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349화 (348/407)

그 후로 (1)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기숙사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초각성 효과를 사용한 탓이었을까.

수술 후 스태프들과 식사를 마치자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덕분에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씻지도 못하고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하여간 문제야. 문제.”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은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 오프라서 늦잠을 잘 수도 있었지만 몸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항상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수련을 했기에.

한참 멍을 때리던 최기석은 욕실에서 샤워하고 새 가운을 걸쳤다.

기숙사를 나서는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소아흉부외과 중환자실이다.

어제 따끈따끈하게 심장 수술이 끝난 라훌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였다.

치이이이익!

에어 샤워를 하고 격리실에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라훌은 흠뻑 잠에 취해 있었다.

최기석은 라훌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후 격리실에서 나와 스테이션에 들러 라훌의 차트를 훑었다.

새벽에 미열이 있었지만 두 시간 만에 정상체온으로 돌아왔다. 오심이나 구토, 심장리듬의 변화도 없었다.

그 말인 즉 걱정했던 감염관리나 심장이식 거부반응 부분에서 문제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환자 상태, 좋죠?”

최기석의 곁에 있던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죠. 하지만 거부반응은 수술 후 몇 주가 지난 다음에야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긴장을 늦춰선 안 돼요. 바이탈이 이상하다 싶으면 곧바로 연락 주세요.”

“물론이에요.”

최기석은 간호사와 대화를 마치고 중환자실 대기실로 이동했다.

수많은 보호자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라훌 부부다.

“닥터 최. 반갑습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

그를 발견한 부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우리 라훌은 좀 어떻습니까?”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는 흠 잡을 데 없이 건강합니다.”

“다행이다.”

“고맙습니다, 닥터 최.”

산제이와 라이 부부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고 최기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부부의 행동을 만류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보호자들의 감사인사를 받을 때면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말콤에게 들었습니다. 라훌을 위해서 말콤 부부를 찾아가 무릎까지 꿇고 장기이식을 부탁드렸다고요.”

“…….”

“그것도 모르고 우리 부부는 닥터 최를 원망하기만 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섭섭한 게 있다면 닥터 최가 너그럽게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정말 미안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두 분의 다급한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요.”

최기석이 미소를 띤 채 검지로 심장 부근을 가리켰다.

“깜빡 잊고 말씀을 안 드린 것 같은데 저도 이식받은 심장으로 살고 있습니다.”

“닥터 최가요?”

“말도 안 돼.”

부부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래서 두 분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관리를 잘하면 라훌도 저처럼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 테고요.”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앞으로는 저보다 두 분의 역할이 더 커질 겁니다. 부디 라훌과 행복하게 살아 주세요. 먼저 세상을 떠난 제라드를 위해서라도…….”

최기석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누군가는 이 순간이 행복에 겨운지 몰라도, 누군가는 이 순간이 슬픔의 장일 수 있다.

바로 후자의 상황에 있을 사람들이 떠오른 것이다.

문득 생각하건데 이번수술만큼 극적으로 삶과 죽음이 교차한 수술이 있었던가 싶었다.

터벅. 터벅.

낯선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마침 말콤 부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다들 여기 있었군요.”

말콤이 초췌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고 최기석과 산제이 부부는 말콤 부부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말콤 부부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희망에 부풀었던 산제이 부부는 말콤 부부의 눈치만 보았고 최기석 또한 특별한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암묵적인 규칙 같았다.

“괜찮다면 잠깐 라훌을 보시겠습니까?”

최기석의 시선이 말콤 부부에게 향했다.

“면회 시간이 아닌데 괜찮을까요?”

“제 제량으로 잠깐 시간을 낼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싶군요.”

“두 분은 잠깐 여기서 쉬고 계세요.”

최기석은 말콤 부부만 데리고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에어 샤워를 마친 후 부부와 격리실로 들어갔는데 아까와 달리 라훌이 깨어 있었다.

라훌은 말똥말똥하게 눈을 뜬 채 최기석과 말콤 부부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누구세요 하고 말하는 듯했다.

“라훌은 눈이 엄청나게 맑군요. 호수 같아요.”

“우리 제라드도 이때쯤에는 아기 천사였는데.”

말콤과 샤론이 라훌을 내려다보며 한마디씩 했다.

이후로 한참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최기석은 쓸데없는 말을 보태기보다는 그저 묵묵하게 자기 자리만 지켰다.

이윽고 말콤이 입술을 깨물며 최기석을 바라보았다.

“닥터 최.”

“네. 말씀하세요.”

“우리…… 정말 잘한 거겠죠?”

애잔함이 깃든 그의 말투와 눈빛에 최기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히 답이 되었는지 부부는 라훌에게 시선을 거두고 격리실을 떠났다.

* * *

지이이잉.

가운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었다.

최기석은 의국을 나와 휴게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저스틴, 오랜만이에요.”

[혹시 바쁜데 전화한 건 아니겠죠?]

“그랬으면 애초에 통화연결을 안했겠죠.”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저스틴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스틴은 크루즈 검진으로 파견 갔을 때 인맥을 쌓은 환자였다. 당시 고환파열로 응급상황을 맞았지만 비뇨기과의와 최기석의 노력으로 고자가 되는 것을 면했다.

이후 외래 진료를 꾸준히 받은 그는 무사히 성기능을 지켰다. 또한 결혼에 성공했으며 아내 린지가 최근에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C.K.S 컴퍼니의 메이죠 지분 인수 프로젝트에 중간보고를 할까 해서요.]

“진행사항은 어떤가요?”

[놀라지 마세요. 어제부로 C.K.S 컴퍼니가 메이죠 클리닉의 대주주가 됐습니다.]

“정말이요?”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대주주라니…….

경영이나 주식 쪽에 무지하지만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C.K.S 컴퍼니는 지금 메이죠의 주식 3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어요. 얼마 전 메이죠 주식의 7퍼센트를 가지고 있던 투자회사가 내놓은 매물을 낼름 삼켰거든요.]

“와우. 저스틴 진짜 고마워요. 사실 대주주까지는 생각도 못했는데. 병원장과 부병원장을 견제할 정도의 주식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먹을 거면 뭐든지 화끈하게 먹어야죠. 그나저나 대주주가 됐는데 생각해 둔 계획은 있나요?]

“글쎄요.”

최기석은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대주주는 해당 기업의 실소유주며 막강한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주주총회의 다수결을 통해 이뤄지지만 대주주의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당장 떠오르는 건 한 가지 있네요.”

[그게 뭐죠?]

“조만간 알려 드릴게요.”

[짓궂기도 하셔라. 그건 그렇고 조만간 주주총회가 열릴 거예요. 그 뭐야, 부병원장 파커라는 인간이 또 병원장을 부추겨서 뭔가 준비하는 모양이에요.]

이어지는 설명에 최기석 이마의 주름이 점점 늘어 갔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더니 결국 또 사고를 치는구나 싶었다.

물론 이번에는 제 맘대로 되는 게 손톱만큼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미스터 최는 돈을 참 현명하게 쓰네요.]

저스틴이 화제를 돌렸다.

[복권 당첨 후에 오히려 인생 망가지는 케이스가 많은데. 의사 생활도 여전히 잘하고 있고.]

“제가 복권에 당첨된 걸 어떻게 아세요?”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스틴과 재무상담을 했지만 파워볼에 당첨됐다는 이야기는 꺼낸 적이 없었다.

[그야 간단하죠. 메이죠 같은 대형 병원의 주식을 팍팍 매입할 수 있는 부자 의사가 몇이나 되겠어요. 타고난 부자였으면 애초에 의사 같이 힘든 직업을 택하지도 않았을 테고. 몇 번만 생각하면 답이 나오죠.]

저스틴이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여윳돈은 우리 회사에 투자 안 할래요? 닥터 최는 제 불알의 은인이잖아요. 끝내주게 불려 줄 자신 있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죠. 조만간 한 번 만나요.”

[이번 주 중으로 연락드릴 게요.]

최기석은 저스틴과 통화를 마치고 회의실로 향했다.

오전 회의는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가끔씩 벤슨이 불안한 표정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는데 최기석은 그에게 썩소로 화답했다.

오전 회의가 끝나는 순간 벤슨은 MHC에서 쫓겨날 운명이 될 테니까.

“회의를 끝내기 전 몇 가지 전달 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치프 레지던트가 단상에 서서 말을 이었다.

“이번 달 중으로 로봇 진료 왓슨의 시험 운행이 시작됩니다. 당분간은 외래진료와 병행될 예정이나 참고해 주세요.”

“…….”

“그리고 다음 달부터 크루즈 검진이 확대되어 파견 인력이 늘어납니다. 각 파트별로 파견근무표를 다시 작성해서 올려주세요. 더불어 VIP실과는 별도로 VVIP실을 건축할 예정입니다.”

치프 레지던트의 설명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졌다.

새소식 중 의사들에게 반가운 소식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저 병원의 수익 창출에 관련된 소식만 있을 뿐이었다.

스태프들 중 담담한 이는 해당 내용을 저스틴에게 미리 들은 최기석밖에 없었다.

‘그래. 이날을 기다렸지.’

그는 책상 아래로 내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주주에 오른 이상 파커에게 당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가올 주주총회에서 그에게 어마어마한 폭탄을 안겨 주리라.

그렇게 회의가 끝난 후 최기석은 야사다의 집무실을 찾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사건이지?”

야사다가 피식 웃으며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나를 찾아와서 평범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역시 헤드 치프는 저를 잘 아시는 군요.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소파에 앉은 최기석이 가운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구식 휴대폰이군. 자네, 이거 말고 최신 기종을 가진 걸로 아는데. 굳이 이걸 내게 건네는 이유가 뭐지?”

“잠시 후면 알게 되실 겁니다.”

최기석은 빙긋 웃으며 휴대폰 동영상을 재생한 후 야사다에게 내밀었다. 동영상을 보는 야사다의 얼굴이 난로처럼 달아올랐다.

눈에서는 레이저가 쏘아졌으며 두 팔은 부들부들 떨렸다.

쾅!

“이런 미친놈을 봤나!”

야사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최기석이 재생한 동영상, 그 속에서 최기석은 벤슨에게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명색이 교수라는 인간이 어찌 개망나니처럼 레지던트를 때린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열불이 터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벤슨 교수가 저를 따로 불러서 협박을 했습니다. 의무기록 조작 사건에 나선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요. 그 과정에 분을 이기지 못해 저를 때렸습니다.”

“씹어 죽일 놈.”

씩씩거리던 야사다는 곧바로 벤슨을 호출했고 집무실에 도착한 벤슨은 최기석 옆에 앉아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찌할 줄 몰랐다.

“벤슨. 내가 널 왜 호출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모르겠으면 기억나게 해 줄게. 앞으로 평생 동안 잊지 못하도록.”

야사다가 으르릉거리며 동영상을 재생한 휴대폰을 내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