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 (5)
터벅. 터벅.
벤슨은 MHC 본관 2층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초조하게 떨리는 두 손은 서로를 매만지기 바빴고 입술은 가뭄이 난 것처럼 바싹 말랐다.
이윽고 도착한 복도 끝 진료부원장실,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진료부원장의 호출은 처음인 데다가 최근 딱히 칭찬 받을 일은 한 기억이 없었다. 진료부원장의 호출을 좋은 방향으로 생각할 여지는 많지 않았다.
‘괜찮아. 야사다 치프도 아니잖아. 물러터진 송 부원장이라면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어.’
스스로를 다독이며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들어오라는 목소리에 안으로 향하는 벤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단출한 집무실의 모습도, 송명진도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서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야사다의 눈빛이었다. 꿈에 나올까 싶을 정도로 오싹한 눈빛에 벤슨은 슬쩍 시선을 흘렸다.
“안녕하십니까. 진료부원장님, 헤드 치프도 계셨군요.”
“거기 앉아요.”
송명진의 손짓에 벤슨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전 흉부외과 헤드 치프와 현 흉부외과 헤드 치프가 나란히 앉아서 그를 바라보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저를 호출하셨습니까?”
벤슨은 가시방석에 앉은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이유일 것 같지?”
“글쎄요. MHC가 EOB 평가에서 최우수 등급을 받았으니 포상이라도 주시려는 게 아닐까요?”
“태평한 소리 하는군.”
야사다가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오늘 자네를 부른 건 일 년 전 사건을 추궁하기 위해서야. 혹시 벤이라는 환자의 이름을 기억하나?”
“벤이라…….”
벤슨은 이름을 되뇌며 기억의 저편을 뒤졌다.
벤. 벤. 벤.
계속되는 되뇜 끝에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얼굴이 저절로 구겨지고 이마에 주름이 졌다.
이제 와서 그 이름이 왜 두 사람 입에서 나오는 걸까.
불길한 예감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눈치가 빠르더군요. 참고로 교수님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미스터 최가 교수님을 향해 이를 갈고 있습니다. 조만간 해코지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퇴직 의사를 밝히면서 미구엘이 했던 말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설마 이 모든 걸 최기석이 설계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벤슨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표정 관리에 나섰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 환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던 겁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낯짝이 열 배는 더 두껍군. 자네 얼굴에 고기를 구워 먹어도 문제없겠어.”
“헤드 치프.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심한 건 자네 행동이야! 벤의 집도의는 자네였고 벤은 자네가 수술을 강행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 자네가 실수를 인정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졌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더군.”
“…….”
“자. 이걸 보실까?”
야사다가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을 벤슨에게 돌렸다.
벤슨은 노트북에 떠오른 환자 차트를 확인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차트가 수정된 내역과 로그가 보기 좋게 떠올라 있었다.
순간 주변의 풍경이 허물어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환자가 사망한 후 의무기록을 제멋대로 수정했더군. 물론 기존 내용과 수정한 내용이 어떻게 다른지는 나오지 않았지.”
“…….”
“의료소송을 피하기 위한 꼼수였다는 걸 내 입으로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하하하하하.”
벤슨이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리자 야사다와 송명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잠자코 있던 송명진이 나섰다.
“벤슨. 솔직히 털어놓게. 의사가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고 하나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그 말인 즉 누구라도 실수나 오판을 할 수 있다는 뜻이지.”
“…….”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만 진짜 의사로 거듭날 수 있네. 자네가 이 자리에서 본인의 잘못을 털어놓고 이 사건에 책임을 진다면 어느 정도 선처할 마음이 있어.”
“부원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벤슨이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의무기록을 수정하고 수정 내역을 표시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제 불찰입니다. 하지만 그 이외의 이야기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뭐라고?”
“환자가 사망한 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가 책임질 부분은 차트 수정 내역뿐이라는 겁니다.”
“헛소리 작작해!”
야사다가 분통을 터뜨리며 말을 계속했다.
“환자는 수술 이틀 전에 CPR을 받았고 이후 바이탈이 계속 불안정했어. 이런 환자를 억지로 수술한 게 의료사고가 아니면 대체 뭐가 의료사고지?”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 내 생각보다 훨씬 악질이군.”
송명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파커 부병원장에 기대서 이번 일을 그냥 넘기려는 모양인데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죠. 하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 같은데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벤슨은 휙 하니 일어나서 부원장실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방금 전까지 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두 손은 휴대폰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애써 휴대폰을 쥐었지만 떨리는 손 때문에 터치가 자꾸 미끄러졌다.
‘안 돼.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벤슨은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구해 줄 동아줄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이마의 맺힌 땀을 훔치며 촬영장을 나왔다.
에단의 끈질긴 제안을 못 이겨 드라마에 카메오 출연했다.
대사는 짧은 한 마디뿐이었지만 말을 버벅거리고 표정이 굳어 몇 번이나 NG를 내고 말았다.
의사는 무릇 환자를 고쳐야지 괜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촬영장을 나온 그가 향한 곳은 흉부외과 중환자실이다.
“선생님. 잠깐 차트 좀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간호사에게 양호를 구한 후 빅터의 간호기록지를 살폈다.
빅터는 오전에 정신과 협진을 받았으며 이후에도 여전히 팔다리를 구속한 상태다.
식사하고 소변보는 일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했다고 적혀 있었다.
최기석은 차트를 확인하고 격리실 모니터를 응시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결과 그의 진단명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최기석은 뚜두둑 고개를 꺾고 보호자 대기실로 이동했다.
빅터의 유일한 보호자가 된 그의 조부 로버트가 경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로버트에게 다가갔다.
“닥터 최! 우리 빅터, 괜찮은 겁니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면회도 안 된다고 하던데요.”
“죄송하지만 빅터는 지금은 안정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 사건에서 가족들이 죽고 본인 혼자 살아남았으니 제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 겁니다.”
“아…….”
로버트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최기석은 그가 감정을 추스르기를 기다렸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경찰과는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수사 중인 내용에 대해 들었습니다. 경찰은 큰아들이 화재를 일으켰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더군요. 화재 현장에 남아 있던 유서와 목숨을 끊고 싶다는 제게 남겼던 문자를 토대로 말입니다.”
로버트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우리 아들에게 자살 충동이 있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과 같이 목숨을 끊을 녀석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번에 하신 말씀이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마지막에 이상한 이야기를 한 가지 흘리더군요. 큰아들이 생명보험을 들었는데 보험금을 손주가 수령하기로 되어 있다고요. 혹시 거기에 대해 아는 게 있냐고 물었어요.”
“으음…….”
최기석은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보험금 이야기를 들으니 번뜩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로버트는 손주분, 그러니까 빅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착한 녀석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문제 한번 일으킨 적이 없죠. 다만 일 년 전에 도박에 손댄 것 같더군요. 그것 때문에 아들과 마찰도 있었고요. 물론 지금은 도박에 손도 안 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닥터 최. 이제 제게 남은 건 빅터뿐입니다. 손주 녀석이 건강하게 퇴원하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기석은 로버트와 이야기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샤워하고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갖가지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또렷한 건 자살소란을 일으킨 빅터의 모습과 그의 텅 빈 진단명이었다.
조만간 빅터와 큰 전쟁을 치러야 하리라.
잔인한 진실에 로버트가 몸서리를 칠 게 눈에 선했지만 이번 사건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최기석이 상태창을 띄웠다.
[트레이닝 모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트레이닝 룸은 하루 최대 다섯 번까지 입장 가능하며 기존에 촬영한 동영상에 기초합니다.]
[영상을 선택하고 트레이닝 룸에 입장해 주세요(3/5)]
[스승의 신수술을 택하셨습니다. 보조 스태프의 수준은 최상입니다.]
익숙한 음성과 함께 눈부신 광채가 몸을 휘감았다.
이윽고 최기석은 수술복을 갖춰 입은 채 수술대 앞에 자리 잡았다.
그의 주변에는 든든한 가상의 스태프가 있었다.
‘빨리 방법을 찾아야하는데.’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다.
샬롯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스승의 신수술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샬롯의 수술법과 스승의 수술법.
이 두 가지가 수술 범위와 구체적인 수술과정에서 충돌했던 탓이다.
그의 숙제는 바로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것.
“지금부터 확장성 심근병증과 심부전증에 대한 신수술을 시작한다.”
스으으윽.
가상의 스태프가 수술 부위를 소독하고 방포를 씌웠다.
이어지는 정중흉골 절개술.
견인기로 수술 시야를 확보하고 인공심폐기를 돌리는 것으로 수술 준비 완료다.
신수술의 첫 번째 단계는 관상동맥 우회술.
최기석은 익숙하게 내흉동맥을 박리하고 협착이 일어난 관상동맥 하단부에 연결해 주었다.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트레이닝 룸에서 CABG 연습한 숫자를 따지면 이미 100회도 한참 넘겼으리라.
CABG는 이제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수술 준비를 끝낸 최기석은 가만히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심근을 어떤 방식으로 절제할 것인지, 절제 후 인공혈관과 조직은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스승의 수술법을 택하면 수술 범위를 확장할 수 있지만 수술 난이도가 올라가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샬롯의 수술법은 시간과 난이도를 줄일 수 있지만 수술 범위가 줄어든다.
“…….”
최기석은 자물쇠처럼 입을 다물고 수술 부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권일수가 너스바 수술에서 견인기를 사용한 것처럼 말이다.
철근 같은 침묵이 로젯을 짓누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도전해 볼 만한 방법이 떠올랐다.
혹시 이 방법이라면 두 가지 수술을 모두 아우를 수 있지 않을까.
“메스.”
각오를 다지기 전 손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