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끝, 또 하나의 시작 (4)
[오늘 소아 심장이식 수술 있다면서? 기분은 어때?]
정설화의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묻었다.
그녀 역시 심장이식 수술의 배경을 알았다.
최기석이 뇌사자 부모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장기기증을 부탁했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만에 하나라도 수술이 실패한다면 두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된다.
더불어 그들의 원망의 화살은 가차 없이 최기석을 꿰뚫어 버릴 테고.
최기석은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 종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정설화다.
“평소랑 다를 거 없어.”
[정말? 내가 너라면 엄청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수술을 결정하기 전까지 우여곡절도 많았고…….]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정말 괜찮아.”
최기석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샴쌍둥이 라이브 수술도 견뎌 냈던 나잖아. 이 정도는 끄떡없어. 두 아이의 부모도, 라훌도, 나도 분명 웃으면서 수술실을 나올 거야.”
[믿음직스러워. 역시 내 남자야.]
“그럼. 설화 남자친구라면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의 너스레에 정설화는 꽉 막혔던 가슴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믿음이 가는 사람, 기대고 싶은 사람, 매번 가시밭길을 자처해서 안쓰럽고 보듬어 주고 싶은 사람, 환자만 생각하는 환자 바보 등등.
신기한 일이다.
그의 곁에서 긴 시간을 보냈음에도 볼 때마다 그에게서 늘 다른 매력을 느꼈다.
오늘의 매력 포인트는 믿음과 신뢰.
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 전염된 정설화는 수술이 실패하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다.
“내 꿈꾸면서 푹 자. 수술 결과 기다린다고 잠 못 자면 때찌 한다?”
[응. 알았어. 푹 쉴게.]
“그럼 나는 뿅!”
최기석은 통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휴대폰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걱정과 배려에 가슴이 따뜻하게 번졌다.
‘문제없어.’
각오를 다지는 최기석.
수술 준비는 이미 빈틈없이 끝냈다.
라훌의 심장이식 수술 날짜가 결정된 후.
트레이닝 룸을 뻔질나게 오가며 보조는 물론 집도 연습까지 했다.
집도 파트에서는 낙제점인 D를 면치 못했지만 보조 파트에서는 한우도 울고 갈 S랭크를 받았다.
수술 중에 생길 수 있는 바이탈 관리나 출혈, 혈관파열 등의 변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권일수와 함께라면 잘 이겨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최기석은 수술 과정을 복기하며 흉부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복도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벤슨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벤슨은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 그를 노려보았고 최기석은 무심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님.”
“…….”
“오전 회의가 시작하려면 한참 멀었는데 오늘은 일찍 출근하셨네요.”
“자네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지.”
“저 때문에 교수님이 일찍 출근하셨다니 영광입니다.”
“휴게실로 가자고.”
벤슨이 제 할 말만 하고 쌩하니 앞장섰다.
이윽고 휴게실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이 에너지 음료를 마셨다.
무거운 침묵 속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직 팽팽한 시선이 탁구공처럼 오갈 뿐이었다.
“너지?”
벤슨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디서 발뺌이야? 벤의 차트를 뒤진 게 너잖아.”
“아. 수술 며칠 전 CPR을 받고 컨디션도 안 좋았는데 무리한 수술을 받아서 사망한 벤 환자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 환자의 일이라면 제가 나선 게 맞습니다.”
최기석이 빈정거리자 벤슨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당장 폭발할 것 같았다.
“옛일을 파헤쳐서 대체 뭘 어쩌자는 거지? 네가 아무리 날뛰어도 죽은 환자는 돌아오지 않아.”
“적어도 그의 가족들은 억울함을 풀 수 있겠죠.”
“개자식. 넌 내부 고발자야. MHC에서 네 편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인간에게 잘해 줄 사람은 없다고.”
“MHC의 핵심 가치는 환자 중심입니다. 그 가치에 어긋난 의료행위를 했다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죠. 굳이 비유를 하자면 저는 정의의 탐정이고 교수님은 질 나쁜 악당입니다.”
“악당? 내가 악당이라고?”
쿵!
벤슨이 화를 이기지 못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주둥아리를 잘도 나불거리는구나. 과연 네가 언제까지 설칠 수 있을까? 응?”
“글쎄요. 정확한 시기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최소한 민사재판이 끝나고 교수님이 제인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배상할 때까지는 설쳐 볼 생각입니다.”
“이 자식, 진짜!”
벤슨이 거리를 좁힌 후 최기석의 멱살을 잡았다.
그가 뿜어내는 살기로 휴게실 분위기는 시한폭탄처럼 위태로워졌다.
“교수님. 그렇게 부들부들거리지 마시고 속 시원하게 한 대 치시죠? 그편이 훨씬 정신건강에 나을 것 같은데…….”
“오냐, 네 말대로 해 주마.”
퍼어어어억!
벤슨의 주먹이 최기석의 안면을 강타했고 최기석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입술이 찢어지면서 입 주변에 피가 번졌다.
“생각보다 손이 싱겁네요. 되도록 요리는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 돌아이가 아직도 입을 놀려?”
성큼성큼 거리를 좁힌 벤슨이 아직 쓰려져 있는 최기석의 복부를 연신 걷어찼다.
퍽! 퍽! 퍽! 퍽!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벤슨은 온몸을 휘감은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최기석을 아작 내지 않으면 본인의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너 이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레지던트 따위가 주제에 맞지 않는 수술에나 들어가고 말이야. 그리고 뭐? 환자를 위하는 의사? 그딴 게 이 세상에 어딨어?”
“…….”
“의사라고 뭐 대단한 게 있는 줄 알아? 다 돈 벌자고 하는 일이라고. 돈! 아니면 명예!”
벤슨은 악다구니를 쓰며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일방적인 구타를 끝낸 그는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축 늘어진 최기석을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십 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것 같았다.
돌아서서 휴게실을 나서려는 찰나 최기석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저도 의사가 위대한 직업이 아니라는 것쯤은 압니다. 돈과 명예를 위해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죠. 하지만 우리 직업이 다른 직업과 결정적으로 다른 게 뭔지 아십니까?”
“…….”
“우리가 상대하는 건 사람입니다. 그것도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최소한 환자들을 도구로 이용해 먹는 짓은 하면 안 됩니다.”
“지랄하네.”
쾅!
벤슨이 한마디 하고 세차게 문을 닫았다.
이에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요령껏 얻어맞은지라 크게 부상 입은 곳은 없었다.
수술 보조를 하는데 무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최기석이 아니라 벤슨에게 있었다.
“우리 교수님 불쌍해서 어쩌나. 이번 일은 파커도 커버 못 칠 텐데.”
최기석은 씨익 웃으며 천장에 걸린 CCTV를 응시했다.
* * *
그날 오후.
수술용 참관실은 모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잠시 후 펼쳐질 심장이식 수술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자리를 찾았다.
야사다와 카타리나, 벤슨 등의 흉부외과 스태프들은 물론이요 송명진과 파커 등의 간부들도 일찌감치 참관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여느 때와 다른 점이라면 라훌의 부모와 제라드의 부모까지 참관실을 찾았다는 점이었다.
“장기이식을 허락하는 대신 수술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습니다.”
제라드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권일수가 받아들이면서 극적으로 보호자 참관이 이뤄졌다.
“여보.”
샤론이 곁에 앉은 말콤을 응시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저는 우리 아이가…… 그렇게 되는 꼴은 차마 못 보겠어요.”
“제라드의 마지막 길이야. 우린 부모로써 그걸 끝까지 지켜봐 줄 의무가 있어.”
“하지만…….”
샤론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라훌 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참관실에 들어온 후부터 두 손을 모은 채 진지하게 기도에 열중했다.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듯한 모습에 쉽게 말을 걸기 힘들었다.
“정 힘들면 나가 있어도 좋아. 참관을 요청한 건 내 욕심이니 당신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니에요. 저도 당신의 뜻을 따를게요.”
샤론이 입을 앙 다물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각오를 했음에도 수술 시간이 다가오자 초초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비록 뇌사라고 해도 제라드가 살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라드가 로젯에 들어가는 순간 사랑스러웠던 아이는 저 세상으로 떠난다.
더 이상 아이의 숨결도 온기도 느낄 수 없게 되리라.
그런 샤론의 마음을 읽었는지 말콤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라훌의 부모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두 분의 결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두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라훌은 공여자를 기다리다가 말라 죽었을 거예요.”
“자식 둔 입장에서 어찌 두 분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감사 인사는 배가 부를 정도로 많이 먹었으니 그만 하셔도 됩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부부는 평생 갚아도 모자를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혹시 닥터 최에게 고맙다는 말씀은 하셨습니까?”
말콤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부부가 장기이식을 결정한 건 닥터 최 때문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몇 주 전 닥터 최가 병실로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부탁했습니다. 흉부외과에 심장이식을 기다리며 죽어 가는 아이가 있으니 큰 결단을 내려 줄 수 없냐고 말이죠.”
말콤의 말에 산제이가 놀란 토끼눈을 했다.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는 듯한 반응이다.
“저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갑자기 장기이식 환자가 생긴 걸로만 알았는데…….”
“닥터 최가 말을 안 한 모양이군요. 뭐. 그분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하지만…….”
“아. 그것도 모르고 저희 부부는.”
산제이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어.’
말콤은 숙연해진 산제이를 바라보며 새삼 최기석의 용기에 감탄했다.
환자와 보호자를 위해서 몸소 나설 수 있는 용기.
무릎 꿇고 애원할 정도로 깊은 절실함.
그러면서도 본인의 행동을 철저하게 숨긴 최기석은 분명 진짜 의사다.
분명 그라면 라훌에게 새 생명을 전하고 제라드의 숭고한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소아 심장이식 수술 참관은 참 오랜만이군. 오늘 수술은 어떻게 예상하나?”
팔짱을 낀 파커의 시선이 벤슨에게 향했음에도 벤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벤슨?”
“아. 죄송합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오늘은 자네답지 않게 넋이 빠져 있군.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아……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벤슨의 강한 부정에 파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징계 받은 일이라면 너무 마음에 담아 둘 필요 없어. 재수가 없었을 뿐이니까. 대신 앞으로의 일에 집중하라고.”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관객들을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건가?”
파커가 턱을 쓸어내리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수술 시간인 오후 2시가 되었음에도 모니터로 드러난 로젯은 텅 비어 있었다.
지이이잉.
말하기 무섭게 로젯으로 들어오는 수술 스태프들.
소아 심장이식 수술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