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이드 호스피탈 (2)
“구급함은 왜?”
“여길 봐.”
최기석은 휴대폰 불빛으로 사자의 상처 부위를 비췄고 이를 확인한 정설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살갗이 찢어지면서 분홍빛 속살이 드러났다.
그대로 둔다면 감염을 피할 수 없었다.
‘좋았어. 먹힌다.’
사자에게 페인킬러를 사용한 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정설화가 건넨 응급함을 열어 상처를 소독했다.
사자는 그르렁거리면서도 별다른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페인 킬러로 통증을 미리 죽여 놨던 덕분이다.
최기석은 상처 부위에 방수성 패치를 붙이고 그 위를 붕대로 돌돌 감았다.
이것으로 응급처치 끝!
부르르르릉.
때 마침 반가운 시동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닥터 최. 수리 끝났습니다. 출발할 수 있어요.”
운전석에 앉은 나레카가 차에 타라는 손짓을 보냈고 최기석과 정설화는 차로 돌아왔다.
“이제 괜찮을 거야. 다음에 또 보자.”
최기석은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내는 암사자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문득 사자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자 라포가 2단계로 올랐다.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나레카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백미러에 비친 최기석을 응시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무시무시한 사자가 닥터 최 앞에서는 고양이처럼 얌전하던 걸요?”
“나도 놀랐어.”
“운이 좋았지. 미리 챙긴 물건에 도움도 받았고.”
나레카와 정설화의 말에 최기석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까 말한 뉴튜브 동영상 나도 봤으면 좋겠네요. 야생동물에게 공격받지 않을 방법이 있다는 건 정말 획기적이에요. 어떻게 검색하면 되죠?”
“아…… 그게, 이상하게 기록이 안 남아 있네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가 확인해 줄까?”
“어? 어.”
정설화가 그의 휴대폰을 손에 쥐고 뉴튜브의 이미 본 동영상 항목을 선택했다. 하지만 엉터리로 지어낸 뉴튜브 채널이 있을 리가 만무한 법.
결국 그녀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휴대폰이 아니라 컴퓨터로 봤나 봐. 왜 그런 경우 많잖아. 링크 타다가 우연히 자료를 접하는 거.”
“…….”
“아하. 그러셔? 근데 이건 뭐야?”
정설화가 검지로 한 달 전에 본 동영상들을 가리켰다.
동영상들은 전부 러블리 걸즈 멤버들의 무대 직캠 영상이었다. 이영호의 권유로 들어본 러블리 걸즈 음악에 빠진 후 최기석은 금단의 영역인 직캠까지 손대고 말았다.
“러블리 걸즈? 걸그룹 좋아하나 봐?”
“아…… 아니야.”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 걸그룹 직캠 영상을 왜 보셨을까?”
최기석은 그녀의 눈빛에 차오른 살기를 확인하고 팔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높은 정치력과 언변술도 지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은.”
“사실은?”
“고…… 고양이가 눌렀나 봐. 고양이 키우는 동료 집에 놀러갔는데 테이블에 올려 놓은 휴대폰을 고양이가 막 건드리더라고. 아마 그때 재생이 된 것 같아.”
“푸후훗.”
최기석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나레카가 실소를 터뜨렸다.
한국말은 단둘이 있을 때만 사용했기에 지금 대화는 나레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편 정설화는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으며 최기석은 그녀의 시선을 차마 받아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차라리 가시 방석에 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양이가 잘못했네.”
“응? 뭐라고?”
“고양이가 잘못했다고.”
정설화는 휴대폰을 돌려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게 더 무서운 최기석이었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정설화를 간신히 달래고 진료실로 내려갔다.
오베이드 호스피탈은 응급실이 없는 대신 의사들이 번갈아서 응급당직을 서고 있었다.
오늘 당직은 바로 최기석이었다.
진료실 의자에 앉은 그는 한 아름 챙겨 온 책 중에서 산부인과 전공서적을 펼쳤다.
아브나의 말에 따르면 당분간 산과 환자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고 했다.
흉부외과의인 그가 산부인과 지식이 모자란 것은 당연한 일.
이를 보충하기 위해 틈틈이 산부인과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공부에 흠뻑 빠지면서 그의 눈빛이 180도 달라졌다.
마치 스캔을 하듯 내용을 훑었으며 필요한 내용에는 밑줄까지 쳤다.
트리플 보드를 따낸 후 항상 논문을 가까이 했는데 오랜만에 다른 과 전공서적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남달랐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고 하자 아브나가 나타났다.
“피곤하시죠? 커피라도 한잔하세요.”
“고마워요.”
최기석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아브나는 근무 교대 안 해요? 반나절 넘게 본 것 같은데?”
“닥터 최가 당직이니까 저도 같이 밤새야죠. 간호사 일손이 부족하기도 하고.”
“피곤하겠어요. 2교대조차 못하다니.”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러는 닥터 최야말로 피곤하지 않아요? 순회 진료 끝나자마자 당직 서는 거잖아요.”
“삼 개월을 버텨야 하는데 첫날부터 골골댈 수는 없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가 지금까지 쌩쌩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환자 바라기 아이템과 펫 하티의 체력 회복 효과 덕분이었다.
환자 바라기는 처치 시에 체력을 회복하는 기능이 있었고 펫 하티는 일상생활 중에 회복력을 높여 주는 기능이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아니었다면 진작 뻗어 버렸을 것이다.
순회 진료를 끝내고 숙소에 복귀하자마자 침대에 쓰러진 정설화처럼 말이다.
“역시 대단하네요.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 의사는 뭐가 달라도 달라요.”
“어떤 누군가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특별하게 보이는 법이죠.”
“본인이 평범하다고 주장하는 건가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 텐데.”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커피를 마셨다.
화기애애하게 이뤄지는 대화 속에 최기석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미국에 있던지, 한국에 있던지, 수단에 있던지 등등, 장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다 같은 고충을 겪고 있음을.
그런데 한창 대화를 나누는 중 갑자기 부우우웅 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이건 무슨 소리에요?”
“직접 보는 게 빠를걸요?”
아브나의 말에 최기석은 창을 열고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나레카가 방역기구를 어깨에 멘 채 방역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하얀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더불어 말로 표현하기 힘든 텁텁한 냄새가 콧속에 파고들었다.
“신기하네요.”
방역작업 중인 나레카가 별나라 사람처럼 보이는 최기석이었다. 보통 방역을 한다고 하면 방역차량이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식으로 진행된다.
지금처럼 사람이 직접 방역에 나선 건 처음 봤다.
“제대로 방역할 수단이 없으니 어쩔 수 없죠. 그나마 저것도 한 달에 한 번 할까 말까에요.”
“…….”
“참고로 닥터 최도 벌레 조심하세요. 스태프들 중 말라리아에 걸려서 몇 달 동안 고생한 사람도 있거든요. 약 꼬박꼬박 챙겨 먹고요.”
“명심하죠.”
말을 마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환자인가 싶었는데 동료 의사 중 한명인 안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톤은 독일 사람으로 멋들어진 콧수염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최.”
“네. 안녕하세요.”
“첫 당직은 할 만해요?”
“뭐. 아직까지는 환자가 없어서 뭐라고 말하기 힘드네요.”
“몸이 피곤하기는 하겠지만 환자 때문에 골머리 썩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을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려면 한참 걸리거든요. 안 그래도 일 때문에 피곤한 사람들이라 야간 환자는 많지 않아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건 그렇고 아브나. 커피 좀 타 줄래요? 오늘따라 목이 너무 말라서요.”
“안톤. 그건 안 되겠습니다.”
최기석이 똑 부러지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브나의 손목을 잡았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제 손으로 타서 드세요. 왜 근무 중인 간호사에게 잡일을 시킵니까?”
“하하하. 이거 당황스럽네.”
안톤이 쓴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우리 병원에서는 다들 그럽니다. 미스터 최가 몰라서 그래요. 그리고 커피 한잔 타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앞으로도 계속 모르고 싶은 일이군요.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간단한 일을 안톤은 왜 직접 하지 않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참 나. 의사가 간호사 편을 드는 겁니까?”
“본질을 흐리지 마세요. 내가 지금 편 가르기를 하는 걸로 보입니까? 간호사의 업무 중 의사에게 커피를 타 줘야 한다는 항목은 없어요.”
최기석의 지적에 안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묵묵하게 최기석을 노려보다가 문을 쾅 닫고 진료실을 떠났다.
“저 사람, 원래 저렇게 간호사분들을 부려 먹나요?”
“……네. 사실 의사 말고 다른 스태프들은 사람으로 안 보는 분이에요.”
아브나가 조심스럽게 대답했고 최기석은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일부 의사들 중에는 간호사를 비롯해 방사선사 등의 의료기사를 개무시하는 부류가 있었다.
의사라는 직업에 특권의식에 빠진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세상에 혼자서 태어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의료 활동 역시 의사 혼자서는 이뤄질 수 없다.
최소한 환자라는 존재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주변 사람과 교감을 나눠도 모자란 의사거늘 뭐가 잘났다고 독불장군처럼 구는 건지…….
“저는 그만 나가 볼게요. 공부하는데 괜히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천만에요. 환자 오면 바로 들여보내 주세요.”
아브나가 떠난 후 최기석은 다시 산부인과 서적을 읽는데 열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똑. 똑. 똑.
아브나가 환자 및 보호자와 함께 진료실을 찾았다.
환자를 확인한 순간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나른한 기분이 순식간에 씻겨졌다.
환자의 오른쪽 손목에 총상이 있었다.
총상은 총 두 군데로 탄알 하나는 손목을 관통했으며 다른 하나는 손목에 박혀 있었다. 총에 맞은 자리는 새까맣게 그을렸으며 고기 타는 냄새를 풍겼다.
환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친구로 보이는 보호자들은 최기석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경찰이 환자에게 총을 쐈대요.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다고요.”
“미친!”
최기석은 입술을 깨물며 환자의 상처를 소독하고 그 위에 붕대를 감았다.
최소한의 응급처치를 끝낸 것이다.
“아브나. 수술실 잡고 환자 혈액 검사랑 앵클 엑스레이 촬영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윽고 최기석은 검사를 마친 환자를 데리고 수술실을 찾았다.
수술이 가능한 스태프는 총 세 명으로 집도의인 최기석과 수술보조 정설화, 아브나였다. 병원장 역시 집도가 가능하지만 오늘은 회의 참석차 자리를 비우고 말았다.
“닥터 최. O형 혈액이 없어요.”
수술 준비를 하던 아브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같이 온 보호자들 혈액형 물어보고 혈액이 맞으면 수혈하죠.”
“알겠습니다.”
최기석과 정설화는 환자를 내려다보며 초조하게 아브나를 기다렸다. 일 년처럼 긴 십 분이 지나고 아브나가 헐레벌떡 수술실로 복귀했다.
“혈액형을 일치하는데 수혈은 불가능해요.”
“왜죠?”
“그게…….”
아브나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같이 온 보호자들 혈액검사를 해 봤는데 둘 다 에이즈 양성 반응이 나왔어요.”
“아…….”
뜻밖의 비보가 그의 목덜미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