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 (3)
이른 아침.
최기석은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던 그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갖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지난 사년의 세월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었다. 턱은 예전보다 날카로워졌으며 눈에서는 무엇을 향한지 모를 독기가 뿜어졌다.
레지던트 초반에 파릇파릇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의 그는 그저 외모만으로 환자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 만큼 변해 있었다.
욕실을 나온 최기석은 가운을 걸치고 기숙사를 떠났다.
레지던트가 아니라 일찍 출근할 필요가 없건만 몸에 밴 습관은 좀처럼 떼어 내기 힘들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상태창을 살피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직업 및 전공: 흉부외과 펠로우(소아심장외과/폐식도외과/소아흉부외과)
체력: 8/12
진단력: 9/10
외과적 처치: 12/14
내과적 처치: 8/10
평판: 9
정치력: 9
카리스마: 9
의료에 관련된 모든 수치가 정점을 찍었다.
그중에서 가장 고무적인 부분은 단연 외과적 처치다.
다른 써전들의 처치 한계치는 10이었지만 최기석은 이미 12를 찍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뜻이다.
과거 의진대에서 수련하던 시절 강하나가 그를 초 인턴이라 불렀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말 그대로 초 닥터가 되어 버렸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다.
그런 말을 한 시인이 있었지만 최기석을 키운 건 팔 할이 환자였다.
MHC의 명성에 몰려드는 수많은 환자들.
그 다양한 임상을 경험하면서 그는 트리플 보드를 달성한 두 번째 흉부외과의로 거듭났다.
“교수님, 오셨어요?”
복도에서 마주친 인턴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펠로우 과정을 끝낸 최기석은 교수직함을 달고 외래 진료 및 수술에 참여하고 있었다.
“오늘도 일찍 나오셨네요.”
“가만히 누워 있으니 몸이 간질간질해서. 밤새 별일은 없었고?”
“네. 쥐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웬일로 응급실 콜도 없더라고요.”
“운이 좋았네. 수고.”
최기석은 인턴에게 인사를 건넨 후 병실을 돌았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채 성인 병동을 라운딩하고 소아병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던 중 한 병실 앞에서 발걸음이 뚝 끊겼다.
곤히 잠든 아이와 부모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에 최기석은 병실 문 앞에서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이름은 카를.
아이는 생후 3개월이 된 신생아로 발육부전성 좌심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발육부전성 좌심 증후군이란 승모판의 협착, 좌심실 형성 부전, 대동맥 판막의 폐쇄 등의 여러 기형이 동시에 나타나는 복합 질환이다.
다양한 증상이 겹쳐진 만큼 수술의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수술의 첫 단계가 바로 노우드 수술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오늘 오후에 수술할 환자가 바로 카를이고 말이다.
‘호흡곤란과 청색증이 심해졌어. 수술 시간을 앞당겨야 할지도 모르겠네.’
한참 카를을 지켜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손가락이 볼을 찔렀다.
덕분에 얼굴을 보지 않아도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신 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장난질이니?”
“아침이니까 장난질이지. 서로 외래 들어가면 보기 힘들잖아.”
“네,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최기석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찰스와 눈을 마주쳤다.
지난 사 년간 성장한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찰스 역시 봉합 연습과 논문독파의 힘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현재는 성인심장외과 펠로우를 마친 상태로 그처럼 외래 진료를 보고 있었다.
주 진료 분야는 관상동맥 질환과 대동맥 질환, 심장판막 질환이다.
“저 환자야? 오늘 노우드 수술 받는 환자가?”
“맞아.”
“아무리 너라도 고생 좀 하겠다. 신생아 심장을 가르고 봉합하다니……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해. 손 한 번 까딱 잘못 놀리면 그냥 이거 아니냐.”
찰스가 손가락으로 목 긋는 시늉을 했다.
“뭐. 세상에 안 힘든 수술이 어디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수술마다 난이도가 천차만별이라는 것도 사실이잖아. 그건 그렇고 진짜 나갈 거야?”
“응.”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넌 이미 스타 흉부외과의이자 동시에 메이죠의 대주주라고. MHC에 나가는 건 제 복을 걷어차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찰스는 최기석을 설득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HC를 떠난다는 최기석의 선택을 수백 번 곱씹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면 조금 이해라도 하겠지만 너 NSF 지원했다며…… 왜 생고생을 자처하는데.”
“새로운 도전이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환경에서 수련하고 싶었거든. 어차피 3개월짜리 단기 미션이기도 하고.”
“마음은 이미 굳혔어? 되돌릴 여지는 없는 거야?”
찰스의 질문에 최기석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생은 네가 택하는 거니까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섭섭하다. 우리 계속 같이 갈 줄 알았는데.”
“같은 곳에 있지 않을 뿐이지 하는 일은 똑같아. 환자를 보살핀다는 점에서 말이야.”
“네,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찰스는 최기석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병실 앞에서 대화를 하던 두 사람은 이내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계속했다.
MHC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아침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그날 정오, G 로젯 앞.
최기석은 스태프들을 모아놓고 카를의 수술 직전 브리핑을 진행 중이었다. 본래 수술 시간은 오후 3시지만 환자의 상태가 나빠져 스케줄을 당겼다.
“환자는 생후 3개월 된 신생아 카를. 청색증으로 내원해서 심초음파를 받은 결과 대동맥판막 폐쇄와 대동맥 협착, 삼첨판막 폐쇄부전증 등이 발견되어 발육부전성 좌심 증후군 확진을 받았다.”
“…….”
“오늘 수술 과정은 크게 세 가지야. 하나는 상행대동맥과 심방중격에 기형을 잡아 주는 일이고 둘째는 대동맥관의 협착부위를 넓혀 주는 일, 마지막으로 삼첨판막을 성형하는 일이야. 질문 있는 사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제3보조인 레지던트 기욤이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 환자에게 꼭 노우드 수술이 필요한가요?”
기욤의 질문에 다른 스태프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응시했다.
일부는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기도 했다.
집도의가 누구인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트리플보드 흉부외과의를 달성한 최기석 아닌가.
그런데 기욤의 질문은 그의 수술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무슨 뜻이지?”
“제 짧은 소견으로 말씀드리자면 카를의 심장 상태는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심각합니다. 이런 수준이라면 노우드 수술보다 심장이식이 더 효과적인 건 아닐까요?”
“좋은 질문이야.”
최기석이 미소를 띤 채 기욤을 칭찬했다.
“발육부전성 좌심 증후군의 치료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노우드 수술 이후 폰탄 수술을 진행하는 거고 나머진 네가 말한 심장이식 수술이지. 기욤, 이번에는 내가 묻겠어. 그럼 내가 왜 심장이식 대신 노우드 수술을 선택했을까?”
“으음…… 그게.”
“간단하게 생각해 봐.”
“그러니까…….”
“힌트는 수술 후야.”
그의 말에 기욤이 알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이식 거부반응이 일어난 확률이 높은 점이랑 면역억제제를 평생 먹어야 하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맞았어. 신생아 때부터 면역억제제를 먹으면서 자라는 건 너무 가혹하지. 면역억제제를 먹으면 몸이 나른해지거든. 나도 쭉 그래 왔고.”
“교수님은 예외 아닌가요?”
“참고 있을 뿐이야.”
최기석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환자의 미래를 생각하면 나는 노우드 수술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카를의 경우 심장이식보다 노우드 수술의 난이도가 더 높지만 그걸 견뎌 내는 게 의사의 몫이지.”
“역시 교수님이십니다.”
“오늘 수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스태프들이 감명을 받은 듯 눈에서 레이저를 쏘았다.
“자. 각설하고 스크럽부터 시작하자.”
박. 박. 박. 박.
포비돈 용액이 묻은 솔로 손과 팔뚝을 문지르면서 최기석은 수술과정을 복기했다.
지난 사 년간 노우드 수술을 스무 차례 가까이 경험했다.
처음에는 권일수의 보조로 들어갔고 어느 순간부터는 직접 집도에 나섰다. 다만 여태껏 경험한 노우드 환자들 중 카를의 상태는 단연 최악이었다.
오죽하며 일반 써전들의 능력치를 초월한 그조차 수술이 부담스러울까.
‘실패는 없어. 반드시 살린다.’
최기석은 로젯에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이윽고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수술 준비에 나섰다.
타임아웃, 환자 감시 장치 연결, 수술 도구 세팅 등등, 모든 과정이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렀다.
“닥터 최. 미안합니다. 앞서 잡힌 수술이 생각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마취의 루이스가 뒤늦게 합류했다.
“사과는 제가 해야죠. 수술 스케줄은 당긴 건 저니까요.”
“늦은 만큼 바이탈 관리는 더 철저히 하겠습니다.”
루이스는 환자 머리맡에서 마취 전문 간호사와 마취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자신도 모르게 최기석을 힐끔거렸다.
사 년 전만 해도 그를 잠재력이 뛰어난 레지던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감히 넘보기 힘들 정도로 큰 거목으로 성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인 흉부외과의를 꼽는다면 누구나 주저 없이 최기석을 택할 테니까.
파릇파릇할 때의 최기석과 지금의 최기석이 겹쳐지자 문득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흐르는 강물과 세월은 잡을 수 없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았다.
분주한 움직임 속에 마침내 수술 준비와 전신마취가 끝났다.
뚜두둑.
최기석은 가볍게 목을 꺾은 후 카를을 내려다보았다.
태어난 지 3주 밖에 안 된 아이는 마취에 빠져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질병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위독한 상황인지.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힘차게 울며 제가 아픈 것을 부모에게 알리는 것뿐이었다.
소아 환자를 수술할 때면 유난히 가슴이 아픈 그였다.
“지금부터 발육부전성 좌심 증후군에 대한 노우드 수술을 실시한다.”
그의 말에 스태프들이 바쁘게 소독 및 방포 작업에 나섰다.
특별히 에이스들만 뽑아온 만큼 전처리는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
스으으으윽.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는 메스가 환자의 피부를 갈랐다.
이어진 정중골 개흉술이 무사히 끝나고 견인기를 좌우로 벌리자 수술 부위인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쿵.
조막만 한 심장이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서둘러 치료해 달라며 아우성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심정지액 주입해 주세요. 인공심폐기 연결하겠습니다.”
제1보조인 조나단이 대퇴동맥과 우심방에 캐뉼러를 꽂자 인공심폐기가 가동됐다.
곧 마취에 빠진 카를처럼 심장도 포근히 잠들었다.
“우선 심장 상태부터 체크한다. 다들 알겠지만 검사 결과와 개흉 후의 수술 부위 확인 결과는 다를 수 있어.”
“네!”
피 말리는 분위기 속에 스태프들의 시선이 카를의 심장에 고정되었다. 대동맥판막 폐쇄와 대동맥 협착, 삼첨판막 폐쇄 부전증 등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만만치 않은걸?’
수술 부위 파악을 끝마친 최기석의 눈매가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