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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45화 (344/407)

하나의 끝, 또 하나의 시작 (3)

작별 인사를 끝낸 미구엘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가 팀 CPR 동료들에게 저지른 얌체 같은 짓은 용서할 수 없지만, 떠나가는 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뒤늦게나마 팀원에게 사과했다는 점.

그것만으로 미구엘의 기본적인 됨됨이를 엿볼 수 있었다.

세상에는 자기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며 남 탓만 하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바로 벤슨이나 파커처럼 말이다.

오전 회의에 이어서 오후 회의까지 무사히 끝났다.

최기석은 그길로 라훌의 병실을 찾았다.

절망에 빠진 부부가 건네는 힘없는 인사를 받고서 라훌의 침상 옆에 섰다.

인도에서 먼 길을 돌아 MHC를 찾은 라훌.

아이의 상태는 여전히 안 좋았고 부부의 얼굴은 아이의 미래만큼이나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을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조…… 좋은 소식이요?”

풀 죽은 얼굴로 보호자 침대에 앉아 있던 산제이가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내, 라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닥터 최, 설마…….”

“네. 그 설마가 맞습니다. 심장이식을 할 수 있는 공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지금 거짓말 아니죠? 장난치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보!”

“여보!”

산제이와 라이 부부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렸고 이를 지켜보는 최기석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부부의 마음고생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본 그다.

지금 이 순간 부부가 느끼고 있을 벅찬 감정을 뼛속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닥터 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괜히 닥터 최에게 짜증을 냈던 거 정말 죄송해요.”

부부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한마디씩 했다.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분이 끈기 있게 희망을 놓지 않았기에 기적이 일어난 거죠. 그리고…….”

“그리고?”

“굳이 감사 인사를 하겠다고 하신다면 저 말고 다른 분을 찾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기석은 장기 이식을 허락한 제라드 부부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신경외과 병동에 교통사고로 뇌사 판정을 받은 환자가 있다는 것.

그 환자의 부모가 라훌을 위해 장기 이식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 혹시 저번에 우리 병실을 찾았던 그 부부가 라훌을 돕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가 봐야겠습니다.”

“감사해요, 미스터 최.”

부부가 최기석에게 인사하고 황급하게 병실을 빠져나갔다.

‘지금부터가 문제구나.’

최기석은 부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련의 검사 끝에 진행될 심장이식 수술.

그 수술에는 장기를 기증하는 부모의 마음과 이식을 받는 부모 및 아이의 미래가 고스란히 달려 있었다.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수술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번 수술의 무게감이 남다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지이이이잉.

남은 환자를 살피려던 찰나, 콜폰이 몸을 떨며 훼방을 놓았다.

번호를 확인하니 신경외과 루시였다.

혹시 어제의 일을 따지려고 연락하는 건가.

추궁을 했다가 오히려 추궁당하게 생긴 처지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흉부외과 기석 최입니다.”

[미스터 최, 혹시 지금 시간 있어요? 신경외과로 빨리 올라올 수 있어요?]

“네. 바로 올라갈게요.”

최기석은 곧바로 신경외과 의국을 찾았다.

“미스터 최, 완전 미쳤어요. 미쳤다니까요?”

최기석이 의국으로 들어오자 루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고, 최기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들갑 떠는 루시가 심상치 않았다.

“제가 어제 미친 짓을 했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어제 완전 대박 사건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피부에 닭살이 돋는다고요.”

“알아듣기 쉽게 말해 주세요.”

“미스터 최의 추론이 맞았어요. 일가족 가스 흡입 사건의 범인은 바로 빅터예요.”

빅터가 범인이라는 루시의 말이 최기석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최기석은 놀란 나머지 눈을 깜빡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제 최초로 추궁에 실패하는 불상사를 겪었다.

그 결과, 빅터는 미친 듯이 날뛰었고 말이다.

그런데 루시가 빅터를 범인으로 지목하니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거 기억나죠?”

루시가 가운 주머니에서 작은 펜을 꺼냈다.

어제 최기석이 준비한 녹음기다.

빅터가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지금까지 녹음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마 빅터와 몸싸움을 하던 중 녹음기가 격리실에 떨어진 모양이다.

“빅터의 자백을 녹음할 생각으로 가져왔습니다. 역시 그게 문제가 됐나 보죠?”

“암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됐죠.”

루시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최기석에게 녹음기를 건넸다. 그리고 의자 앞에 앉아 미리 옮겨놓은 녹음기 파일을 열었다.

[하아…… 그 새끼 눈치가 제법이네. 하마터면 다 털어놓을 뻔했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뭐 잘 넘어갔으니 다행이지만.]

..[아빠도 문제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칠천 달러만 빌려 달라고 했는데, 그걸 거절해 버리니까 집안이 이 꼴 나는 거 아니야. 형이라는 새끼는 옆에서 도박한다고 잔소리나 해대고 말이야. 칠천 달러만, 딱 칠천 달러만 빌려줬어도 그딴 짓거리는 안 했을 텐데……. 아빠, 형, 사실 나도 그런 짓 하기 싫었다고.]

..[뭐, 이제 와서 후회해야 소용없지. 어차피 머저리 같은 정신과 의사는 내가 정신병이 있다고 믿는 데다가 사채업자 새끼들한테 보험금만 조금 떼어 주면 완전 내 세상이네. 히히히.]

녹음파일 재생이 끝난 후 루시와 최기석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떨어진 녹음기는 빅터의 혼잣말을 완벽하게 녹음했다.

그가 이번 사건의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남기면서…….

“혹시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어요. 미스터 최의 생각이 맞았어요. 이 쓰레기 같은 놈이 가족을 죽이고 정신질환이 있는 것처럼 연기하는 거였다고요.”

“녹음파일을 경찰에 넘기면 사건이 쉽게 풀리겠네요.”

“이놈의 뒤처리는 제가 할게요. 내가 머저리인지 아닌지 이 기회에 똑똑히 알려 줘야죠.”

루시의 눈에 독기가 가득 찼다.

자신을 바보 취급한 빅터의 말에 자극을 받은 모양이다.

“루시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진행하세요.”

“흠흠. 그리고 어제는 괜한 짜증을 내서 미안합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아닙니다. 제가 실수를 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최기석은 루시와 대화를 마치고 의국을 빠져나왔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다는 말이 지금 상황에 딱 맞았다.

본의 아니게 빅터의 범죄 사실을 밝혀냈으니 말이다.

의국으로 복귀하던 그는 문득 과거 미국에서 있었던 한 케이스를 떠올렸다.

전 부인과 여자 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은 부동산 재벌이 리얼리티 쇼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쇼에서 본인이 죄가 없음을 설파했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의심을 다소 거두게 되었다.

문제는 그가 화장실을 찾았을 때 발견했다.

[당연히 내가 다 죽였지.]

남자는 마이크 착용 중이라는 것을 깜빡 잊은 채 화장실에서 본인의 혐의를 인정하는 말을 뱉었다.

당연히 이로 인해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시작되었고 그는 다시 한 번 법정에 서게 되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의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할까.

“마음씨를 곱게 써야지. 감방에서 평생 썩어 봐라.”

최기석은 빅터를 향해 살을 날렸다.

* * *

그로부터 닷새가 지났다.

최기석의 수련 생활은 다른 때와 다르게 평탄하게 흘러갔다.

본래 그가 겪어야 할 우여곡절은 다른 사람이 겪게 되었고 말이다.

그동안 가장 곤욕을 치른 사람은 바로 벤슨이었다.

벤슨은 의무기록을 제멋대로 변경하고 환자의 사망 원인을 은폐한 대가로 징계 및 감봉, 휴가 삭감을 당했다.

본래라면 곧장 잘려야 마땅했지만 부병원장 파커가 힘을 쓰면서 자리는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최기석과 가일의 도움을 받은 제인이 벤슨에게 소송을 걸면서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벤슨은 쥰 증후군의 경과를 두고 권일수와 했던 내기에서 참패했다. 견인기를 사용한 신수술로 환자의 흉곽이 정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이 있었다. 벤슨, 이제 와서 딴소리하지는 않겠지?”

이틀 전 있었던 오전 회의, 단상에 올라선 야사다가 벤슨을 불러 곁에 세운 후 조소를 날렸다.

“자, 그럼 소아흉부외과 전문의 벤슨의 람보쇼를 감상해 보자고.”

“…….”

야사다의 말에 벤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는 스태프들을 훑다가 힘겹게 두 손을 허공에 뻗었다.

총 잡는 시늉을 한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벤슨의 입에서 두두두 하는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벤슨, 뭐하는 거야? 장전을 제대로 안 했나? 총소리가 안 들리는데?”

야사다의 지적에 벤슨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결국 벤슨은 람보 흉내를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진 후 스태프들이 저마다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고난을 겪었던 것은 벤슨뿐만이 아니었다.

친부와 형을 살해한 빅터 역시 죗값을 치르게 되었다.

녹음파일이 경찰에 전해지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경찰은 빅터를 불러 죄를 추궁하는 한편, 그와 연관된 사채업자를 찾아냈다.

이를 통해 사채업자가 이번 사건을 조작하는 데 연루되었으며 빅터가 보험금으로 빚을 갚겠다고 말한 정황을 포착했다.

이쯤 되자 빅터도 마냥 범죄를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빅터는 죄를 자백하고 구치소에 넘겨졌다.

주변에서 파란만장한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최기석은 스승의 신수술에 몰두했다.

이제 한 고비만 더 넘으면 수술이 완성된다.

그 일념 속에서 수술을 더 정확하고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완에 나섰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라훌의 심장이식 수술을 진행하는 날이 밝았다.

* * *

“좋았어!”

최기석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스승의 신수술을 완성했다.

수술이 끝난 후 귓가에 울렸던 알림.

[수술이 종료되었습니다. 수술의 최종 랭크는 A입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물론 할 일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우선 스승 앞에서 카데바로 수술을 인정받아야 하며 그다음은 라이브 수술 등을 통해 다른 의사들에게 신수술을 알려야했다.

그럼에도 제일 큰 고비를 넘겼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최기석은 창가에 서서 들뜬 마음을 억눌렀다.

오늘은 라훌의 심장이식 수술이 있는 날이다. 벅찬 마음에 중요한 수술에 누를 끼칠 수는 없었다.

심호흡을 하던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그런데 가운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번호를 확인한 순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설화야, 굿모닝, 아니 그쪽은 굿나잇인가?”

[맞아. 내 입장에서는 굿나잇이지. 그건 그렇고 그건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아까 ABD 방송국에서 인터뷰하는 거 봤어. 마지막에 아주 화끈하던 걸?]

“벌써 봤구나. 나중에 말하려고 했는데.”

당시를 떠올린 최기석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바보. 그런 건 빨리빨리 말해 줘야지.]

정설화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사랑해, 자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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