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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61화 (360/407)

오베이드 호스피탈 (1)

최기석은 환자와 한참 실랑이를 벌인 후에야 정상적인 약을 전달할 수 있었다.

물론 환자는 끝까지 못마땅한 얼굴로 불만을 토로했지만 말이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깨달았다.

약제 지식이 없는 환자라면 약의 색깔과 크기로 효능을 오해할 수도 있음을.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많던 환자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중에는 진료를 보고 떠난 사람도 있었고 대기 기간이 길어져 이탈한 사람도 있었다.

순회 진료의 마지막 환자는 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였다.

아이를 마주한 순간 최기석은 깨달았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그가 마주한 아이들이 보통 절망에 시름시름 앓던 것과 달리 아이의 눈은 또랑또랑한 빛을 내뿜었다.

한마디로 삶의 의욕이 있는 아이라고 해야 할까.

“어디가 아파서 왔니?”

“저는 아픈 데가 없어요.”

놀랍게도 아이는 마을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사용했다.

이에 최기석뿐 아니라 정설화까지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럼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

“그것도 아니에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젓는 아이의 모습에서 최기석은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아픈 게 아니라면 대체 진료를 보러 온 이유가 뭘까 싶었다.

“저는 선생님 같은 의사가 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의사가 될 수 있죠?”

아이의 당찬 질문에 최기석은 물론이요 정설화와 나레카마저 탄복했다.

눈 뜨고 잠드는 단 하루마저 힘겨운 게 이곳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소년은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개천에서 용이 태어나려는 것일까.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대답은 나레카가 해 줘야겠는걸요?”

“그래야죠. 넌 이름이 뭐니?”

“바두요.”

“혹시 학교는 다니고 있니?”

“네.”

“다행이구나.

바두의 대답에 나레카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수단의 교육환경은 썩 좋지 못했다.

의무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널려 있었으며 그로 인한 문맹률도 높았다.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역시 낙타가 바늘구멍에 통과하는 것처럼 희박했다.

“우선 학교 공부에 충실하렴. 네가 공부를 잘하면 적십자에 지원을 받아서 해외에서 의사 공부를 할 수 있어.”

“정말이에요?”

“당연하지. 네가 열정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교육지원은 내가 책임지마.”

“네! 그럼 영어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미리 준비하면 아무래도 도움이 되겠지.”

훈훈한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최기석은 바두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냐는 질문이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거든요. 그때 선생님 같은 동양인 의사 선생님이 저를 치료해 주셨어요. 성함이 아마 이태식이었을 거예요.”

바두의 질문에 최기석과 정설화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고 이태식 신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분으로 수단에서 행한 의료봉사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

최기석과 정설화 역시 그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이태식 신부의 숭고한 봉사정신에 눈시울을 붉혔다.

“바두. 공부하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선생님한테 말해 봐. 다음 순회 진료 때 챙겨 줄게.”

“감사합니다.”

바두를 마지막으로 순회 진료의 막이 내렸다.

세 사람은 지프차에 올라 후련한 마음으로 마을을 떠났다.

“바두 말입니다. 이름처럼 강한 아이더군요.”

“그게 무슨 뜻이죠?”

나레카의 말에 정설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두라는 단어는 강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의사가 되겠다는 각오를 보니 제가 괜히 더 뭉클해지는군요.”

“저도 저렇게 심지가 굳은 아이는 처음 봐요.”

“그래서 아직 이 땅에 희망이 있는 거겠죠.”

최기석은 한마디 하고 노을에 물든 평원을 바라보았다.

바두만큼 이태식이라는 존재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미스터 최나 미스 정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이 존경스럽고 어떤 때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험을 분명 했을 거예요.]

[타인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살만한 겁니다. NSF는 그런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거고요.]

문득 어제 네이마르가 했던 말이 귓속에 맴돌았다.

백 번 맞는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법이 아닌가.

이태식 신부가 없었다면 과연 바두가 의사라는 꿈을 품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자칫 타인을 위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최기석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타인을 위한다는 것은 세상을 자신 안에 품는 일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록 단기 미션으로 수단에 왔지만 그 짧은 시간이나마 최대한 아픈 사람들을 보듬어 주리라.

최소 이태식 신부가 이곳에 전했던 사랑의 백분의 일만큼은 따라잡으리라.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지프차가 덜컹거리면서 그 자리에서 멈췄다.

“차가 퍼졌습니다. 잠깐 정비 좀 해야겠어요.”

“네. 천천히 하세요.”

나레카가 차에서 내려 보닛을 열고 차의 상태를 살폈으며 최기석과 정설화 역시 차에서 내려 주변 경관을 응시했다.

공기는 끈적끈적했지만 시원한 바람이 머리를 훑어 주었다.

석양에 물든 나무와 풀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속 묵은 때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나 기분 되게 이상한 거 알아?”

“뭐가?”

“오늘 첫 진료 했잖아. 근데 첫날이 아니라 벌써 일주일은 지난 것 같아.”

“하긴 환자들이 만만치 않았지.”

“그동안 여보는 그 어려운 케이스들의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했던 거야?”

“설화, 네가 내 옆에 있었으니까.”

그의 말에 정설화의 뺨이 석양빛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손을 붙잡고 석양을 바라보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무언가가 수풀을 헤치며 이쪽으로 접근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나레카! 차 수리 멀었어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은데. 왜요?”

“비상사태예요.”

채애애앵!

나레카는 최기석이 검지로 가리킨 곳을 확인하고 스패너를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암사자 한 마리가 이쪽으로 어슬렁어슬렁 접근하고 있었다.

“젠장!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우선 차에 타죠.”

보닛을 닫은 나레카가 운전석에 타고 그 뒤를 최기석과 정설화가 따랐다.

그사이 거리를 좁힌 암사자가 차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차 주변을 기웃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물론 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공포 그 자체였지만 말이다.

“야생 동물을 마주치는 경우가 많나요?”

“흔한 일이죠. 때마침 차가 고장 나는 경우는 처음이지만.”

“기다려 봐요. 사자도 어쩔 수 없을 테니 금방 물러가겠죠.”

정설화의 말과 달리 암사자는 차를 떠나지 않았다.

급기야 차 앞에 털썩 주저앉아 진로를 막기까지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석양이 물러가고 캄캄한 밤이 찾아왔다.

세 사람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대로 가다간 고장 난 차에 갇혀서 꼼짝없이 하루를 지새워야 한다.

만약에라도 코끼리가 덮쳐 온다면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제가 잠깐 나가 볼게요.”

“닥터 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절대로 안 돼!”

나레카와 정설화가 최기석의 의견에 극구 반대했다.

차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암사자의 먹잇감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왜 스스로 무덤을 파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화야. 한번만 믿어 봐.”

“바보 같은 소리! 너는 믿지만 저 사자는 못 믿어!”

“사실 이럴 줄 알고 챙겨 온 게 있어. 사자들은 이거면 사족을 못 쓴대.”

최기석은 약통에서 작은 병을 꺼내 안에 든 액체를 몸에 뿌렸다.

“뭐하는 겁니까?”

“이건 사자가 싫어하는 액체입니다. 이 액체를 뿌리고 사자에게 다가가면 사자가 기겁을 하고 도망친다고 해요. 뉴튜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현지인인 나도 모르는 물건이 있습니까?”

“세상은 넓으니까요.”

최기석이 대충 둘러대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자 정설화 역시 그 액체를 뒤집어썼다.

“네가 굳이 사자를 쫓겠다면 나도 같이 갈게.”

“……알았어. 대신 내 뒤에 꼭 붙어.”

“잠깐만요. 두 사람 다 뭐하는 겁니까!”

최기석과 정설화가 함께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나레카는 정신이 아찔했다. NSF 활동을 십 년 넘게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두 사람의 무모한 행동에, 아니 정신 나간 행동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차를 막고 있던 암사자가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피 말리는 대치 상황 속에 최기석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물론 생각 없이 뛰쳐나온 것은 아니었다.

[애니멀 러버]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요. 그대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돌려받지요.

- 칭호 효과: 종에 무관하게 동물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접촉한 모든 동물과 자동으로 라포 1단계를 얻습니다.

상태창을 살피던 중 애니멀 러버 칭호를 발견했다.

이 칭호가 있다면 암사자가 먼저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불사신 칼라일이라는 막강한 수호신이 존재했고 말이다.

암사자를 마주치겠다고 판단한 데는 다 근거가 있었다.

다만 이를 정설화와 나레카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워 이상한 액체와 뉴튜브 동영상을 들먹였을 뿐이다.

“무…… 무서워.”

“괜찮아, 설화야.”

최기석이 설화를 다독이는데 코앞까지 다가온 암사자가 코를 찡긋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러덩 누워서 배를 뒤집어 깠다.

그 모습이 꼭 애완견이 재롱을 떠는 것 같았다.

암사자의 행동에 그는 긴장을 풀고 몸을 숙여 암사자의 배를 쓸어내렸다.

“크르르릉.”

암사자가 몸을 흔들며 그의 손길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정설화와 나레카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저 사나운 맹수가 어찌 고양이보다 더 온순하단 말인가.

“기…… 기석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말했잖아. 괜찮을 거라고.”

“그 액체는 사자를 쫓는 거라면서. 근데 사자가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네. 뉴튜브에는 분명 그렇게 나왔는데.”

최기석은 딴청을 피우다가 나레카와 눈이 마주쳤다.

“나레카. 수리를 계속해요. 사자는 내가 맡을게요.”

“정말 괜찮을까요?”

“친구의 친구를 공격하는 일은 없잖아요. 사람이 그런 것처럼 동물도 그렇겠죠.”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볼게요.”

나레카가 용기를 내서 차에 내린 후 다시 정비에 나섰다.

걱정과 달리 암사자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저 그르렁거리며 최기석의 손길을 즐길 따름이었다.

‘놀고 싶어서 기다렸던 건지도 모르겠네.’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암사자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칭호 덕분에 사자와 라포 1단계가 형성된 상태다.

다만 한 가지 거슬리는 것은 진단명에 열상이 떠올랐다는 점이다.

사자를 관찰하던 그는 곧 암사자의 허벅지 부근에서 찢어진 상처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사냥 중에 다친 모양이다.

“설화야. 미안한데 구급함 좀 가져다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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