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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44화 (343/407)

하나의 끝, 또 하나의 시작 (2)

“뭐, 준비하고 말 게 있나요?”

루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상담은 내가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정신과 환자를 면담하는 게 미스터 최의 역할은 아니잖아요.”

“일반적인 케이스라면 루시의 말이 맞죠. 하지만 이번 환자는 좀 특별해서요.”

“특별한 환자라면 더더욱 제 도움이 필요할 텐데…….”

“제가 괜히 나서는 걸로 보인다는 거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제게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요.”

최기석이 루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번 상담으로 문제가 생긴다면 100퍼센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루시는 전 주치의였던 제가 상담 요청을 해서 응한 것뿐이라고 빠져나가면 됩니다.”

“치밀하네요. 벌써 거기까지 생각했나요?”

“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죠.”

대화가 잠시 중단된 사이 루시가 먼저 운을 뗐다.

“솔직히 저도 미스터 최의 가정이 완전히 빗나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상담할수록 석연치 않은 모습도 보이고…….”

“…….”

“그런데 빅터가 과연 미스터 최에게 순순히 자백할까요?”

“안 되면 되게 해야죠.”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가운 주머니에 둔 펜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펜이지만 동시에 녹음기이기도 했다.

과거 MHC 신경외과에서 수련 중, 이 펜을 이용해서 사망진단서를 조작하려 했던 매튜에게 빅엿을 먹였다.

이른바 승리의 녹음기라고 할까.

“슬슬 들어가 보겠습니다.”

“건투를 빌죠.”

루시의 응원을 뒤로하고 최기석은 스테이션 옆에 붙은 격리실로 이동했다.

오직 수면등만 켜진 격리실은 침침했다.

테이블에 놓인 물건들조차 쉽게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동화된 빅터는 그가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침대에 걸터앉아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빅터, 흉부외과 주치의였던 미스터 최입니다.”

빅터는 그의 인사를 받고서야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인사에 대한 화답은 없었으며 그저 퀭한 눈빛으로 최기석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빅터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서요. 잠깐만 그대로 앉아 있을래요?”

최기석은 빅터의 상의를 걷고 청진기로 심음과 호흡음을 확인했다.

물론 두 가지 다 이상은 없었다.

애초에 청진기를 사용한 건 진료를 보기 위해 왔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연출이기도 했고.

“격리실에 있으니 불편하죠?”

“아니요. 오히려 여기가 편한데요? 편하게 돌아다니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겁이 나요.”

빅터가 불안한 듯 발끝으로 톡톡 땅바닥을 쳤고 최기석은 가운 주머니에 넣어둔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추궁, 이의가 있어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 추궁 모드를 통해서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 추궁 모드: 상대방의 대화를 텍스트로 나타내어 미심쩍은 부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후 적절한 증거를 제시하면 상대방의 거짓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스킬을 사용한 그의 눈이 이채로 번뜩거렸다.

싸움은 지금부터다.

“더 할 말 없으면 가 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빅터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지 모릅니다.”

“입 발린 소리 집어치워요.”

“사건이 있었던 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듣고 싶군요.”

최기석이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질문에 나섰지만, 빅터는 이상하게 입이 저절로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입을 꼭 다물어야지 다짐했건만 누군가가 그의 입을 억지로 움직이는 기분이랄까.

그 기묘한 감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건 당일에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아버지는 저와 큰 형에게 커피를 타 주셨고 형과 저는 그걸 넙죽 받아먹었죠. 눈을 뜨고 나니 응급실이었어요.]

빅터의 머리 위로 떠오른 텍스트.

최기석은 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잠깐만요! 커피를 마신 후에 곧바로 잠이 들었나요? 중간에 다른 기억은 없습니까?”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별한 일을 한 기억은 없어요. 아마 소파에서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새로운 추가된 텍스트를 확인한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말과 상황에 모순이 드러나고 있었다.

“빅터 방금 소파에서 TV를 보다가 잠들었다고 했나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응급실 기록지와 경찰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했을 때 빅터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고 합니다. 왜 그들의 증언과 빅터의 기억이 다를까요?”

최기석의 지적에 빅터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우울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맹수처럼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빅터가 이 대화의 목적을 감지했음을, 더불어 위기감을 느끼고 있음을 뜻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

“…….”

[소파에서 TV를 보다가 제 방으로 갔나 봅니다. 이제 대답이 됐나요?]

빅터가 이를 갈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건 그렇고 나를 찾아와서 그때 일을 꼬치꼬치 묻는 이유는 뭡니까? 내 정신 상태가 안 좋아서 경찰조차 면담 못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빅터의 조부가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분은 절대로 빅터의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죠. 그분의 답답함을 저라도 해결해 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의심한 사람이 고작 접니까? 어처구니가 없군요. 내가 대체 무슨 이유로 아버지와 형을 죽인단 말입니까. 난 그런 패륜아가 아니에요.]

“…….”

[만약 닥터 최의 말이 맞다면 나는 부모와 형제를 죽이고 정신병을 연기하는 희대의 쓰레기가 되겠군요. 동양 의사들은 환자를 쓰레기로 만드는 취미가 있나요?]

“말 한번 잘했습니다.”

[뭐…… 뭐라고요?]

“저는 알고 있습니다. 빅터가 아버지와 형제를 계획적으로 살인하고 아버지에게 누명을 덮어씌운 이유를.”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도박 빚을 갚기 위해서 아닙니까? 경찰 조사 결과 빅터는 노름을 하던 중 사채업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이 씨발,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나불거려도 돼?]

빅터의 언사가 삽시간에 거칠어졌다.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으며 두 팔은 부들부들 떨렸다.

“아버지에게 고액의 생명보험이 들어져 있고, 그 보험금의 수령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안 당신은 이번 사건을 오래 전부터 준비했겠죠. 세간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신조차 위험을 빠트리는 강수를 두고 사건 후 정신병이 생긴 것처럼 연기를 하면서요. 제 말이 틀립니까?”

최기석은 폭발하기 직전인 빅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역시 최기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피 말리는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빅터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실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큭. 미치겠군, 진짜.]

정신없이 웃던 빅터의 시선이 다시 최기석에게 향했다.

[그래. 내가 그랬다. 아버지와 형을 죽인 건 바로 나라고. 네 말대로 돈이 궁해서 그랬지…….]

“…….”

[……라고 할 줄 알았냐? 미친 새끼. 넌 의사도 아니야.]

빅터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달려들었다.

휘이이이익. 퍼어어억!

다짜고짜 날린 주먹이 최기석의 가슴팍을 때렸고 최기석은 기습공격에 몸을 휘청거렸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 빅터의 행동과 지금의 상황이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빅터가 범인이 아니라고?

정신병을 연기하고 있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개새끼. 너 같은 새끼는 의사 자격도 없어.]

최기석은 재차 달려드는 빅터의 두 팔을 잡아 힘 싸움을 벌였고 그 사이 루시와 그의 연락을 받은 보안요원들이 격리실에 들이닥쳤다.

“닥터 최, 나오세요. 빨리.”

“저 새끼, 내가 죽여 버릴 거야. 감히 나를 쓰레기 패륜아로 만들어! 너 같은 새끼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고 뒤져야 돼. 의사 생활 못하게 손가락을 다 분질러 놔야 된다고!”

보안요원에게 제압당한 빅터가 강제로 침대에 눕혀졌고 한 박자 늦게 투입된 간호사들이 빅터의 팔다리를 구속했다.

그동안 빅터는 최기석에게 세상에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퍼부었다.

“미스터 최, 잠깐 나 좀 봐요.”

“아, 네.”

멍하니 서 있던 최기석은 루시의 제안을 받고 의국을 찾았다.

“빅터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저렇게 길길이 날뛰어요? 환자 상태가 더 나빠졌잖아요.”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사건의 범인으로 빅터를 지목했습니다.”

“노골적으로요?”

“……네.”

“하아…… 바보같이 왜 그랬어요. 말을 적당히 돌리던가 아니면 다른 식으로 말을 하게 유도를 해야죠. 네가 범인이지 하고 물으면 ‘제가 범인입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미안해요, 루시.”

최기석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추궁 스킬을 믿고 승부수를 던졌건만 결과가 참혹했다.

루시를 똑바로 쳐다볼 낯이 없었다.

“하여간 아까 말한 대로 이번 일이 커지면 미스터 최가 단독으로 나선 걸로 해 줘요. 앞으로 이 환자에 대한 관심은 전부 꺼 두고요. 알았죠?”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축 처진 어깨로 의국을 나섰다. 그러던 중 사지를 결박당한 채 안정제 주사를 맞고 있는 빅터의 모습이 창 너머로 보였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지만 결과는 전과 마찬가지.

진단명이 텅텅 비어 있었다.

정말 빅터는 사건의 범인이 아닌 걸까?

그렇다면 있지도 않은 정신병을 연기하는 이유는 뭘까.

누군가가 속을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에,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 * *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새벽부터 기상해 트레이닝 룸에 입장했다.

스승의 신수술을 완성시킬 실마리를 찾았다.

이를 조금만 더 보완한다면 조만간 학계에 정식으로 발표할 수준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수술대 앞에 선 그는 수술에 앞서 인공조직과 혈관을 엮어 이식편을 제작했다.

어제 수술 중 이식편을 제작한 것과는 정반대의 행보.

사전에 이식편을 제작해야 수술 시간을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기석은 이식편을 제작한 후 본격적인 수술에 나섰다.

하루에 최소 두 번 이상 연습했던 수술인 만큼 수술 과정은 깔끔하게 진행됐다.

CABG와 심근절제를 쾌도난마로 마치자 수술의 하이라이트인 인공혈관과 조직 연결이 남았다.

최기석은 미리 완성한 이식편을 심장에 맞추고 본격적인 봉합에 나섰다.

이식편을 미리 제작한 만큼 수술 과정이 심플해졌다.

주요 혈관 연결을 연결하고 이식편의 외곽라인을 꿰매 주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수술이 끝나자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스승의 신수술을 종료하였습니다. 수술의 종합 랭크는 B+입니다.]

알림을 확인한 최기석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해냈다.

B랭크라면 환자가 수술 후 생존했다는 뜻이 아닌가.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벅찬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더불어 이제야 스승의 얼굴을 마음 편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기석은 트레이닝을 종료하고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의국에서 인수인계를 받은 후 오전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상하게 벤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오전 회의를 빠졌던 건 이번이 처음이라 놀라움이 컸다.

‘드디어 헤드 치프가 나선 모양이군. 똥줄 빠지겠어.’

벤슨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맴돌았다.

오전 회의가 무사히 끝난 가운데 한 의사가 갑자기 단상에 올랐다.

그는 좌중을 훑어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팀 CPR의 티칭 펠로우를 맡고 있던 미구엘입니다. 오늘부로 MHC를 나와 새로운 곳에 둥지를 터 보려 합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저를 감싸준 팀 CPR 동료들과 카타리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MHC에 있는 모든 스태프들에게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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