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2)
“…….”
동영상을 확인한 벤슨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쯤 되면 초등학생이라도 앞으로의 전개를 예상할 수 있었다.
‘영악한 새끼. 유도한 거였나?’
벤슨은 빠드득 이를 갈며 최기석을 응시했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야사다의 호통에 집무실 분위기는 한바탕 서리가 내린 것처럼 매서워졌다.
“미스터 최가 제 욕을 했습니다. 저를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의사라도 매도하더군요.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저를 탓하는 겁니까? 정말 대단하시군요. 교수님은 분명 MHC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실 겁니다. 오전 회의에 람보 흉내를 낸 것도 모자라서 레지던트를 일방적으로 폭행했으니까요.”
최기석의 빈정거림에 벤슨은 침묵을 고수했다.
“미친놈. 너는 갱생의 여지가 없어. 너와 미스터 최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지.”
“…….”
“네가 일방적으로 미스터 최를 구타했다는 점이야. 지금 당장 윤리위원회를 소집해서 네 죄를 물을 테니 단단히 각오해. 이번 사건은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부병원장조차 커버 못 친다.”
야사다가 으르렁거렸지만 벤슨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에만 머물러 있었다.
휙!
벤슨은 낚아채듯이 휴대폰을 집어서 집무실 벽에 던져 버렸다.
‘콰직’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맥없이 부서졌다.
“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화를 참지 못한 야사다가 벤슨의 멱살을 잡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 새끼.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야사다의 추궁에도 벤슨은 낯짝에 철판을 깐 채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최기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헤드 치프. 휴대폰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켜지질 않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벤슨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아가야. 미친 짓은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순발력 있는 행동으로 동영상이 있던 휴대폰을 박살 내는 쾌거를 올렸다.
이제 자신의 구타 영상은 영원히 묻히게 되리라.
“벤슨. 넌 인간 말종이야. 너 같은 새끼는 의사면허를 가질 자격도 없어.”
“환자밖에 모르는 야사다 치프라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자기 밥 그릇 챙기는 의사가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 아닙니까?”
“호오. 그래? 아직도 주둥이를 나불거린다 이거지?”
야사다가 주먹으로 벤슨을 치려던 찰나, 최기석이 나서서 야사다를 만류했다.
“헤드 치프, 안 됩니다!”
“이 새끼를 가만히 두자고? 이 새끼가 네게 한 짓을 잊었어?”
“글쎄요. 저는 미스터 최를 때린 기억이 없습니다만…….”
“안 되겠다. 아무래도 넌 맞아야겠어.”
“헤드 치프!”
최기석의 목소리에 야사다가 행동을 멈췄고 벤슨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굳이 헤드 치프께서 벤슨 교수처럼 더러운 행동할 이유가 없습니다.”
최기석은 여유로운 태도로 가운에서 휴대폰 하나를 더 꺼냈다.
불길함을 직감한 벤슨이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설마…….
“교수님. 달콤한 꿈은 잘 꾸셨습니까? 휴대폰을 던졌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죠?”
“…….”
“그런데 미안해서 어쩝니까? 저는 용의주도한 인간이라서 파일을 이미 여기저기에 옮겨 놨거든요.”
최기석이 웃으며 새 휴대폰에서 구타 영상을 재생하자 벤슨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처음에 구식 휴대폰을 꺼낸 건 설마 이런 이유였나?”
“네. 맞습니다. 그냥 몰아붙이는 건 재미없으니까요. 단순히 절망하는 것보다 희망의 맛을 봤다가 절망하는 편이 훨씬 고통스러운 편이죠.”
“그럴 거면 최소한 나한테는 미리 말을 해야지.”
야사다가 굳었던 표정을 풀며 벤슨의 멱살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이래야 벤슨 교수가 더 인생의 쓴맛을 느낄 것 같아서…….”
“뭐, 동영상이 있으면 됐어.”
야사다와 최기석의 시선이 화살처럼 벤슨의 가슴을 관통했다. 벤슨은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바닥을 응시하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 *
윤리위원회가 열리기 30분 전.
벤슨은 똥줄이 타는 심정으로 파커를 찾았다.
지금 쥘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파커가 아닌가.
부병원장이라면, MHC의 실세인 파커라면 이번 사건도 유아무야 넘길 수 있을지 몰랐다.
똑. 똑. 똑.
들어오라는 말을 듣지도 않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때마침 파커는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부병원장님. 어디 계셨습니까? 제 전화도 받지를 않으시고.”
“중요한 미팅이 있었지.”
파커는 담담하게 말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리에 앉으라는 이야기조차 없었기에 벤슨이 알아서 소파에 앉았다.
“대형사건이 터졌습니다. 제가 MHC에 쫓겨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아. 무슨 일 있었는지.”
“그럼 다 알면서 모른 척하신 겁니까?”
벤슨의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제가 부병원장님께 충성한 지가 십 년이 넘었습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행실을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니야, 행실을.”
파커가 얼굴을 구긴 채 말을 이었다.
“자네가 의무기록 조작한 걸 덮느라고 얼마나 애썼는 줄 알아? 내가 아니었으면 자네는 벌써 잘렸어.”
“그 일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기왕 힘써 주시는 거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벤슨이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병원장님이 원하신다면 발바닥이라도 핥겠습니다.”
“됐어. 난 그런 악취미 없으니까.”
“부병원장님!”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군. 미스터 최만 엮였다 하면 우리 측근이 박살 나잖아. 예전에 신경외과에 있었던 매튜도 그렇고 말이야.”
파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부병원장님. 이번 건은 정말 안 되는 겁니까?”
“내가 아니라 신이 나서도 안 돼. 미스터 최를 때린 동영상이 있다면서?”
“……네.”
“그럼 끝이지. 뭐.”
파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변호사는 구했나? 미스터 최가 민사 소송을 걸면 재미없을 거야.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 둬.”
“…….”
“난 바쁘니까 그만 나가줬으면 좋겠군.”
비수처럼 꽂히는 파커의 말에 벤슨은 말없이 집무실을 떠났다.
마지막 남은 동아줄마저 손에서 떠났다.
지금 기댈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병원 윤리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최기석은 벤슨과 나란히 자리에 앉았고 그 앞으로 다섯 명의 윤리위원회 회원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벤슨 교수. 이 동영상,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윤리위원 중 한 명인 송명진이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휴대폰을 가리켰다.
“미스터 최가 저를 인격모독 했습니다. CCTV 영상이라서 그 부분이 드러나지 않은 것뿐입니다. 이건 명백하게 미스터 최가 저를 함정에 빠트린 겁니다.”
“허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내가 벤슨 교수를 잘못 봤군.”
윤리위원들이 혀를 차며 한마디씩 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저는 메이죠와 MHC를 거치며 항상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째서 저를 믿지 않고 이런 새파란 레지던트의 편을 드는 겁니까?”
“우리를 완전 바보 취급하는 군요.”
송명진이 인상 쓰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때려 놓고 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죠? 이야기를 더 끌 것도 없겠습니다.”
송명진의 시선을 받은 윤리위원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벤슨. MHC에서 당장 나가 주세요. 퇴직금은 전부 삭감하고 앞으로 메이죠 계열 및 다른 협력병원에서 일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이번 사건이 뉴스화되면 아마 의사 가운 입는 것조차 불가능해지겠죠. 자업자득이니 누구를 원망할 필요 없습니다.”
“…….”
“최 선생은 할 말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윤리위원회 소집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음에도 벤슨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사실상의 사형선고.
그의 의사 인생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 * *
윤리위원회가 끝난 후 최기석은 카페에서 송명진과 독대했다.
“최 선생. 정말 괜찮아요?”
송명진이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따뜻함이 깃든 눈빛은 마치 자식 염려하는 아버지를 닮았다.
“걱정마세요. 멀쩡합니다.”
“난 솔직히 걱정이 돼요. 몸이 아픈 건 둘째치고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까 봐요.”
“제 속마음을 말씀드리자면…… 앓던 이를 뺀 것처럼 후련합니다. 더 이상 벤슨 교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정말 괜찮습니다.”
최기석이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두드리자 송명진의 표정이 다소 풀렸다.
“어제 심장 수술은 잘 봤어요. 혈관 문합할 때 최 선생의 활약이 아주 대단했던 걸요? 만약 최 선생이 없었다면 수술 시간이 훨씬 길어졌을 겁니다.”
“아이를 살리려고 집중하다 보니 초인적인 힘이 나온 것 같습니다.”
최기석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교수님은 별일 없으시죠? 최근에 자리를 자주 비우셔서 찾아뵙지를 못했는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진료부원장이라는 직함을 다니까 주변에서 나를 가만두지 않네요.”
송명진이 농담조로 대답하고 화제를 돌렸다.
“저번에 프레시 카데바를 준비해 달라고 했죠?”
“네. 맞습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최 선생 부탁을 잊어버리면 곤란하죠. 그건 그렇고 신수술을 완성했다는 건 사실이에요?”
송명진의 눈에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호기심이 어렸다.
“교수님만 괜찮으시다면 오늘 수술법을 보여 드리려 하는데 시간은 어떠십니까?”
“하하하. 당연히 만사 제쳐 놓고 수술부터 봐야죠. 최 선생이 수술을 어떻게 풀어냈을지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군요.”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그럼 수술실로 가실까요?”
“좋아요.”
두 사람은 나란히 수술실로 향했다.
‘어쩌면 최 선생을 과소평가했는지 모르겠군.’
걷던 도중 송명진은 최기석을 힐끔 쳐다봤다.
최기석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의진대에서 인턴을 할 때와 레지던트가 됐을 때가 달랐고 메이죠에 있을 때와 MHC에서 수련할 때가 또 달라졌다.
일취월장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최기석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신수술을 완성할 수 없었다.
“교수님. 비록 시연이지만 오늘 집도를 실전처럼 진행하고 싶습니다. 흉부외과에 전화해서 스태프 몇 명을 호출해도 될까요?”
“최 선생이 편한 대로 해요.”
로젯을 잡은 두 사람은 추가 스태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로젯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숙제검사 시간이구나.’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집도의 자리에 섰다.
프레시 카데바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자신감으로 넘쳐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