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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52화 (351/407)

그 후로(4)

라이브 수술 당일, 최기석은 의국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전 회의와 회진이 무사히 끝났다.

개인 환자 라운딩 및 처방 입력도 마쳤다.

라이브 수술을 앞두고 야사다가 배려해 준 덕분에 스크럽 스케줄마저 없었다.

바쁜 스케줄로 발에 땀나도록 뛰는 동료들과는 무척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적응 안 되네, 참.”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몸이 간질간질해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었다.

의국 안을 서성거리며 그는 오늘 있을 일들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라이브 수술이다.

오늘 수술에는 사전에 연락받은 세계 각지의 흉부외과의가 참석하는데 제임스 홉킨스 흉부외과 과장 클라라는 물론이요, 한국에서는 의진대 펠로우이자 옛 선배 김태식이 오기도 한다.

말 그대로 세계가 주목하는 자리.

스승의 어깨에 참 많은 것이 달려 있었다.

“교수님이라면…….”

최기석이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지난 몇 년 간 수술을 쉬었다고 해도 스승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흉부외과의였다.

자신의 보조를 받으면 분명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이이잉.

테이블에 놓은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번호를 확인한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올 것이 왔다.

“저스틴. 좋은 아침입니다.”

[하하하. 오늘이 어디 좋기만 한 아침입니까?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한 일이 벌어질 아침이죠.]

저스틴이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말을 이었다.

[자료 준비 끝났으니까 메일 확인해 보세요. 이 정도면 부병원장을 압박하고도 남을 겁니다.]

“저스틴이 도와줘서 안 된 일이 있나요. 저만 잘하면 되겠죠.”

[근데 정말 혼자 참석해도 되겠어요?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인간들은 천년 묵은 여우 수준인데 아차 하는 사이에 코 베일지 모릅니다.]

“저도 그렇게 만만한 인간은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그건 그렇고 다른 주주들하고 이야기는 벌써 끝낸 거죠?”

[네. 어제 미팅에서 다 구워삶아 놓은 상태에요. 닥터 최가 어떤 의견을 피력하더라도 옮다구나 따라갈 겁니다.]

“고마워요, 저스틴.”

최기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스틴이 없었으면 결코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병원 주식만 조금씩 사들이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했겠죠.”

[제가 투자 회사에 일하는데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닥터 최는 제 불알의 은인이기도 하고.]

“이번 주 중으로 한번 만나죠. 감사 인사를 전화로만 하는 것도 좀 그러네요.”

[좋아요. 스케줄 잡으면 알려 주세요.]

저스틴과 통화를 마친 최기석은 메일을 확인하고 첨부된 자료를 출력했다.

출력물을 훑는 그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라이브 수술만큼이나 중요한 스케줄이 두 시간 후에 예정되어 있었다.

바로 주주총회다.

대주주가 되어 처음 참석하는 회의였기에 그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탁!

최기석은 자료를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이르다고 했건만, 파커를 향해 갈았던 칼은 생각보다 빠르게 완성되었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 * *

같은 시각, 파커의 집무실.

파커는 책상 의자에 앉아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만하면 됐어.”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일들이 오늘에서야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쓸데없이 돈만 처먹는 의사들을 대신할 로봇 왓슨의 진료.

크루즈 관광의 확대.

기존 VVIP실을 VIP실에서 독립시켜 건물을 증축하는 사업.

이 세 가지만 완성된다면 MHC의 재정은 크게 불어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파커 역시 커넥션 비로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울 것이고 말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쉽고 편하게 돈을 긁어모으는 방법이 얼마나 될까.

무지한 의사와 간호사들이야 매일 환자에 들볶이며 푼돈을 만지겠지만, 파커는 그들과 궤를 달리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고 하자 값비싼 양복을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병원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클라크도 별일 없었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 후 소파에 앉아 서로를 응시했다.

클라크는 제약회사 제롬의 영업파트 과장으로 정기적으로 MHC를 찾았다. 제롬에서 만드는 의약품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이 MHC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쩐 일로 직접 보자고 하셨습니까? 부병원장님을 직접 뵙는 건 거의 일 년 만인 것 같은데.”

“그게…… 일이 좀 생겨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질문을 받은 파커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딱히 사정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도 사실을 깨달을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흠흠. 사실 벤슨이 얼마 전에 잘렸습니다.”

“베…… 벤슨 교수님이요? 대체 왜…….”

“병원 내부 사정이라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여간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부병원장님이 직접 수금을 하신다길래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클라크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벤슨 교수에게는 미안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업용 미소를 띤 클라크는 종이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얼마 전 우리 제약회사에서 항경련제를 새로 개발했습니다. 부병원장님이 신경외과 쪽에 밀어주시면 우리도 숨통이 조금 트이지 않을까 싶은데.”

“사람이건 제약회사건 숨은 쉬고 살아야죠.”

파커는 종이가방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후 위장용 박스를 해체한 후 현금을 확인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

지폐가 늘어나면서 파커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감돌았다.

“예전보다 성의 표시가 화끈해졌습니다.”

“하하하. 이번 약품에 우리 회사의 사활이 걸렸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항경련제 책임지고 밀어드리죠. MHC뿐 아니라 메이죠 계열의 모든 신경외과가 이 제품을 쓸 수 있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역시 부병원장님입니다. 이야기만 해도 벌써 든든하고 배가 부르군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유쾌한 웃음을 나눴다.

이후 파커는 클라크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주주총회가 있는 회의실로 이동했다.

‘별일 없을 거야.’

문득 불어오는 불길한 예감, 그것을 떨치기 위해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계획이 착착 맞아떨어지고 있음에도 한 가지 불안 요소는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C.K.S 컴퍼니.

주식을 야금야금 사들이던 이 정체불명의 회사는 최근 몇 개월 사이 공격적으로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근에는 메이죠의 대주주가 되었고 말이다.

‘아무래도 어감이 마음에 안 드는데. C.K.S라니…….’

대주주 회사의 이름을 되뇌던 중 회의실에 도착한 파커는 자리에 앉아서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설령 C.K.S가 파커와 병원장에게 적대적이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C.K.S를 제외한 나머지 주주들은 자신들이 꽉 잡고 있었기에.

회의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주주들과 병원 간부들이 자리를 메웠다.

“대주주가 바뀌고 나서 처음 진행하는 주주총회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대주주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참석자들은 미지의 대주주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파커는 아닌 척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다른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안타깝게도 영양가 있는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다.

벌컥!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의사 가운을 입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주주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상식을 초월한 상황에 참석자들은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린 채 청년을 응시했다.

더불어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뇌세포를 쌩쌩 굴려 댔다.

이게 대체 무슨 그림이란 말인가.

“미스터 최. 지금 뭐하는 거지?”

잠자코 있던 파커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자네가 왜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거지? 심지어 예의 없이 대주주 자리에 앉다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제가 대주주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최기석의 폭탄 발언에 회의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참석자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기 일쑤였다.

그중에서 침착한 이는 오직 파커뿐.

“헛소리 작작해. 한낱 레지던트가 어떻게 병원 주식을 그렇게 많이 사들일 수 있냐고.”

“파커 부병원장의 말이 맞네.”

“미스터 최. 장난이 너무 심한데.”

참석자들이 뒤늦게 파커의 편을 들었고 파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병원 주식이 대수입니까?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그 돈이 어디서 났냐는 말이지. 자네 봉급으로는 죽었다고 깨어나도 대주주가 될 수 없어. 혹시 흉부외과의로 수십 번 환생해서 돈을 모으면 모를까?”

파커의 공격에 참석자들이 배를 붙잡고 웃었다.

그럼에도 최기석은 눈썹 한번 까딱거리지 않았다.

“제가 그동안 부병원장님을 과대평가한 것 같군요.”

“뭐…… 뭐라고?”

“C.K.S 컴퍼니의 약자인 C.K.S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요?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서…… 설마…….”

“제 이니셜입니다.”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참석자들에게 자신이 C.K.S 컴퍼니의 오더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나눠 주었다.

서류를 읽는 참석자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불가능에 수렴하는 희박한 확률.

그 누가 생각해도 믿기 힘든 이상한 상황.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만 것이다.

최기석이 스스로 대주주임을 밝히면서 회의실은 다시 한 번 뒤집어졌다.

병원에서 수련 중인 레지던트가 병원의 대주주라니…….

전무후무한 사건이 MHC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다들 모인 것 같은데 슬슬 총회를 시작하죠.”

“흠흠. 회의 시간이 됐으니 지금부터 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대표이사의 진행으로 회의에 막이 올랐다.

대표이사가 인사말과 성원 보고, 결산서 보고를 진행했지만 파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애써 무시했던 불길한 징조는 바로 이 때문이었던가.

파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기석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가 어떻게 병원 주식을 샀는가는 이제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주주총회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다.

“이어서 사업계획 보고가 있겠습니다.”

대표이사의 말에 파커는 단상에 서서 참석자들을 훑어보았다.

“지금부터 MHC의 하반기 사업계획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업 계획은 로봇 왓슨의 외래 진료입니다.”

파커는 파워포인트 자료를 띄워 놓고 세 가지 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병원의 수익 극대화를 위해서는 그가 주장하는 계획이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짝. 짝. 짝.

보고가 끝나자 참석자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단 한 사람, 삐딱한 자세로 박수 치는 시늉을 하는 최기석만 빼고.

“파커의 수익 모델은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메이죠에 있었을 때부터 워낙 수완이 좋았던 친구니까요.”

병원장이 파커를 치켜세우자 몇몇 참석자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후 막간 토론이 이어지는 속에 참석자들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고정되었다.

과연 대주주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최기석의 판단에 따라 회의에 흐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침내 입을 뗀 최기석, 그를 보며 파커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저는 이번 사업 계획 세 가지 전부 반대합니다. 무. 조. 건.”

그의 단호박 같은 선언에 회의실 분위기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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