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 (5)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캐리어를 끌고 MHC를 나섰다.
그러던 중 돌아서서 MHC를 바라보는데 울컥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의 수련은 MHC에서 시작해서 MHC에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레지던트부터 펠로우까지.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오랜 기간을 MHC에서 보냈다.
사실 마음의 고향은 의진대가 아니라 MHC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중한 동료와 스승들 생각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걸었다.
수련은 끝났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
그때까지는 MHC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택시에 탄 최기석은 물끄러미 바깥 경치를 살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건물들, 출근하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활력.
이 익숙한 모습들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는 NSF에 지원했으며 척박한 땅 아프리카에서 다시 의료 생활을 시작한다.
‘잘할 수 있어. 분명.’
최기석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앞으로의 일정을 떠올렸다.
그가 지원한 NSF는 경계 없는 의사회의 약자다.
NSF는 의료 후진국인 나라를 방문하여 의료복지를 돕는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적도 있었다.
그의 활동기간은 3개월.
보통 NSF는 6개월 이상의 장기 지원자를 구하지만 그가 지원자로서는 희귀한 흉부외과의라서 특별히 단기 미션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도착한 공항.
최기석은 로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주변을 훑었다.
시간이 빨라서 그런지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편안히 먹고 TV를 보는데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별안간 누군가가 두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누구 게?”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사람.”
대답을 하자마자 등 뒤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깜깜했던 시야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왜 웃어? 내가 틀린 말 했어?”
“아니. 너무 맞는 말이라서. 하여간 우리 여보는 센스만점이라니까.”
고개를 돌리자 정설화가 방긋 웃고 있었다.
NSF 활동을 하는 것은 최기석만이 아니었다. 그가 NSF에 지원하고 싶다는 뜻을 표하자 정설화 역시 함께 활동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오래전부터 의료봉사 하고 싶었어.]
[의진대에서 삼 개월씩이나 자리 비우는 걸 봐준데?]
[그럴 리가 있겠어? 그냥 이 기회에 자리를 옮길까 생각 중이라서. 나 인기 많아. 오라고 하는데 많거든?]
[…….]
[그리고 얼렁뚱땅 혼자 갈 생각하면 가만 안 둬.]
NSF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말을 꺼낸 날, 정설화는 그렇게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최기석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고 말이다.
그래서 NSF활동을 하면 힘들 거다, 괜히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아니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MHC에서 나오니까 기분이 어때?”
“싱숭생숭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아. 굳이 따지자면 나쁜 쪽에 가깝겠네.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랄까.”
“MHC에서만 5년 가까이 수련했으니까 당연하지.”
정설화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여보라면 어디에 있든 잘할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고마워.”
두 사람이 따뜻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가운데 비행기 탑승시간이 찾아왔다.
최기석과 정설화는 비행기에 올라 대화를 이어갔다.
처음 하는 의료봉사 활동, 들뜬 마음과 기대감 그리고 걱정을 숨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윽고 북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까지 가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두 번의 환승 끝에 두 사람은 목적지인 남수단에 도착했다.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졌지만 현재는 문화적 차이로 북수단과 남수단으로 나뉘었다.
두 사람의 활동 지역인 남수단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여러 부족이 모여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수도에 위치한 주바 국제공항에 발을 디디자 끈적끈적하고 습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나라만이 가진, 특유의 알 수 없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기도 했다.
최기석은 캐리어를 끌며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처럼 주변을 훑었다.
각종 간판과 공항을 활보하는 수단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혼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정설화와 함께 입국 절차를 마친 그는 공항 로비에 서서 가이드를 기다렸다.
때마침 한 남자가 다가와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NSF에 지원한 닥터 최와 닥터 정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물류관리와 응급수송 파트를 맡고 있는 나레카라고 해요.”
현지인 가이드 나레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악수를 청했고 두 사람은 그와 가볍게 통성명을 나누었다.
나레카의 영어가 유창했기에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었다.
“우선 의료활동을 할 오베이드로 이동하겠습니다. 택시를 타고 개인 공항으로 가죠.”
“또 공항으로 갑니까?”
“네. 개인 비행기를 이용해 오베이드로 가는 게 제일 안전해요. 내전이 끝난 게 아니라서 잘못했다가는…….”
나레카가 총 쏘는 시늉을 했고 이는 두 사람에게 아주 효과적인 의사전달 수단이 되었다.
얼마 후 세 사람은 택시를 타고 개인 공항으로 이동했다.
“닥터 최의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흉부외과 의사라고 하던데 굳이 NSF에 지원한 이유가 있습니까?”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환자를 생각하는 제 마음도 다시 다지고 싶었고요.”
“흐음…….”
나레카가 가만히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저는 NSF에서 십 년 넘게 활동했습니다. 지원자가 미션기간을 버틸 수 있는지 없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죠.”
“저는 어떤가요?”
“눈빛에 심지가 살아 있는 걸 보니 최소한 중간에 도망치지는 않겠군요.”
“미션 중 도망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생각보다 많아요. 닥터 최 바로 직전에 파견 온 사람은 병원에서 첫 진료를 보자마자 백기를 들었죠. 시설 좋은 병원에서 돈 걱정 없는 환자들을 진료하는 것과 NSF 활동은 천지 차이입니다. 온실 속 화초와 사막에 있는 선인장의 사는 법이 다른 것처럼요.”
나레카는 말을 하며 최기석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적당히 겁을 주었음에도 그의 표정은 손톱만큼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쯤하면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치기 마련이거늘.
겁이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는 조만간 알 수 있으리라.
“의료활동을 하는 곳이 정확히 어디입니까?”
“오베이드 외곽에 위치한 오베이드 호스피탈입니다. 직접 보면 병원이라는 말이 조금 무색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근처에 그 같은 병원도 없죠.”
“…….”
“혹시 천막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줄 알았나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NSF에서 구체적인 장소는 언급 안 했으니까요.”
“뭐. 천막 진료소가 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점점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장소가 사람을 만든다고 천막 진료소에서는 제아무리 날고 기는 의사라도 제대로 된 치료가 불가능하죠.”
“오베이드 인근의 다른 병원은 있습니까?”
“차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하면 적십자가 운영하는 병원이 하나 있습니다. 오베이드 호스피탈보다 그쪽 시설이 조금 더 좋습니다.”
“그렇군요.”
최기석은 나레카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정보를 캐냈다. 수단에서의 의료활동이 어떤 방식으로 굴러갈 런지,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서 현지인 가이드를 통해 최대한 정보를 모아 두고 싶었다.
“조끼는 안 주시나요? 활동 시작하면 조끼를 지급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 그 조끼, 안 입는 게 나을 겁니다.”
정설화의 질문에 나레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조끼를 입으면 NSF 직원이라고 드러내는 셈인데 그러면 오히려 표적이 될 수 있어요. 청바지에 편한 티를 입는 게 제일 좋습니다.”
“표적이라면 혹시…….”
“뭐. 설명 안 하더라도 이해할 거라 믿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입을 열었다.
“나레카는 왜 NSF에서 활동하고 있습니까? 영어가 가능하면 더 좋은 일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거야……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비밀 하나씩은 가슴속에 묻고 사는 것처럼요.”
말을 흘리는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요동쳤지만 최기석은 더 묻지 않았다.
택시가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나레카는 의료 활동 중에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알려 주었다.
삼 개월 동안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들을 두 사람은 뼛속 깊숙하게 새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개인 항공에 도착한 세 사람은 허름한 비행기를 타고 다시 오베이드로 향했다. 심하게 덜컹거리는 사제 비행기 속에서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다행히 사고는 터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베이드에 도착한 일행은 다시 지프차를 타고 오베이드 호스피탈을 찾았다.
천신만고 끝에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깜깜한 밤이 되었다.
“여기군요.”
최기석은 오베이드 호스피탈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은 현대식으로 지어진 3층짜리 건물인데 외관을 보면 대략 120병상 정도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병원은 마음에 드십니까?”
“생각보다 좋은데요?”
“하하하. 기대치가 엄청나게 낮았던 모양이군요.”
정설화의 말에 나레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실망하지 마세요. 병원은 어떨지 몰라도 두 분이 상대할 환자들은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테니까.”
나레카가 뜻 모를 말을 하고 앞장섰고 두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우선 병원 안내부터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하고 있는 스태프들과 천천히 인사해 보죠.”
“네. 그렇게 해요.”
나레카와 함께하는 병원 견학의 막이 올랐다.
오베이드 호스피탈의 1층은 진료실이었다. 진료실은 총 다섯 곳으로 나누어졌으며 진료실 앞에는 ‘진료과’가 아닌 진료하는 의사의 명패가 달려 있었다.
“현재 이곳에 있는 의사들은 현지인 의사 두 명과 캐나다에서 온 의사, 이렇게 셋입니다. 두 분이 왔으니 이제 다섯 명이 된 셈이죠. 의사가 부족하니 과를 가리지 않고 모든 분야를 진료하셔야 합니다.”
나레카의 설명을 들으며 1층에 위치한 처치실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처치 도구는 넉넉하네요.”
정설화가 서랍장을 살피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제가 수완이 좋거든요. 다음에는 2층으로 갑시다. 2층에는 입원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나레카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입원실에는 환자가 최소 일곱 명씩 있었는데 그들의 보호자까지 자리를 차지하면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일부 병실에는 침상이 없어서 들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는데 MHC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병실이 아니라 환자들을 우리에 가둬 둔 느낌이 더 강했다.
“직접 보면 알겠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5인실조차 꿈도 못 꿉니다. 제아무리 부자가 오더라도 말이죠.”
나레카가 담담하게 말하며 계속 걸었고 최기석은 환자들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후 NSF 활동이 만만치 않음을 직감했다.
팔이 절단된 환자부터, 영양실조를 겪는 환자, 수면병에 걸린 환자, 샤가스 병에 걸린 환자 등등.
도무지 만만한 환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