 하는 거 맞죠?”
화제를 돌리자 나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 게 있는데. 혹시 동영상을 길게 할 수 있는 카메라를 얻을 수 있을까요?”
“처치 도구가 아니라 카메라요?”
“네. 쓸 곳이 있어서요.”
최기석은 카메라의 용도를 설명했고 나레카는 이를 묵묵하게 들었다.
“안 그래도 오늘 수도에 갈 일이 있는데 최대한 좋은 걸로 구해 보죠.”
“고마워요.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줘서.”
“개인적인 부탁이지만 그 의도는 이곳 사람들을 위한 거지요. 부디 닥터 최의 프로젝트가 꽃을 피우길 바랍니다.”
대화를 마친 최기석은 나레카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본래는 의사들만 참석하는 자리지만 나레카는 병원 외적인 업무의 구심점이라서 매번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와 정설화의 환영식을 했던 회의실에는 병원장 네이마르를 비롯한 여섯 명의 의사들이 먼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는 고생이 많았습니다.”
네이마르가 최기석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응급수술이야 흉부외과에서는 늘 있는 일이죠.”
“닥터 최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정설화의 옆에 앉자 네이마르가 운을 뗐다.
“잡담은 이쯤하고 NSF의 주간 회의를 시작합시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할 이야기가 많군요.”
“…….”
“첫번째는 우리 오베이드 호스피탈의 안전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 병원과 세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한 미치광이가 무장 세력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우두머리의 이름은 알디.
알디는 자신이 불사의 존재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믿으면 누구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며 사람들을 꼬드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습니까?”
이야기를 듣던 최기석이 혀를 찼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가난과 질병에 노출된 사람들에게는 그의 주장이 퍽 달콤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이란 원래 종종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법입니다. 미국에서는 우주인의 존재를 믿은 광신도들이 집단자살을 하기도 했고 그밖에도 비상식적인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죠.”
네이마르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여간 알디 일행과 마주쳐서 좋을 게 없습니다. 당분간 병원 서쪽 부근으로 순회 진료하는 건 중단하죠.”
그의 말에 최기석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서쪽 부근이라면 얼마 전 순회 진료를 다녀온, 의사라는 청운의 뜻을 품은 바두가 있는 곳이다.
당분간 바두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두 번째는 나레카와 관련된 일이군요.”
네이마르의 시선이 나레카를 향했다.
“요즘 응급 물품을 나르는 구호 단체 차량이 습격당하는 일이 잦다고 합니다. 나흘 전에 적십자에서 한 번 당했고 NSF 동부 지부에서는 대원들이 반군에게 몰살을 당했다고 해요. 혹시라도 반군을 마주치면 저항하지 말고 물품을 전부 넘겨주세요. 여러분의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수단은 나라와 지역별 불협화음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구호 물품을 나르는 일이 좋은 일이라고는 해도 반군은 이를 종종 정부가 무기를 들여온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예 물품을 노리고 공격해오는 무리도 있었고 말이다.
“마지막은 좋은 소식입니다. NSF에서 우리 지부의 치료급식센터와 야외 입원실을 증축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빠르면 다음 주 중으로 실사단이 현장에 올 거예요. 그러면 상황이 지금보다는 나아질 테니 다들 그때까지 열심히 해 봅시다.”
“네!”
의사들의 대답과 함께 주간 회의가 끝났다.
* * *
그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최기석은 마지막 환자를 살피고 있었다.
진료실에 들어온 이는 모자였는데 여인의 품에 안긴 아이가 환자였다. 아이는 생후 6개월이 된 영아(출생 후 2년까지의 시기)로 아직 이름이 없었다.
타다다닥.
차트에 아이의 이름을 바루라고 적은 최기석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아이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야위었다.
두 볼은 움푹 패었으며 갈비뼈가 손으로 일일이 셀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이가 영양실조에 걸렸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최기석은 체중 검사를 하고 아이의 피를 뽑았다.
사실 채혈은 아브나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아이의 혈관이 지나치게 보이지 않았다.
혈관을 찾는 게 숨바꼭질이라고 하면 이번 숨바꼭질은 세상 최고의 난이도를 가진 숨바꼭질이었기에.
“이제 아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이의 어머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당분간 치료급식센터에 입원해서 식이치료를 받을 겁니다. 입원기간은 한 달 정도고 하루에 치료용 고단백 우유를 6회 정도 먹게 될 겁니다.”
“그럼 저는…….”
“물론 어머니께서도 같이 입원하셔야 해요. 병원에 모자보건센터가 마련됐으니 어머니도 영양섭취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이의 어머니가 연신 고개를 조아렸고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가슴에 눈길을 주었다.
사실 영양이 부족한 건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정도만 덜할 뿐 어머니 쪽도 영양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이곳에 모든 어머니들이 아이에게 젖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영양 상태가 좋았으면 하는 바람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아브나. 환자하고 보호자 치료급식센터로 안내해 주세요.”
“네, 알았어요.”
모자가 진료실을 떠나면서 오늘의 일과가 끝났다.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치료급식센터를 찾았다.
치료급식센터는 야외에 있었는데 거창한 이름과 달리 텐트를 쳐 놓고 그 안에 들것을 놓은 장소였다.
들것 위에는 움직일 힘도 없는 아이들이 누워 있었다.
아이들은 그가 나타난 것이 신기한지 사슴 같은 눈망울로 그를 쫓기 바빴다.
“[email protected]!#$”
급식센터를 돌고 있는데 한 보호자가 최기석의 팔을 잡았다. 그러더니 검지로 텐트 구석에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자신의 아이를 봐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최기석은 황급하게 들것으로 접근해 신생아로 보이는 아이를 살폈다.
외견상의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아이는 극심한 몸부림을 치는 중이었다.
‘이런!’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결과 아이의 심박수가 급격하게 증가 중이다.
영양치료를 시작하면 혈액량과 심박수가 증가하는데 때때로 이 반응이 과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 이 아이처럼.
“거기 물 좀 주세요.”
최기석이 멀리 떨어진 물병을 가리키자 아이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최기석은 아이의 경동맥을 마사지했다.
촤르르륵.
아이의 어머니에게 물통을 받은 그는 아이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물을 뿌리고 경동맥 마사지를 이어갔다.
처치가 십 분쯤 이어지자 아이의 얼굴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아이 어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받으며 텐트를 나오는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세상에 우유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해진 아이라니.
예전에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환자 유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