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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56화 (355/407)

모험 (2)

다음 날.

최기석은 아침 일찍 일어나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그리고 항상 그래왔듯이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채 환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환자들의 상태는 병동처럼 조용하며 문제가 없었다.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라훌은 거부 반응 없이 순조롭게 회복 중이었다.

쥰 증후군으로 흉곽을 늘리던 켈리는 이제 퇴원할 일만 남았다.

가장 신경 쓰이는 환자는 어제 호프 수술을 받은 바론인데 그 역시 순조롭게 호전되고 있었다.

수술환자의 경과가 좋은 것만큼 외과의를 기쁘게 하는 일도 없는 법.

라운딩을 끝낸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드르르륵.

의국으로 들어가자 찰스가 진이 빠진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긴 한데…… 네 표정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어젯밤 다중추돌 T.A(교통사고)가 터졌거든. 환자 보느라 생고생했다.”

찰스가 말도 말라는 듯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건 그렇고 그 소식 들었어?”

“뭐가?”

“어제 저녁부터 네 소문이 돌던데? 네가 메이죠의 대주주라고 하는 아주 괴상한 소문 말이야. 세상에 수련 중인 레지던트가 병원 대주주라니…… 그게 말이야 방구야. 막장 드라마에도 그런 식의 전개는 없지.”

“흠흠. 그게 말이지.”

최기석은 헛기침하고 말을 계속했다.

“맞아. 내가 메이죠의 대주주야.”

“아침부터 재미없는 농담하지 마. 그건 죽었다가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잖아.”

“죽었다가 깨지 않아도 가능한 일인 걸?”

“됐다.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 지금은 농담으로 입씨름하는 것도 피곤하다.”

못 믿겠다는 찰스의 반응에 최기석은 굳이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정말 대주주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찰스의 표정을 상상하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인수인계 잘하고 기숙사에서 푹 쉬어.”

“뭐야? 오늘 근무 안 해?”

“오프잖아.”

“그러니까 너한테 오프가 어디 있냐고. 오프 때 자리를 비운 게 다섯 번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럴 일이 있어. 수고.”

최기석은 찰스와 작별한 후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후 1시까지 쪽잠을 자다가 씻고 기숙사를 나섰다.

하늘이 유난히 높고 푸르렀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기분 좋게 얼굴을 스쳤다.

그렇게 MHC 건물까지 벗어나는 순간, 최기석은 별세계에 입장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분주하게 거리를 걷는 사람들.

주변에 펼쳐진 가지각색의 건물들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순전히 휴식 목적으로 외부에 나온 게 처음이라서 그런 듯싶었다.

“설화야!”

거리를 걷던 중 횡단보도 맞은편에 있는 정설화를 발견했다.

그를 발견한 정설화 역시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신호가 바뀌고 만난 마주한 사람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택시 타고 시내로 가자. 뉴욕 중심부로 가면 볼 거 많아.”

“그것도 좋은데 지금은 걷고 싶어.”

“그럴까?”

두 사람은 찰싹 달라붙어서 애정을 과시하며 걸었다.

오랜만의 만남.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넘쳐흘렀다.

“요즘 생활은 어때?”

“항상 똑같지 뭐. 외래진료 보고 남은 시간에는 눈문 준비 아니면 페이스메이커 삽입이나 PCI 같은 처치하고.”

정설화가 최기석을 올려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기석이 너처럼 스펙터클한 일은 안 겪으니까 걱정 마.”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잖아. 이 사고뭉치야.”

“아버님도 건강하시지?”

“물론.”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최기석은 한시름 놓았다. 정기적으로 정진명과 화상통화를 하며 상태를 살피고 있기는 하지만 불의의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아침에 뉴스 봤어? 어제 호프 수술한 거 ABD방송에 나왔어.”

“확인은 안 해 봤는데.”

“좋은 건 빨리 봐야지.”

정설화가 기사를 검색한 휴대폰을 그에게 내밀었다.

[한국에서 건너 온 흉부외과의, 심부전증 환자에게 희망의 화살을 쏘다.]

[성공적으로 끝난 호프 수술. 세계 흉부외과협회에서 극찬 쏟아져.]

[심장이식의 새 지평. 호프 수술을 말하다.]

그녀의 말대로 호프 수술 검색결과가 하루 만에 무더기로 쏟아졌다. 안 그래도 언론 플레이를 준비했던 최기석인데 할 일이 줄어들 셈이다.

“역시 내 남친. 자랑스러워.”

“설화야 근데 앞으로는 남자친구라는 호칭은 안 썼으면 좋겠어.”

“왜?”

최기석의 말에 정설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친구라는 표현의 어느 부분이 그의 신경을 건드린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남자친구라는 말은 너무 가볍잖아. 기왕이면 여보 말고 자기 아니면 남편이라고 해 줘.”

“꺄아아악! 뭐야 그거!”

정설화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몸서리를 쳤지만 내심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셋 중에 뭘로 할래?”

“꼭 셋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여보로 할게.”

“안 들리는데? 다시 한 번 말해 줄래?”

“여…… 여보.”

부끄러워하는 정설화의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최기석은 그녀 머리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남들이 닭살 돋는다고 수군거릴지 모르지만 무슨 상관인가.

나만 즐거우면 그만 아닌가.

대화를 나누며 걷던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뉴욕의 중심부로 향했다.

본격적인 데이트의 시작.

최기석과 정설화는 오페라 파크를 거닐고,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각종 전시물을 구경했으며, 타임 스퀘어의 중심부에 녹아들었고, 자유 여신상의 왕관 부분까지 올랐다.

뉴욕은 볼거리가 넘치는 곳이었다.

명소를 다 둘러보지 못했음에도 금방 저녁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뉴욕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상층부에 위치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는 고풍스러웠으며 직원들은 친절하면서 절제된 예의를 지켰다.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는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최기석은 오랜만에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 너무 좋았어. 고마워. 기석아.”

정설화가 최기석의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약지에 껴진 반지가 샹들리에 빛을 반사하면서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이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시간만 더 있었으면 구경을 더하는 건데.”

“괜찮아. 원래 넘치는 것보다 부족한 게 더 좋다고 하잖아.”

“우리 설화 말도 예쁘게 하네.”

“메인 디시 나왔습니다. 포도 소스를 곁들인 채끝등심 스테이크입니다. 이 음식은…….”

직원이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메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두 사람은 메인디시와 와인을 즐기며 대화를 이어갔다.

“나 얼마 전에 메이죠 대주주 됐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정설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최기석이 먼저 보고했기에 웬만한 소식은 다 알고 있었다.

“사실 수술 당일에 주주총회 들어갔어.”

“금융매니저랑 같이?”

“아니. 나 혼자.”

“정말?”

정설화가 놀란 토끼눈을 했다.

“혼자서 다른 주주 상대하면 힘들잖아. 너는 전문 경영인도 아닌데.”

“맞는 말이지만 누군가를 대동하면 얕잡아 볼 것 같아서.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들어갔지.”

“그래서 이야기는 잘했어?”

“깔끔하게 끝냈지. 병원을 쥐락펴락하던 놈들의 계획을 전부 취소시키고 제일 마음에 안 들었던 인간은 자르기로 했어.”

“우리 여보. 완전 단호박이네.”

“세상에 나만 한 단호박도 없지.”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레스토랑 한구석에 놓인 피아노를 응시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애초에 이 레스토랑을 찾을 것은 좋은 분위기에서 피아노를 치기 위함이 아닌가.

트레이닝 룸에서 갈고닦은 솜씨를 보여 줄 타이밍이 왔다.

“잠깐만 있어 봐.”

자리에서 일어난 최기석은 직원과 대화를 하고 피아노 앞에 섰다.

어느새 피아노 곁에는 스탠드 마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아. 안녕하세요. 저는 MHC 흉부외과에서 수련 중인 기석 최라고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게나마 그동안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말에 사람들의 관심이 단번에 쏠렸다.

일부는 최기석을 보기 위해 의자를 돌릴 정도였다.

정설화 역시 호기심 반 기대감 반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설화야. 고마워.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힘든 수련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다 네 덕분이야.”

“…….”

“네가 나를 배려하고 보살피지 않았으면 결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항상 고맙고 사랑해. 마지막으로 눈 감을 때까지 너와 함께하고 싶어.”

말을 마친 최기석이 의자에 앉았다.

그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차분하게 건반을 두드렸다.

따라라라랑~

감미롭고 달콤한 연주가 이어졌다.

공든 탑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그동안 갈고닦은 연주 솜씨가 빛을 발했다.

건반을 두드리는 내내 한 차례의 실수도, 망설임도 없었다.

로젯에서 환자와 수술에 녹아들듯이 그는 피아노와 연주에 혼연일체를 이루었다.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사랑.

그것을 정설화가 알아 주기를 바라며 손가락에 혼을 실었다.

짝. 짝. 짝. 짝.

연주가 끝나자 박수갈채가 터졌다.

최기석은 손님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이 자리로 돌아왔다.

“설화야.”

“…….”

정설화가 고개를 떨어트린 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눈물이 테이블을 적셔 갔다.

“고마워. 나 이렇게 과분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가 싶기도 하고…….”

“바보 같은 소리. 내가 아무리 잘해 줘도 네 사랑에는 보답 못해.”

최기석은 그녀 곁에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앉았다.

구슬피 우는 정설화를 달래고 있으니 괜히 자신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안. 네가 돌아오면 환하게 웃어 주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네.”

“괜찮아.”

정설화는 한참 후에야 눈물을 거두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벤트와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건물에 있는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나 진짜 행복해.”

샤워를 마친 후 창가에 선 정설화가 입을 열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나도 그런데. 역시 우리는 일심동체인가 봐.”

최기석은 그녀에게 다가가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직 물기를 머금은 긴 머릿결에서 향긋한 샴푸 냄새가 났다.

“난 어릴 때부터 동화 속 뒷이야기가 궁금했어. 보통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면서 끝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

“백설공주는 어쩌면 왕자와 성격이 안 맞아서 이혼했을지 몰라. 헨젤과 그레텔은 의외로 아버지에게 다시 버림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의외인데? 우리 여보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어.”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서.”

“괜찮아. 그 동화 속 뒷이야기를 우리가 현실로 만들면 돼. 다른 사람들이 눈꼴 시려 할 정도로 사랑하면서 살자, 이 말이지.”

“말로는 못 당하겠다니까.”

“말로만 못 당하는 게 아닐 걸?”

최기석이 정설화의 목덜미에 키스를 퍼붓자 정설화가 몸을 돌려 그를 응시했다.

“각오해. 오늘은 한숨도 못 자게 만들 거야.”

* * *

호프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과는 별개로 최기석의 수련은 계속되었다.

정설화가 말한 동화 속 뒷이야기처럼.

인생이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으며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행복과 불행을 마주하는 것이기에.

최기석은 야사다의 12가지 과업 임무를 착실하게 완수해 나갔고 권일수에게는 소아 수술에 갖가지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꾸준히 트레이닝 룸을 드나든 것은 물론이요 최신 논문 파악과 팀 CPR 활동에도 열을 올렸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는 점점 강해졌다.

좋은 스승과 좋은 동료, 환자를 위한 진실된 마음.

이 세 가지를 영양분 삼아서 쑥쑥 자랐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사 년이 지났다.

최기석은 올리버에 이어 두 번 째 트리플 보드 흉부외과의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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