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5)
“이번 사업은 메이죠의 핵심 가치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최기석은 담담하게 말하고 참석자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커와 눈을 마주쳤다.
파커의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눈으로는 레이저 쏘고 있었다.
공들인 사업 계획을 속된 말로 깠으니 심기가 불편할 건 당연지사였다.
“미스터 최, 아니 대주주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병원장이 마이크를 고쳐 잡고 말을 이었다.
“메이죠의 가치는 환자 중심이라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아마 주주총회에 참석한 분들 중 이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
“하지만 환자에게 최상의 진료를 하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뒷받침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부병원장의 사업 계획보다 더 효과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모델이 있을까요?”
“수익 모델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기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메이죠는 근 삼 년간 병원평가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습니다. 덕분에 외래 및 입원 환자는 꾸준히 늘고 있고요. 근래 병원이 적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수익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데 더 돈을 밝혀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요.”
“병원 수익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닙니까?”
“그 돈이 제대로 환자를 위해 쓰였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죠.”
“그게 무슨 뜻입니까?”
병원장이 팔짱을 낀 채 말을 계속했다.
“말씀이 너무 심한 것 같은데요? 마치 그동안 MHC가 돈을 쓸데없는 일에 낭비했다는 투로 들립니다.”
“근거는 가지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매일 환자만 보다 보니 경제 감각이 완전 떨어진 것 같은데요.”
잠자코 있던 파커가 병원장의 지원사격에 나섰다.
“못 믿겠으면 직접 살펴보시죠.”
준비한 유인물을 나눠 준 최기석은 참석자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주주총회에 참석하기 전 저스틴의 도움을 받아 만반의 준비를 했다. 깐깐한 임원들이라도 꼼짝하지 못할 근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
“…….”
무거운 침묵 속에 자료를 다 살핀 임원들이 하나둘 침음성을 흘렸다.
“제 말뜻 이해하셨습니까?”
최기석은 노골적으로 파커를 응시했고 파커는 그의 시선을 피해 자료만 만지작거렸다.
“MHC에 있는 환자들 대다수는 일반 환자입니다. VIP 환자는 퍼센트로 따지면 1퍼센트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 수익 모델을 보세요. 이 사업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
“크루즈 검진을 할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 VIP와 VVIP들이죠. 언제부터 MHC가 돈 있는 사람을 위한 병원이 됐습니까?”
“대주주의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만…….”
병원장이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문지르다가 간신히 운을 뗐다.
“이 사업을 통해서 얻은 수익으로 일반 환자들 복지에 신경 쓰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요. 그동안 MHC 사업 방향은 항상 고소득자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그런 구태의연한 방향성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기석은 단호하게 병원장의 의견에 선을 그었다.
병원장의 의견은 흔히 말하는 낙수효과와 다를 바 없었다.
낙수효과란 최상위 계층의 재산이 늘어나면 그것이 결국에는 하위계층으로 흘러간다는 이론인데 현실에서는 거의 멍멍이 소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제가 장담하죠. VIP에게 투자해서 짭짤하게 돈을 만지면, 그 돈으로 분명 다시 VIP를 위한 사업을 펼칠 겁니다.”
“…….”
“제가 드린 자료를 보셔서 다 아시지 않습니까? MHC는 계속 이런 패턴을 반복해 왔어요.”
“그럼 크루즈 검진 확대와 VVIP실 증축을 반대한다는 뜻입니까?”
“물론입니다. 크루즈 검진이 확대되면 당연히 거기에 파견되는 의사도 늘어납니다. 당연히 일반 진료를 받는 환자들의 QOL이 떨어지겠죠. VVIP실 증축을 할 바에는 차라리 진료 대기실을 늘리세요.”
“…….”
“앉을 자리가 없어서 한 시간씩 서 있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 회의실이 침묵이 감돌았다.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병원장이 파커를 향해 귓속말을 건넸고 파커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기기 못하며 대답했다.
최기석이 메이죠의 대주주라는 사실도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운데 회의를 이끌어 가는 카리스마 또한 그에 못지않게 경악스러웠다.
지금까지 보여 준 그의 모습은 의사보다 경영자에 더 가까웠다.
“이야. 생각보다 잘하는데?”
“속 시원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몇몇 참석자들이 귓속말로 최기석의 편을 들었다.
주주 중에서도 돈에 혈안이 된 대표이사와 병원장 세력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메이죠의 핵심 가치인 환자 중심에 매력을 느끼고 투자를 해 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업 방향이 엉뚱하게 VIP 위주로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의견을 모아도 대표이사 세력을 꺾을 수는 없었기에 잠자코 있었던 것뿐이었다.
“대주주께서 크루즈 검진 확대와 VVIP실 증축에 반대하는 것은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안건인 로봇 진료도 반대하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최기석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봇 진료는 VIP를 위한 사업 계획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것마저 반대를 하죠?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됩니다.”
파커가 기다렸다는 듯 공세를 펼쳤다.
“로봇 진료는 시기상조입니다. 진료에 오진이 생겼을 경우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며 기타 윤리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아직 의사를 대체할 만큼 발전했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뉴스 안 보셨습니까? 이미 로봇 진료를 시행하는 병원이 존재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범 운행이고 부병원장처럼 극단적으로 의사를 대체하는 수준은 아니죠.”
최기석의 대답에 파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얄미운 자식. 한마디도 안 지겠다 이건가?
“의견은 다 정리된 것 같은데. 표결하시죠?”
“아. 네.”
잠자코 있던 대표이사가 운을 뗐다.
“지금부터 하반기 사업 계획인 크루즈 검진 확대, VVIP실 증축, 로봇 진료 실행에 대한 표결을 시작하겠습니다. 계획에 찬성하는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표이사와 그 파벌들이 손을 들었다.
그 숫자는 전체 참석자의 40퍼센트에 육박했다.
예상외로 저조한 찬성률에 파커는 목 놓아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윽고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반대자가 반수를 넘으면서 파커의 계획은 자연스럽게 물거품이 되었다.
“여러분. 대주주는 의사입니다. 경영에 경 자도 모르는 무지한 의사 뜻에 따르겠다는 겁니까? 계획에 반대한 분들은 바보 같은 짓을 한 겁니다.”
“거. 말조심합시다.”
반대표이사 세력 중 한 명이 운을 뗐다.
“경영에 경 자를 아시는 분께서 왜 그렇게 혓바닥이 깁니까? 주주총회에서 다수결 의견이 나왔으면 잔말 말고 따라야죠.”
“뭐라고요?”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쪽수로 밀어붙이다가 쪽수로 당하니까 부들부들하죠?”
상대의 놀림에 파커는 머리 뚜껑이 열리는 경험을 했다.
손에 잡히는 모든 사물을 망나니처럼 던져 버리고 싶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이 자리에서 파커 부병원장의 해임안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해…… 해임안? 나를?”
파커는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저 천둥벌거숭이 레지던트가 감히 뭐라고 입을 놀린단 말인가.
“파커 부병원장이 사업을 추진하던 중 커넥션 비용 챙긴 정황을 확보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크루즈 검진을 사업을 시작할 때 선박업체에서 5만 달러, 두 번째는 제약회사에게서 정기적으로 상납 받은 만 달러입니다.”
최기석은 증거가 담긴 두 번째 유인물을 참석자들에게 돌렸다.
유인물에는 파커가 해당 사업 담당자와 미팅을 하는 사진이 찍혔으며 그가 돈을 확인하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부병원장. 더 할 말 있습니까?”
“나를 음해하려고 아주 작정했군요. 지인에게 빌려준 돈을 받은 것뿐입니다.”
“제약회사 부장이 지인입니까? 그것 참 공교로운 일이군요.”
최기석이 빈정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여간 난 인정 못 해요. 고작 이 따위 사진으로 날 나쁜 놈으로 몰지 말라는 말입니다.”
“무작정이 아니라 잡아떼기 힘든 정황이라고 보는데요.”
“…….”
“참고로 MHC 정형외과와 신경외과에서 각각 카리트와 제이론이라는 약을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더군요. 다른 병원에서는 효능이 의심스러워서 사용 중지한 지 오래된 약품인데도요.”
“그…… 그건…….”
“여기에 부병원장의 압력이 있었던 거 아닙니까? 자신 있으면 조사해 볼까요?”
“개인적으로 좋은 약물이라 판단해 과장들에게 추천한 것뿐이에요. 압력은 아니었습니다.”
“단어를 제멋대로 사용하는군요.”
최기석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부병원장이 추천이라고 말한 행동을 다른 사람들은 압력이라고 부릅니다만……. 부병원장의 논리대로라면 지나가던 사람을 성추행한 것도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였겠네요?”
“하하하하.”
“대주주. 말 한번 시원하게 잘했습니다.”
그의 신랄한 비평에 참석자들 일부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부터 부병원장 파커의 해임안을 정식으로 안건에 올리겠습니다. 찬성하시는 분은 손들어 주세요.”
최기석이 말을 마치자 전체 인원 중 60퍼센트가 손을 들었다. 사업계획을 반대했던 이들이 다시 한번 의견을 모은 것이다.
이렇게 의견이 뭉칠 수 있었던 것은 저스틴이 미리 주주들을 만나 사전 작업을 해 놓았던 덕분이었고 말이다.
“뭐. 결론은 났지만 결과는 확인해야겠죠? 반대하시는 분 손들어 주세요.”
찬성에 한참 모자라는 인원들이 손을 들면서 파커의 해임안이 통과되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파커.
그는 넋 나간 얼굴로 병원장을 응시했지만 병원장은 그의 시선을 받아 주지 않았다.
분명하게 선을 긋는 모습이다.
“병원장님. 이게 말이 됩니까? 네? 뭐라고 말씀 좀 해 주세요.”
파커는 병원장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었다.
견제하던 레지던트가 대주주로 나타난 것도 모자라, 사업 계획을 전부 철회시키고 해임안까지 통과시키다니…….
이 순간이 마치 꿈결처럼 몽롱하게 느껴졌다.
“오늘 주주총회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기존 사업 계획이 전부 철회된 만큼 조만간 제가 새 계획안을 들고 다시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최기석은 제 할 말을 마치고 쌩하니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런데 그의 뒤를 어느새 파커가 뒤쫓았다.
“미스터 최, 아니 대주주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리 매정하게 나를 쫓아내도 되는 건가? 나도 사람인데 기회를 줘야지.”
“기회?”
최기석은 코웃음 치며 가운을 붙잡은 파커의 손을 쳐냈다.
“부병원장이 내게 한 일들을 잊었습니까? 나를 엿 먹이려고 용을 써 놓고 이제 와서 기회를 달라고요?”
“두 번은 안 바라네. 딱 한 번만 기회를 줘. 응? 내가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 MHC를 세계 최고의 환자 중심 병원으로 만들어 볼 테니까.”
“정 그렇다면…….”
최기석은 회의실로 돌아가 물병을 챙긴 후 다시 파커 앞에 섰다.
주르르르륵.
물병에서 흐르는 물이 바닥을 적셨다.
“바닥에 있는 물을 전부 다시 병에 담으세요. 가능하다면 주주들을 다시 설득해 보겠습니다.”
최기석이 매정하게 돌아섰고 파커는 쭈그려 앉은 채 바닥에 물을 병에 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필사적으로 작업에 나섰지만 이내 애처로운 자신의 처지를 돌이키고 광소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