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 (1)
그날 저녁.
최기석은 MHC 내부의 연회장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스승의 신수술, 아니 호프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축하하는 자리로 수술을 참관했던 모든 이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에 참가했다.
“축하합니다, 닥터 송.”
“이번 수술은 MHC에서 올린 최고의 쾌거가 될 겁니다.”
“케이스가 생기는 대로 닥터 송의 수술법을 사용해 보겠습니다.”
각지의 써전들이 송명진을 추켜세웠고 송명진은 멋쩍은 얼굴로 그들의 칭찬을 받았다.
‘암. 그럴 만도 하지.’
스승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프 수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획기적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수술 범위다.
심근을 절제하는 범위가 넓기에 심장이식을 해야 하는 환자 상당수를 호프 수술의 범주에 넣을 수 있었다.
비용에 대한 메리트도 컸다.
호프 수술을 펼칠 경우 그 비용이 기존 인공심장이나 심장이식 수술비용의 3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 역시 수술이 가능해진 셈이다.
써전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닥터 송은 어떻게 신수술을 개발할 생각을 했습니까? 이렇게 무지막지할 정도로 심근을 절제할 생각은 보통은 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심장이식 대기기간에 지쳐 가는 환자, 비용의 문제로 수술을 주저하는 환자들을 보니 자연스럽게 떠올랐죠.”
“…….”
“무릇 수술이란 하나부터 열까지 환자를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역시 닥터 송답습니다. 호프 수술을 펼친 김에 써전으로 복귀하는 건 어때요?”
“하하하. 글쎄요.”
송명진이 의외로 능구렁이 같은 화법을 구사하자 몇몇 써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러분들의 초점이 지나치게 제 쪽으로 모여 있는 것 같군요. 이번 수술의 제일 큰 공을 세운 것은 여기 있는 닥터 최입니다.”
“…….”
“수술에 대한 발상을 한 건 저지만 완성시킨 건 닥터 최입니다. 닥터 최에게도 마땅히 합당한 칭찬이 돌아가야 해요.”
“농담이 심하시군요.”
독일에서 온 다비드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수술 보조하는 걸 지켜보니 확실히 실력은 있었지만…… 결국 레지던트는 레지던트 아닙니까? 이만한 수술을 완성시킬 만한 그릇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비드. 내가 수술을 직접 완성시켜 놓고 닥터 최를 내세웠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보는데.”
“딱 한 가지 이유가 있기는 하죠.”
다비드가 검지를 치켜들자 다른 써전들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닥터 최는 닥터 송의 후계자 아닙니까? 각지의 써전들이 모인 자리에서 후계자를 밀어준다면 그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죠.”
“흐음…… 일리가 있어요.”
“하긴 닥터 송이 이타적인 거야, 다들 아는 사실이니까요.”
다비드의 말에 써전들 대부분이 동의한다는 기색을 보였고 송명진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닥터 최.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해 봐요. 이번 수술을 완성한 게 정말 닥터 최입니까?”
다비드의 돌직구에 최기석은 쉽게 답변을 하지 못했다.
각지의 써전들은 자신이 수술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이 상황에서 수술을 완성시켰다고 말해 봐야 웃음거리만 될 뿐이었다.
더 곤란한 것은 이대로 발을 뺄 수도 없다는 점이다.
수술에 관여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 스승이 거짓말쟁이가 된다.
한마디로 진퇴양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뭐하는 겁니까?”
“아, 정말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요.”
최기석은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펼치고 말을 이었다.
“이번 수술에서 제 역할에 대해 묻는다면…… 저는 송 교수님이 수술을 완성시키는 것을 도왔습니다. 더 좋은 수술법이 없나 같이 고민한 거죠.”
“뭐. 그 정도라면 레지던트도 할 수 있겠죠.”
“닥터 송. 제자 사랑이 아주 각별한데요?”
그의 대답에 날이 섰던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졌다.
송명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써전들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직 진실을 아는 송명진만이 가슴을 끓이고 있을 뿐.
‘교수님. 라이브 수술을 제가 했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최기석은 끔찍한 상상을 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직접 라이브 시연을 했다면 이 자리는 수술 축하 자리가 아니라 써전들에게 물어뜯기는 자리가 됐을 것이다.
외국 의사들이 아무리 개방적이라고는 해도 레지던트가 신수술을 개발하고 직접 시연까지 했다는 사실까지 곱게 보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닥터 최는 대단했어요.”
잠자코 있던 클라라가 운을 뗐다.
“이제 막 흉부외과 전공을 시작했는데 이런 수술에 퍼스트를 맡았잖아요. 아무나 못하는 일이죠.”
“그건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솔직히 닥터 송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모습에 감동했어요.”
“레지던트라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계속 펠로우인 줄 알았다니까요.”
화제가 최기석으로 바뀌면서 최기석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세계 속 흉부외과의들에게 줄줄이 칭찬을 듣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적당히 그들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다가 만찬회장을 벗어났다.
“어딜 그렇게 도망가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샬롯이 보였다.
샬롯은 의진대 심포지엄에서 만난 괴짜 내과의이자 신수술의 새로운 방향을 알려준 은인이다.
“낯 뜨거워서 더 못 있겠네요.”
“영광스러운 자리인데 그 정도는 참아야죠.”
“제가 이런 쪽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최기석이 약한 척하자 샬롯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뚝심이 대단하네요.”
“…….”
“전 솔직히 미스터 최가 내 수술법을 그대로 사용할 줄 알았어요. 수술 시간과 난이도,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수술이었으니까요.”
“샬롯이 애써 같이 고민해 줬는데……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수술 범위만큼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었어요. 수술 범위가 곧 수술 받는 환자들의 숫자잖아요.”
“미안할 것까지야. 덕분에 환상적인 수술이 탄생했는걸요? 그러니까 이번 수술에 내 몫도 어느 정도 있는 거죠?”
“물론이에요.”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눈빛에 따스함이 깃들었다.
“솔직히 아까 대화에 껴들까 말까 고민이 많았어요. 다들 미스터 최가 수술 개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아서요.”
“잘했어요. 샬롯이 제 편을 들었으면 분위기가 말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도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아요? 나라면 다른 써전과 싸움도 불사했을 거예요.”
수술 개발 과정을 지켜본 샬롯이 최기석을 대신해 답답함을 토로했다.
“의사 생활은 앞으로 계속할 거고 더 좋은 수술을 개발하면 되죠. 그리고.”
“…….”
“스승님이 다른 써전들의 조명받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거든요.”
“뭐. 미스터 최가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잠시 대화가 중단된 사이,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상대를 확인한 순간 최기석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주인공은 바로 정설화와 김태식이다.
“설화야!”
“기석아!”
최기석은 가까이 다가온 정설화를 두 팔 벌려 안아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애인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게 뛰었다.
“이거 훼방꾼이 된 느낌인데요? 이야기 잘 나누고 나중에 또 봐요.”
“고마워요, 샬롯.”
샬롯이 떠난 후 최기석과 정설화 김태식이 대화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선배, 정말 오랜만이에요. 인사는 못 드렸는데 예전에 심포지엄 가서 세이버 수술 집도하는 거 봤어요.”
“야박한 자식. 심포지엄에 왔으면 인사라도 하고 가지.”
김태식이 장난스럽게 최기석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설화야. 너는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에…….”
“당연히 널 보러 왔지. 놀라게 해 주려고 일부러 연락 안 했어.”
정설화가 그의 품에서 떨어져 거리를 벌렸다.
“직접 와서 응원한 보람이 있었어. 이번 수술, 정말 훌륭하게 끝났잖아. 송 교수님이나 너나 정말 멋있었어.”
“당연히 멋있어야지. 누구 남자인데.”
최기석의 말에 정설화의 두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어휴. 눈꼴 시려서 못 봐주겠네. 너네 자꾸 이러면 나 간다?”
“에이. 왜 그러세요?”
“그러니까 나한테도 잘하란 말이야. 설화가 샘나서 미치겠다고.”
김태식의 농담으로 분위기가 한층 화기애애해졌다.
“신수술 잘 봤다. 솔직히 심근병증과 심부전증을 이런 방법으로 접근할 줄은 몰랐어.”
“저도 지금까지 어안이 벙벙해요. 정말 이런 방식으로 수술이 될까 의심만 해왔거든요.”
“뭐. 의심 없는 발전은 없는 법이지. 마침 흉부외과에 케이스 환자가 있는데 돌아가는 즉시 신 수술을 시험해 봐야겠다.”
“선배라면, 인공이식편만 미리 잘 만들어 두면 실패확률은 거의 없을 거예요.”
“동감이다. 신수술이라서 난이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비벼 볼 만한 수준이더라고.”
최기석은 김태식과 정설화와 오늘 있었던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이와 존경하는 선배.
그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한국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만찬이 끝났다.
최기석은 오프인 내일 정설화와 데이트 약속을 잡고 송명진의 집무실을 찾았다.
똑. 똑. 똑.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등을 기댄 송명진이 보였다.
고된 수술과 이어진 만찬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최 선생. 만찬 중간부터 안 보이던데 어디 가 있었어요?”
“의진대 김태식 선생과 설화가 와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금방 돌아오려고 했는데 대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옛 동료들을 만났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앉아요.”
소파에 앉은 최기석이 송명진을 응시했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고생이야 저보다 교수님이 더 많으셨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송명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건 그렇고 아까는 왜 그랬습니까? 최 선생이 수술을 완성시킨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에요. 당당하게 말해도 되는 거 아니었나요?”
“써전들 반응을 보니 절 믿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그거야…….”
“지금은 그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괜한 미움을 사서 좋을 일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펠로우가 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들의 의심도 사라질 거라 생각합니다.”
“으음…… 미래를 봤다는 거군요. 내가 그 생각은 못했네요.”
송명진이 턱을 쓸어내렸다.
“내게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물론 있습니다.”
최기석은 심호흡하며 말을 가다듬었다.
스승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질문하는 게 분명했다.
애초에 숨기거나 속일 생각이 없었기에 지금이 사실을 털어놓기 좋은 타이밍이라 생각했다.
“사실 제가 며칠 전 메이죠의 대주주가 되었습니다. 오늘 오전에는 주주총회에 참석했고요.”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파워볼에 당첨된 사실부터 대주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송명진을 말이 없었다.
가끔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릴 따름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항상 느끼는 거지만 최 선생의 인생은 말도 못하게 다사다난한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일들이 계속 벌어질 수가 있는지…….”
“저도 항상 아찔합니다.”
“뭐. 하여간 마음은 놓이는군요. 최 선생이 대주주라면 MHC가 삐딱 선을 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네. 그거 하나만큼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믿습니다. 그리고…….”
송명진이 엄지를 치켜들며 미소를 지었다.
“파커 해임안을 통과시킨 건 아주 훌륭했어요.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이었는데.”
스승답지 않은 돌직구에 최기석은 그저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