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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337화 (336/407)

반격 (1)

“빅터. 내 말 이해했어요?”

최기석은 마음속 의문을 억누르며 빅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이내 빅터가 주사기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야수처럼 난폭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의 그는 그저 한 마리의 순한 양일 뿐이었다.

팽팽했던 대치 상황이 끝나면서 스태프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잘했어요.”

최기석은 그에게 다가간 후 주사기를 치우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닥터 최. 미안합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빅터가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꼈다.

“가족을 생각할 때마다 분통이 터져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하필 내게 왜 이런 일이…….”

“빅터의 입장이 되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한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이제 이 환자를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자살시도를 한 경우, 정신과에 협진을 요청한다. 그러면 사지를 결박하고 향정신성 약품을 투여하라는 오더를 내린다.

“일리나. 우선 빅터를 격리실로 보낼게요. 처방은 정신과 협진요청해서 나온 걸로 따라 주세요.”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후 최기석은 스테이션으로 이동해 정신과에 협진 요청을 했다.

잠시 후 중환자실을 찾은 정신과 전문의가 빅터와 상담을 나눈 후 격리실에서 나왔다.

“선생님. 빅터는 어떻습니까?”

“DH(delusion and hallucination, 망상과 환각)와 공황(panic)이 심하네요. 본인을 제외한 가족이 다 죽었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심리적인 예후가 나쁘다는 뜻이죠?”

“아주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잠잠해 보일지라도 언제 폭발할지 몰라요. 휴화산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선 사지 억류하고 강한 약물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정신과 전문의 루시가 빅터의 격리실을 힐끔하고서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선생님, 혹시 말입니다. 환자가 본인의 정신 상태를 연기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런 케이스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혹시 저 환자를 의심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제 동료 중에 정신질환에 걸린 척 연기하는 환자를 봐서요.”

“으음…….”

루시가 턱을 쓸어내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신질환에 걸린 척하는 케이스가 없는 건 아닙니다. 뉴스에서도 비슷한 케이스를 많이 봤을 거예요. 하지만…….”

“하지만?”

“정신질환 환자 연기를 하는 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보통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본인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이 그럴 이유는 전혀 없죠. 이 정도면 충분한 답변이 됐을까요?”

“네. 충분합니다.”

“저 환자는 당분간 격리실 신세를 져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최소 한 번은 저를 봐야 할 것 같으니 데이 온 콜로 협진 넣어 주시고요.”

루시가 떠난 후 최기석은 스테이션의 감시 모니터로 빅터의 모습을 살폈다.

다시 사용하는 히포크라테스의 눈.

물론 이번에도 정신과 질환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빅터에게서 고약하게 썩은 시궁창 냄새가 풍겼다.

* * *

그날 정오, 의국.

최기석은 환자의 차트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환자의 이름은 리아.

5세의 여아로 오늘 오후 권일수에게 CABG(관상동맥 우회술)을 받기로 예정됐다.

그 수술에서 최기석은 제1보조로 맡았고 말이다.

소아에게 펼칠 관상동맥 우회술에서 권일수는 과연 어떤 솜씨를 보여 줄까.

벌써부터 기대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윽고 차트를 훑던 최기석이 흉부외과를 벗어났다.

그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신경외과.

최기석은 스태프들에게 알음알음해서 레온이 휴게실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레온은 소파에 앉아 에너지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미스터 최, 신경외과에는 웬일이에요?”

레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할 말이 있어서요.”

“직접 찾아온 걸 보면…… 중요한 일인가 보네요.”

“중요하면서도 미안한 일이죠.”

최기석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레온의 눈치를 봤다.

하고 싶지 않지만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 생겼다.

그동안 속으로 끙끙 앓으며 미뤄 왔지만 오늘에서야 마음을 굳혔다.

“…….”

차분하게 말을 꺼내는 최기석.

레온은 침묵을 지키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설명이 끝나자 휴게실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입은 연 것은 레온이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나서서 욕먹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있는 거니까요.”

“대단하네요. 미스터 최는…….”

레온이 쓴웃음을 지으며 최기석을 응시했다.

최기석의 강단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의사가 과연 MHC에서 얼마나 될까.

“그런데 어쩌면…… 아주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

“두 분 다 장기이식증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분들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이 이야기를 제게 하는 이유가 뭐죠? 굳이 저를 거치지 않아도 됐을 것 같은데.”

“아이의 주치의가 레온이잖아요. 레온 모르게 일을 진행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랬군요. 어쨌든 행운을 빌게요.”

“고마워요.”

대화를 끝낸 최기석은 신경외과의 한 병실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산소호흡기에 생명을 의지하고 있는 제라드가 보였다.

제라드는 얼마 전 교통사고로 입원했는데 머리에 데미지가 심해 뇌사 판정을 받았다.

“누구십니까?”

제라드의 아버지 말콤이 최기석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녕하세요. 흉부외과에서 근무 중인 기석 최라고 합니다.”

“흉부외과 의사분이 왜 저희를 찾아오셨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최기석은 부부 곁에 서서 제라드를 내려다보았다.

두 눈을 감은 제라드는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일어나서 해맑게 손을 흔들 것만 같았다.

“예쁜 아이군요.”

“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죠. 왜 하필이면 우리 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샤론이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아파하는 그녀의 모습에 최기석은 더욱더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긴히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뭡니까?”

말콤의 재촉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부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선생님, 일어나세요!”

그의 돌발행동에 부부가 화들짝 놀랐다.

갑작스레 병실을 찾은 흉부외과 의사가 무릎을 꿇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지금부터 두 분 가슴에 못을 박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밉고 야속하게 느껴지시겠지만, 그래도 말씀은 드려 보고자 합니다.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지금 흉부외과에는 라훌이라는 어린 환자가 있습니다. 라훌은 인도에서 온 아이로 심부전증으로 입원 중입니다. 라훌을 완치하려면 심장이식을 해야 하는데 공여자를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습니다. 지금은 심실보조장치에 의존해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고요.”

“…….”

“만약 두 분의 결단이 있다면 라훌은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최기석은 직접적으로 장기이식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꺼내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하…… 지금 제라드의 심장을 이식해 달라는 겁니까?”

최기석의 의중을 알아챈 말콤이 펄쩍 뛰었다.

“너무하세요. 어떻게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실 수 있죠? 아이가 뇌사에 빠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죄송합니다. 경우가 아니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욕을 퍼부으셔도 할 말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최기석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또 하나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기에 두 분을 찾아뵈었습니다.”

“할 말은 끝났습니까? 그럼 이제 썩 꺼져요!”

말콤의 호통에 최기석이 사과하며 물러났다.

이윽고 부부는 침묵 속에 제라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들도 알았다.

뇌사에 빠진 이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것을.

주치의를 통해 제라드가 회복될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설명 또한 들었다.

그럼에도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어찌 피와 땀으로 키운 아이를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여보, 우리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말콤의 시선이 샤론을 향했다.

“전 자…… 잘 모르겠어요. 제라드가 평생 누워 있는 걸 지켜보는 것도 싫지만…… 장기이식을 하면 제라드는 완전히 세상을 떠나게 되잖아요. 그것도…… 싫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말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에 섰다.

그의 복잡한 심경과 달리 바깥의 날씨는 눈부실 정도로 화창했다. 그렇게 바깥을 살피던 중 아이의 손을 붙잡고 거리를 걷는 한 부모가 눈에 띄었다.

그들이 부러웠다.

얼마 전까지 자신들도 저 사소한 행복에 흠뻑 취해 있었기에.

그들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기에.

말콤은 창가에서 벗어나 보호자 전용 침상에 걸터앉았다.

최기석이 던진 한마디가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말에 속이 상했지만 새로운 사실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로서 제라드의 거취를 결정해야 할 때가 머지않았다는 점이다.

“여보.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말콤이 조용히 병실을 벗어났다.

* * *

“하아…… 미친 짓이었지.”

흉부외과로 돌아오는 최기석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기어이 꺼내고 말았다.

뇌사 판정을 받은 아이의 부모에게 심장이식을 부탁하는 이야기를 말이다.

샤론의 울먹거리는 모습과 말콤의 호통이 떠오르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왜 세상은 아픈 사람투성이인 걸까.

진정한 의미의 의사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무릇 숨이 붙어 있는 생명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인데…….

찰싹찰싹.

최기석은 가볍게 볼을 두드렸다.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그 감정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에게 생명을 맡긴 환자는 수없이 많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한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전도사일 필요도 있었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정신을 깨운 최기석은 곧바로 수술실을 찾았다.

J 로젯 앞에 스태프들이 한데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죽상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나중에 말해 줄게.”

“지금 시원하게 털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찰스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미구엘이 약이라도 먹은 것 같아. 아까 의국에서 처방을 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와서 그동안 미안했다고 하더라. 조금 있으면 일도 그만둘 거라던데?”

“나한테도 그랬어. 근데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네. 이 인간이 하는 말을.”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더라. 평소랑 느낌이 달랐어.”

찰스가 제레미의 의심을 불식시켰다.

정치력이 높아서 그럴까, 찰스는 미구엘의 내적변화를 정확하게 잡아내는 모습이다.

“다들 모였군.”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집도의 권일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준비는 됐겠지?”

“네!”

“물론입니다.”

스태프들의 씩씩한 대답에 권일수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찰스의 최종 브리핑을 듣고 수술 시작하자고.”

“환자는 5세 여아, 이름은 리아입니다. 몇 개월 전 가와사키병으로 본원 심장내과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후…….”

찰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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