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끝, 또 하나의 시작 (1)
터벅. 터벅.
최기석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질주했다.
인터뷰 막판에 하트를 그리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정설화가 인터뷰를 보면 좋아할 거라는 판단에 용기를 쥐어짜서 한 행동이지만 낯이 뜨거워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괜찮아. 다들 이해할 거야. 어쩌면 날 로맨티시스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흉부외과 의국으로 복귀했다.
“방금 막 들어온 사람에게 말하긴 뭐한데…… 너 바로 나가 봐야겠다.”
찰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응급실에 환자 왔어?”
“환자는 아니고 이상한 보호자가 왔다 갔어. 신경외과에 제라드 보호자라고 하면 알 거라는데?”
“아…….”
최기석은 말콤과 샤론 부부를 떠올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대체 뭐하고 다니냐? 왜 다른 과 보호자가 너를 찾는데?”
“나중에 설명해 줄게.”
“하여간 비밀도 많으셔. 누가 보면 의사가 아니라 비밀단체 소속인 줄 알겠다.”
어깨를 으쓱하는 찰스와 헤어진 후 신경외과 병동을 찾았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가자 말콤과 샤론이 차분한 표정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안녕하세요. 저번에 인사드린 흉부외과 기석 최입니다.”
최기석은 인사를 건네고 적당한 거리에 서서 부부를 바라보았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얼마 전 이 두 사람을 찾아 몹쓸 말을 하지 않았던가.
가슴에 대못을 박지 않았던가.
그때의 기억이 겹치면서 쉽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버렸고 혀는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닥터 최, 저번에 우리를 찾아왔을 때 뭐라고 하셨죠?”
“……제라드의 심장을 다른 환자에게 이식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게 정녕 우리에게 할 말이던가요?”
“그 일은 두고두고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한차례 대화가 끝나고 피 말리는 침묵이 이어졌다.
최기석은 부부 앞에서 뭐라 말을 할 수 없었고, 부부는 할 말을 애써 삼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병실의 침묵은 이대로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말콤이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
“사실 어제 말입니다. 닥터 최가 말한, 심장이식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의 병실을 찾았어요.”
“…….”
“인도에서 온 환자더군요. 무슨 장치 같은 걸 달고 있던데, 그게 뭡니까?”
“떨어진 심장의 기능을 돕는 심실보조장치입니다. 라훌은 그걸 사용하지 않으면 당장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태롭습니다.”
최기석의 대답에 말콤이 턱을 쓸어내렸다.
“똑같이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라서 그런지 그 부부를 보니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군요. 더군다나 라훌은 우리 제라드보다 훨씬 어려 보이던데.”
“……여보.”
샤론이 말콤의 손을 꼭 붙잡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당신도 이미 동의한 내용이잖아.”
“알아요.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까 입이 안 떨어져요.”
말콤은 이해한다는 듯 샤론을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이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제라드를 내려다보았다.
뇌사에 빠진 아들을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짙은 애잔함이 묻어 있었다.
“뜸 들일 거 없죠.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제라드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부부는 제라드를 놓아주기로 결정했습니다.”
“…….”
“레온에게 들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회생할 확률은 기적에 가깝다고 말이에요.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 다른 기적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겠죠. 우리 아이의 생명을 다른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싶습니다.”
“역시…… 다른 방법은 없겠죠?”
말콤은 샤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걸 모른단 말입니까?”
“…….”
“최선을 다해서 라훌을 살려 주세요. 그 아이가 앞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 부부를 찾아왔던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최기석이 말끝을 흐렸다.
지금의 결정을 하기까지 부부가 겪었을 고통과 슬픔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라훌에게 수술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평소와는 분명 상황이 다르다.
그는 누군가의 아픔이 누군가의 희망으로 변하는 그 지점에 서 있었으니까.
“닥터 최. 부탁드려요.”
샤론이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제라드를 보내는 건 죽기보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으니.”
“…….”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 라훌의 수술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우리 아이의 심장이 라훌의 몸속에서라도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만약 수술이 실패하면 제라드는 두 번 죽는 거라고요.”
그녀는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해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녀가 토해 내는 슬픔에 최기석의 가슴이 애잔하게 젖어 들었다.
“그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자세한 이야기는 시간이 지난 후에 합시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네. 그럼 이만.”
최기석은 그대로 병실을 나왔다.
콧잔등이 시큰했지만 굳세게 참아 내고 흉부외과로 돌아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남은 건 최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피땀을 흘리는 일뿐.
똑. 똑. 똑.
권일수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권일수는 송명진과 집무실 소파에 앉아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웬일이야. 최 선생이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고.”
“최 선생, 눈이 붉은데 울었어요?”
송명진이 그의 표정을 읽고 한걸음에 거리를 좁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혹시 벤슨이 해코지라도 했나요? 당장 말해 봐요.”
“괜찮습니다. 그런 일은 아니에요.”
최기석은 송명진을 안심시키며 권일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방금 전 신경외과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뇌사 판정을 받은 제라드와 그의 부모가 장기 이식에 동의한 내용을.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군.”
“부부가 큰 결심을 했어요.”
두 사람이 무거운 표정으로 한마디씩 했다.
아이가 뇌사에 빠졌더라도 실낱같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은 게 부모 마음이 아닌 가.
그들의 결단은 실로 위대했다.
“혹시 라훌 부부에게는 방금 전 이야기를 했나?”
“아직 안 했습니다. 수술 계획이 구체적으로 나온 뒤에 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 잘했어.”
권일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최대한 빨리 수술 스케줄을 잡아야겠군. 우선 제라드를 흉부외과로 전원시키고 혈액검사와 심장기능 검사 오더를 내려. 혹시 모르니까 다른 장기들도 철저하게 검사하고.”
“…….”
“최 선생이 경험해 봤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수술 직전에 공여자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수술이 연기되는 케이스가 빈번하거든.”
“네. 수술 전까지 제라드의 건강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허허. 의욕에 가득 찬 건 좋은데 나를 그렇게 노려보지는 말라고. 나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농담. 신경 쓸 필요 없어.”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잠자코 있던 송명진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까 보호자를 직접 찾아가서 장기이식을 부탁했다고 했죠?”
“……네. 그 부부에게 몹쓸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이번 수술을 실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은 진정할 때예요.”
송명진의 부드러운 시선에 최기석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활화산처럼 뜨거웠던 열기가 차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가슴이 너무 뜨거워도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앞으로의 방향을 생각해 봐요. 지금의 그 심정을 치료로 녹여 내는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후 최기석은 권일수와 곧 있을 심장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 그리고 송 교수님께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한테요?”
송명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게 확장성 심근병증과 심부전증에 대한 신수술 완성을 부탁하셨잖아요. 드디어 수술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벌써요? 최소 일 년은 지나야 윤곽이 잡힐 줄 알았건만.”
송명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최기석은 현재 MHC에서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기본 환자 관리 업무에, 외래 진료 업무에, 크루즈 파견에, 프로젝트 팀 활동까지.
그 와중에 신수술의 단서를 이리도 빨리 찾아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프레시 카데바를 새로 준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말에 제 성과를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하하하.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송명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고 제가 수술을 완성하면 교수님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라…… 뽀뽀라도 해 줄까요?”
“그것도 좋지만 제 부탁은 다른 쪽입니다.”
최기석은 씽긋 웃으며 송명진의 농담을 받아쳤다.
“제 부탁 들어주실 거죠?”
“그 부탁이 뭔지 설명은 안 해 주는 겁니까?”
“네. 그 전에 교수님의 확답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뭐, 람보 흉내를 내는 것만 아니면 다 오케이에요.”
“당연하죠. 람보 흉내는 벤슨 교수가 하는 걸로 충분합니다.”
스승의 확답을 받은 최기석은 대화를 마치고 정신과 병동으로 이동했다.
이제 오늘의 피날레를 장식할 때가 왔다.
* * *
신경정신과 의국.
타다다다닥.
루시는 환자와 상담한 내용을 차트에 옮겨 적고 있었다.
망상을 앓고 있는 환자와 대화를 나눠서 적어야 할 것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아이고, 시원하다.”
입력을 끝낸 루시는 후련하게 기지개를 켜고 벽시계를 응시했다.
현재 시간은 오후 4시 50분.
슬슬 약속한 사람이 올 때가 됐다.
그 전에 상담을 준비할 겸 빅터의 의무기록을 살폈다.
빅터와 그의 가족들은 바비큐용 연탄 연기를 흡입해 응급실에 실려 왔다. 불행하게도 함께 왔던 아버지와 형은 목숨을 잃고 그 혼자만 살아남았다.
안타까운 점은 그 모든 사건의 원흉이 바로 그의 아버지에게 있다는 점이다.
그의 아버지는 평소 우울증을 앓았으며 조부에게 자살하고 싶다는 문자도 보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급기야 자식들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방에 가스 불을 피우는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탁. 탁. 탁.
루시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번 사건으로 빅터는 아버지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충격 속에 자살충동을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극심한 공황장애와 우울증까지 앓았고 말이다.
“조금 거슬리기는 해.”
루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정황상 빅터에게 정신질환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다만 그의 증상이 지나치게 교과서적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마치 정신과 서적을 공부해서 증상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최기석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에는 그 감이 한몫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고 말하자 최기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 준비됐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